이해인 수녀가 기억하는 동화작가 정채봉
처음 매어 보는 넥타이와 짧은 머리가 어색했던 열네 살 즈음이다. 엄마는 내가 잠에서 깨기도 전에 집을 나서 어둑해지면 퇴근을 했다. 매일같이 일만 하고 집에 들어오면 살림만 하는 줄 알았던 엄마가 나에게 건넨 두 권의 책. 한 권은 정채봉 작가의 동화집 <물에서 나온 새>, 또 한 권은 이해인 수녀의 시집 <민들레의 영토>였다.
그 책 두 권으로, 엄마도 나와 같은 열네 살 즈음에는 글쓰기를 꿈꿨던 문학소녀였다는 것과 틈틈이 책을 읽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당시에는 정말 놀라운 발견이었다. 그리고 내가 책 읽기와 글쓰기에 관심을 갖게 된 순간이기도 했다.
엄마가 아들에게 권하는 책이 결코 허투루 일리는 없을 것이다.
어린 딸 리태에게 ‘좋은 가장, 좋은 아빠, 좋은 남편으로 살아서 아이들 시집 장가보내는 것이 꿈’이라고 했던 정채봉 작가. 이제는 글을 통해서만 그를 기억할 수 있다는 사실이 안타깝다. 생전의 정채봉 작가를 가깝게 지켜보고, 편지와 시를 통해 마음을 전했던 이해인 수녀가 기억하는 그의 모습을 묻고 들어보았다.
나 역시 이해인 수녀와 손 편지, 이메일을 주고받으며 작가로서, 편집자로서, 인간으로서 정채봉의 모습을 하나씩 떠올려 나갔다. 그의 첫인상은 어땠을까.
“할 말을 다 못 하고 부끄럼을 타는 소년 같은 모습이었어요.”
순천의 작은 바닷가 마을에서 태어난 그는 어린 시절 어머니를 잃고 여동생과 함께 할머니의 손에서 자라게 된다. 소년 정채봉은 늘 혼자였고 외롭게 바다를 바라보는 시간이 많았다고 한다. 하지만 그 외로움은 정채봉을 생각하게 만들었고, 자라서는 동심을 그려내는 작가로 만들었다.
“외로웠던 환경이 오히려 혼자 이런저런 생각을 많이 하게 하였고, 친구들과 어울리지 못한 대신 자연을 관찰하고 벗할 수 있어서 정서적으로 부자가 될 수 있었습니다. 사실 내가 쓰는 글의 많은 부분을 어린 시절 기억의 조각에 빚지고 있는 거죠.”
-책 (<엄마 품으로 돌아간 동심> 정채봉 / 본문 일부)
학창 시절 친구들에게 수백 통의 편지를 보내면서 오랜 생각을 글로 옮기기 시작했다. 동국대학교 국문학과를 진학한 그는 습작 시절을 거쳐 대학교 3년 때인 1973년, <꽃다발>로 동아일보 신춘문예 동화 부문에 당선되었다. 당시에는 동화라는 장르가 대접을 제대로 받지 못했고, 그 뒤로도 10년 가까이 눈에 띄는 작품을 내놓지 못한다.
그는 가족의 생계를 위해 직업 전선에 뛰어들어야만 했다. 그리고 <샘터>와의 만남은 정채봉을 편집자로서, 또 작가로서 한 단계 도약하게 만들었다. 당시 이해인 수녀는 정채봉의 권유로 <샘터>사에 글을 기고하기 시작했다. 그는 ‘샘터맨’으로서도 활동 영역을 넓혀 나갔고, 뛰어난 성과를 기록했다.
“편집자 정채봉은 무엇을 직설적으로 강요하기보다는 부드럽고 따듯하게 권유하는 분위기의 소유자라 더 상대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 같았어요.”
당시 정채봉 작가는 이해인 수녀가 수도자라서 그녀의 문학성이 폄하되는 것 같아 안타까워했다. 그는 이해인 수녀의 <밭노래>라는 동시를 무척 좋아했다. <밭노래>는 이해인 수녀가 수녀원의 밭에 나가 일한 경험을 그대로 적은 것인데, 정채봉 작가는 특히 굼벵이를 정답게 여기는 대목이 좋다고 말했다.
동심을 잃지 않고, 생각하는 동화라는 장르를 나름대로의 방식으로 개척해서 간결한 문체 속에 삶의 다양성과 교훈을 깊이 있게 담은 작가로 글 쓰는 정채봉을 떠올리는 이해인 수녀. 그렇다면 그녀가 정채봉 작가의 작품 중에서 가장 좋아하는 글은 무엇일까.
“<오세암>과 샘터에 연재했던 <생각하는 동화> 시리즈와 딱 한 권의 시집 <너를 생각하는 것이 나의 일생이었지>를 좋아한다.”
역시나 정채봉 작가의 작품 중에서 단 하나를 고르는 것은 무척 어려운 일이다.
샘터에서 편집자와 작가로서 승승장구하던 정채봉에게도 1980년 5월의 광주는 충격과 분노로 다가왔다. 자괴감과 무력함에 휩싸인 그는 가족들과 함께 가톨릭으로 귀의하게 된다. 정채봉 작가와 김수환 추기경은 각별한 사이로, 추기경의 일생을 <바보 별님>이라는 동화로 그려내기도 했다.
이후 <물에서 나온 새>로 1983년 대한민국 문학상을 수상하였고, 이해인 수녀를 비롯한 많은 독자들이 그의 작품 중에 제일로 손꼽는 <오세암>을 내어놓는다. <오세암>은 어린 정채봉이 할머니를 따라다녔던 순천 선암사에서 들은 옛 설화에서 아이디어를 얻었다고 한다.
정채봉 작가의 작품에서 빠질 수 없는 것이 세 가지 있다. 그 첫 번째는 ‘엄마’이고, 두 번째는 ‘바다’다.
편집자와 작가의 이름을 벗은 인간 그대로의 정채봉은 일생 동안 엄마를 향한 애틋한 그리움 속에 살았다. 자신이 태어난 바닷가 마을의 파도와 바람, 학교, 나무가 그의 이야기 속 배경이 되었고, 일찍 아들의 곁을 떠난 엄마에 대한 그리움이 작품 속에 진하게 배어있다.
“아빠는 바다를 좋아하셨죠. 아빠의 삶 속에는 바다가 함께 살아 숨 쉽니다.” (딸 정리태)
“아빠가 너만큼 작았을 때 해질 무렵이면 늘 이곳 바닷가에서 할머니를 기다렸단다...(중략)
나이 어렸을 때 꿈은 선장이었는데 할머니 품안에 있으면 아빠는 바다를 크게 지휘하는 멋진 선장이 되어 있었단다.” (아빠 정채봉)
그의 작품 <초승달과 밤배>의 주인공 ‘난나’는 춥고 힘든 어린 시절을 보내지만 넓은 바다를 보며 꿈을 키운다. 소설 속의 난나는 바닷가를 홀로 바라보며 생각에 잠긴 소년 정채봉이자 엄마를 그리워하는 아들 정채봉이다. 오래전 팬들과 만남에서 고백하듯 들려주었던 이야기.
“바다는 내 그리움의 총체고, 엄마가 그리울 때는 하늘을 본다.”
그러나 마음먹은 대로 움직여주지 않는 것이 삶이다. 그중에서도 가장 말썽인 것이 바로 건강이다.
1998년 말, 정채봉 작가를 찾아온 간암과 긴 투병생활은 그의 삶을 바꾸어 놓았다. 하지만 투병 중에도 글쓰기를 게을리하지 않았으며, 자신의 고향 순천을 배경으로 한 <푸른 수평선은 왜 멀어지는가>로 소천아동문학상을 수상했다. 단상에 선 그의 수상 수감.
“중요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하느님이 그렇고 마음이 그러하며, 동심이 또한 그렇지 않습니까?”
그의 작품에서 빠질 수 없는 마지막은 바로 ‘동심’이다. 이해인 수녀에게 동심이란 기도의 모체이자 그리움의 가치라고 했다.
“동심이란 단순 단순히 철없고 어린것을 뛰어넘는 순수함, 순결함, 진실함과 직결되는 기도의 모체라고 생각된다. 그래서 어른이 되어서도 되찾고 싶은 그리움의 가치이기에 자주 언급하는 게 아닐지. 또한 많은 이가 동참하도록 초대하는 게 아닐까 생각해본다.”
그렇다면 정채봉 작가와 이해인 수녀가 생각하는 좋은 글쓰기란 무엇일까?
“좋은 글쓰기란 과장됨이 없고 겉 꾸미지 않은 진실함, 겸손함의 덕목이 필요하고 그래야만 공감과 감동을 준다고 본다. 꾸준히 일기 쓰기를 지속하는 것도 좋은 글쓰기를 위한 수련의 과정이 될 거라고 믿고 그렇게 실천하고 있다.” (이해인 수녀)
“내가 느끼고 있는 맛을 독자들도 함께 느끼는 것이 좋은 글쓰기입니다.” (정채봉 작가)
이해인 수녀는 정채봉 작가가 세상을 떠나기 열흘 전 문병을 갔던 일과 못 다한 이야기들을 들려주었다. 병원을 찾았더니 환한 얼굴로 자신을 반겨주었고, 많은 간호사들에게 그녀를 보이고 싶어 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저서에 사인을 해주는데 손이 몹시 떨려서 무척 마음이 아팠다고 한다.
그녀에게 소설가 최인호, 시인 김형영, 동화작가 정채봉과 함께 만나는 일은 즐거웠고, 때론 지나친 농담을 해도 밉지 않은 형제, 가족으로 여겨졌다.
‘순천의 흙은 흑토와 황토가 모두 차져서 안 되는 농작물이 없고, 그래서 꽃과 과일도 제일’이라며 이해인 수녀에게 자랑을 건넸던 정채봉은 이제 그 순천 땅에 묻혔다. ‘아버지가 단 하루만이라도 휴가를 나온다면 아버지가 엄마인 할머니 품에 안겨 슬픔을 털어놓았듯, 아버지 품에 안겨 울 것만 같다. 그리고 진심으로 존경하고 사랑하노라고 꼭 한 번 말하고 싶다’는 어린 딸 리태는 이제 아버지를 따라 동화작가가 되었고, 정채봉 작가의 오래전 꿈이었던 시집을 갔으며 두 아이를 둔 엄마가 되었다.
“동심이 세상을 구한다.”
예전에는 그의 말이 다소 거창하게 들렸다. 하지만 세월이 지나고 그 말을 다시 내어 보았을 때는 전혀 다른 의미가 되어있었다. 동심은 자식을 걱정하는 부모의 마음이고, 부모를 위하는 자식의 마음이기도 하다. 우리가 바쁜 일상 속에서 잊고 살았던, 모두 갖고 있지만 꺼내기엔 쑥스러워 표현하지 못했던 그런 것들 말이다.
오랜만에 엄마와 통화를 했다. 스무 살이 되면서 아빠는 이미 아버지가 되었는데, 엄마는 나에게 여전히 ‘엄마’로 남아있다. 정년퇴임을 한 뒤 늦잠도 실컷 자고 여행도 자주 다닌다고 했다. 하지만 한평생 일했던 직장을 떠난 허전함과 어색함이 묻어있었다. 여전히 책은 틈틈이 읽는다고 했다. 내일은 서점에 들러 정채봉 작가의 동화책 한 권과 이해인 수녀의 시집 한 권을 사서 보내기로 마음먹었다.
유난히도 바람이 매서웠던 아침. 오랜만에 넥타이를 매어 본다. 그 방법을 잊어버렸을까 걱정했지만 엄마가 가르쳐 준 넥타이 매는 법이 용케도 손에 남아있다.
자주 안 신던 구두까지 신고 전철과 버스를 갈아타서 두 시간 남짓 걸려 도착한 곳은 인천의 한 장례식장. 수척한 모습으로 조문객들과 인사를 나누는 그를 만날 수 있었다. 배우 성동일이다. 어린 시절 지독한 가난 때문에 힘들게 고생했던 그는 어머니에 대한 사랑이 각별하다. 그에 대한 어머니의 사랑은 말할 것도 없었다.
“정말 고생하셨습니다. 형님과 함께 할 수 있어서 행운이었습니다.”
인사를 건네니, 오히려 나를 안아준다.
“고맙다. 엄마 살아계실 때 잘 해라. 그거면 된다.”
덤덤했던 그의 표정과 말투가 오히려 나를 더 슬프게 했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엄마는 누구나에게 그립고, 고맙고, 미안한 존재인가 보다.
* [순천, 그리고 순천사람들 3] ‘작가의 손을 떠난 글은 독자의 것이다’ 작가들의 작가, 소설 <강>, <달궁>의 서정인 작가와의 만남1에서 계속됩니다. 시대에 따라 변화하는 출판, 문화계의 모습과 사실주의 문학에 대한 이야기를 담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