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에게 좋아하는 것이 있습니까
말이 없고 마음이 바다같이 넓은 사람을 만나 결혼하고 싶었던 나는 실제로 말이 없고 마음이 바다같이 넓은 남편을 만났다. 마음이 바다같이 넓은 사람 앞에 말이 없어야 한다는 조건이 들어간 이유는 간단하다. 내가 지껄여야 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남편은 내 얘기를 하루 종일도 들어준다. 처음 만난 날, 저러다 목뼈 부러지는 거 아닌가 걱정이 될 정도로 쉬지 않고 끄덕거리며 내 얘기를 듣던 남편은 결혼하고 9년을 앞둔 오늘에 이르러서도 내가 뭐라면 배꼽을 잡고 웃어준다. 회사에 있다가 재미있는 일이 생기면 나는 얼른 남편 배꼽을 빠지게 해주고 싶어서, 어떻게 하면 더 재밌을까 머릿속으로 시뮬레이션도 해보고는 한다.
하나는 지껄여야 하고 하나는 가만 두면 하루 종일 한마디도 하지 않을 수 있는 판이하게 다른 성향의 우리는 유독 자녀교육에 있어서만큼은 뜻이 같다. 우리 모두, 좋아하는 게 있는 아이로 키우는 것이 거의 유일한 교육 목표이다. 가난 때문이기도 했겠지만, 우리는 자라며 뭔가를 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을 못했다. 책 읽고 음악 듣고 영화 보는 것 말고 돈 들어가는 어떤 행위도 하지 못하고 자랐다. 나의 경우 형편에 맞지 않게 피아노와 첼로 개인 레슨을 받았는데 그마저도 내가 이걸 진짜 제대로 좋아해도 되나 하는 고민이 드는 순간에 어차피 전공도 못할 거 배워서 뭐하나 하는 생각에 그만둬버렸다. 비행기를 처음 타본 것도 사회인이 되어 돈을 벌기 시작한 후의 일이었고, 남편은 신혼여행 갈 때 처음 여권을 만들었다.
그래서, 딱히 뭘 미치게 좋아해 본 기억이 없는 우리는, 우리 아이들만큼은 특정한 무언가가 너무 좋아서, 아침에 번쩍번쩍 눈이 떠지고 밥 먹을 때도 똥을 쌀 때도 그 생각만 하는 무언가가 있었으면 하고 바라게 되었다. 그림이 될 수도 있고 기타가 될 수도 있고 춤이 될 수도 있고 공부가 될 수도 있고 무엇이든 상관없었다. 뭔갈 좋아하는 인간에게서 품어져 나오는 그 싱그러움, 에너지, 기쁨, 존재의 이유가 덕지덕지 달라붙어서 이렇게 보아도 저렇게 보아도 사랑스럽고 충만한 누군가가 되었으면 했던 것이다.
아마도 많은 부모들이, 내 아이가 그렇게 사랑하고 좋아하는 일이 공부였으면 하고 생각할 것이다. <SKY 캐슬> 같은 드라마가 나와 서열과 등급에 지친 아이들의 병적인 군상을 보여줘도 결국 변하는 것이라곤 '코디'라는 것이 있는 줄도 몰랐던 지방 도시에 코디 열풍이 부는 것뿐인 이유도 그래서일 것이다. 실제로 이제까지의 한국사회가 학벌에서 기회가 나오는 사회였던 것은 분명하다. 전문직 종사자가 많은 강남에서 그토록 자녀교육에 목을 매는 것도, 자기 부를 자녀대에 세습하기 위해서는 직업군의 세습도 필요하기 때문이라지 않은가. 세상이 이런 지경인데 좋아하는 게 있는 사람이 되었으면 하고 바라는 부모라니, 너무 한가한 소리로 들릴지도 모르겠다. "예서야, 엄만 니 인생 포기 못 해." 예서 엄마의 대사가 소득 수준을 불문하고 그 많은 엄마들의 공감을 자아냈던 것도, 한국사회에서 학벌이 안기는 절박함이 얼마나 보편적인 감정인지를 보여준다.
그러나 미래는 변한다. 최근 편집하고 있는 책 때문에 초등학교 선생님을 만나 뵐 일이 있었는데, 조만간 출시될 수학 학습 플랫폼과 관련된 이야기를 들려주시며 이런 말씀을 하셨다. "단순히 공부 잘하는 것으로 교사를 뽑는 시대는 조만간 끝날 거예요. 인공지능 학습 프로그램을 이용하면 아이 한 명 한 명이 뭘 알고 뭘 모르는지 하나하나 체크해서 틀린 아이와 맞은 아이에게 각각 다른 문제를 제공하는 단계로까지 발전해버렸는데요. AI가 칭찬도 해주고 격려도 해주는 마당에, 단순히 공부 잘하는 선생님이 아이들을 가르친다 한들 AI가 가르치는 수준을 뛰어넘을 수 있을까요? 이제 교육현장도 인간이 제공할 수 있는 특수한 공감력, 그게 없이는 설 자리가 사라지는 변화의 때에 접어들었어요."
이런 시대에 정말로 점수 몇 점 높고 낮은 것이 아이의 미래를 좌우하게 될까? 나아가 정말로 성적이 아이를 행복하게 만드는 발판이 될까? 아니라고 본다. 1995년 <감성지능>이라는 책을 출간한 EQ의 창시자 대니얼 골먼은 <사회지능>에 이어 <에코지능>이라는 책을 출간했는데, 그가 출간한 책들은 변화하는 시대에 적응해 인간이 생존하기 위해서는 어떤 능력들이 필요하게 되었는지를 차례대로 보여준다. IQ의 시대는 EQ의 시대로 변화했다. 이제 단순히 파괴적이고 충동적인 감정을 다스리고 다른 사람의 감정을 헤아리는 데서 벗어나, 적극적으로 타인의 감정과 상황을 배려하는 사회지능이 필요한 단계로 사회는 변화했으며, 앞으로의 시대에서 생존하기 위해서는 인간이 생산해내는 제품이 환경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를 고려하는 단계로까지 발전하지 않으면 안 되게 될 것이다.
불과 몇 년만 지나도 인간다운 인간, 함께 있고 싶고 같이 있으면 즐겁고 위로가 되는, '존재로서의 인간'이 각광받는 시대가 올 것이다. 가만히 아이들의 모습을 떠올려보자. 충분히 싱그러운가. 충분히 행복해 보이는가. 자기 안에 즐거움이 충만해서, 옆에 있는 슬프고 우울한 표정의 사람들을 돌아볼 여유와 아량이 있는가. 나는 우리 아이들이 그래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 모든 일이 가능하기 위해 그들에겐 그들이 사랑하고 좋아하는 무언가가 반드시 필요하다고 본다.
얼마 전 아침에 일어나 잠이 덜 깬 채로 핸드폰을 열어 이런저런 잡스러운 기사들을 보고 있는데, 아직 자고 있는 줄 알았던 큰 애가 "엄마" 하고 나를 불렀다. 핸드폰 너머로 아이 얼굴을 쳐다보며 "응?" 하고 대답했더니 아이가 말했다.
엄마. 내가 엄마가 걱정이 돼서 그러는데,
어두운데 그렇게 핸드폰 보고 있으면 눈이 나빠질 수도 있어.
그랬다. 어두운 데서 핸드폰을 보고 있으면 눈이 나빠질 수 있는 것이었다. 나는 '엄마가 걱정이 되어서' 그 얘기를 해준 아이에게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나중에 장사를 한다면 꼭 저런 사람이랑 하고 싶다고 느껴질 정도였다.
1급 범죄로 인해 죽는 사망자보다 자살자의 수가 열두 배나 높은 대한민국에서, 청소년 사망 원인 1위가 자살인 바로 이 나라에서 아이들은 너무나 불행하다. 아는 분의 이야기를 들었는데, 자기가 아는 똑똑이 하나는 공부하는 게 너무 수월했어서 자기보다 힘들게 공부했었어야 하는 평범한 우리들을 위해 웬만하면 양보하고 배려해주고 도와주려고 노력한다고 고백했다고 한다. 공부는 저런 사람이 하도록 하자. 세상엔 얼마나 많은 즐거운 일들이 있는가. 우리 공부라는 쇠사슬로 꽁꽁 묶인 이 사회의 자발적 결박을 벗어나자. 숙제 했음 쉬어라고 말해주고는 그 이후로 뭘 하든 신경 좀 꺼주자. 생각은 생각할 수 있을 때 할 수 있다. 뭘 먹고 뭘 하며 어떻게 살지, 제발 좀 알아서 하게 해주는 그런 부모가 되어주자.
그러자면 당연히 뭘 좋아할 수 있는지 결정할 수 있는 환경, 좋아하는 것에 집중할 수 있는 환경, 좋아하는 일을 체계적으로 잘할 수 있는 환경이 필요하다. 하다 못해 기타를 배우려 해도 악보를 볼 수 있어야 하고 샘플을 보며 따라 할 수 있어야 하고 샘플을 얻기 위한 서치를 해야 하고 실력을 향상해 나갈 수 있는 연습과 실전이 필요하다. 이 모든 과정의 옆에서 부모는 이 학습의 과정이 끊이지 않고 지속될 수 있도록 서포트해야 한다. 그래야 좋아하는 것을 잘하게 되는 단계로 나아가는 것이다.
좋아하는 걸 좀 하게 냅두자,는 것은 무관심이나 방관과는 전혀 다른 개념이다. 오히려 더 적극적인 개입과 지지가 필요하다. 학원 뺑뺑이와는 다른 차원의 지원이다. 부모의 모범이 첫발이 되어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 부모가 드라마와 술 모임에 빠져 살면서 아이가 혼자 뭘 좋아해서 저절로 잘하게 되기를 기대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학습하는 부모 밑에서 학습하는 자녀가 나온다. 누누이 말하지만, 아이는 부모를 그대로 닮아 인생의 패턴을 결정할 것이다.
나는 과연 그럴 수 있을까. 모르겠다. 탐욕과 게으름이 내 발목을 붙잡을 때, 이 글 한 번 다시 보고 마음을 비우고 몸을 움직이자고, 이렇게 모두가 보는 앞에서 오늘의 다짐을 박제해본다. 나여, 제발, 나라는 부모여, 우리 아이들에게 하기 싫은 무언가가 되라고 강압하지 말자. 나는 대충 살면서 애한테 최선을 다하라고 말하지 말자, 우리는 낳거나 기른 사람이지 대신 살아줄 사람이 아니다. 아이는 보는 대로 클 뿐, 강요하는 대로 자라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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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동영상 속 아이는 '한 번만 더 읽어줄까요?'를 정말 쉬지 않고 물어봤다. 지금도 아이는 자기가 이야기를 짓는 것을 좋아하고 남편이 이야기를 지어 들려주는 것을 좋아한다. 이야기를 듣고 말할 때 아이 눈이 얼마나 반짝이는지 보지 않은 사람은 알 수가 없다. 우리는 '이제 그만 얘기하자'라는 말을 아이 앞에서 해본 적이 없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