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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오늘 Nov 17. 2019

아이는 진지한 대화 상대를 원한다

애 앞이라고 대충 말하기 있기 없기?

맞벌이 부부인 우리는 상대적으로 다른 부모에 비해 아이와 함께 있는 시간이 짧다. 우리의 두 아이는 적어도 오전 8시 30분 전에는 나와 남편과 떨어져서 교육기관으로 등원하거나 등교해야 하고 저녁 6시 반이 넘는 시간까지 외부에서 사회활동을 하다가 엄마나 아빠를 만나 저녁시간을 보낸다. 아침 7시에 일어나서 최대 한 시간 반, 저녁 6시 반에 만나 잠드는 10시까지 최대 세 시간 반, 그러니까 하루에 총 다섯 시간이 우리가 아이의 얼굴을 볼 수 있는 최대 시간이다. 그중 적어도 두 시간이 먹고 씻고 벗고 입는 시간이기 때문에, 우리가 함께 놀 수 있는 시간은 세 시간이다. 하루 세 시간.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시간이다. 앞서 이야기한 대로, 우리는 이 세 시간을 절대적으로 아이들의 시간으로 픽스해두었다. 그 시간에 아이들은 부모와 하고 싶은 것을 해야 하고, 부모에게 선택지는 없다. 


함께 그림을 그리다 보면, 어느 순간 같은 눈높이에서 대화를 나누게 된다. 이거 왜 이렇게 번지냐. 물을 너무 많이 섞은 거 아니야? 수채화 종이가 아닌 것 같은데. 


나는 첫 아이의 육아휴직이 끝나고 복직을 앞둔 시점, 한 가지 다짐을 했다. 아이는 엄마와 함께 있어야 하는 상당 시간을 희생하며 보육기관에서 자기 인생의 대부분을 보내야 한다. 그런 아이에게 나는 무엇으로 보상할 것인가 하는 고민 끝에 내린 결론이었다. 그것은 '엄마랑 함께 있는 동안에는 항상 즐겁게 있게 하자'는 것이었다. 엄마는 즐겁고 유쾌한 사람, 함께 있으면 기분이 좋고 흥이 나는 사람, 헤어지는 일은 괴롭지만 약속한 시간에 반드시 함께 있는 사람이기 때문에 불안한 마음 없이 다른 곳에서도 안정적으로 놀 수 있도록 배려해주는 사람, 뭔가 다른 많은 사람들보다 더 따뜻하고 재밌고 좋은 사람이 되어야겠다고 다짐했다. 


그런 사람이 되자면 함께 있는 시간에 학습지나 언어 공부를 할 수는 없었다. 둘째 아이를 출산한 직후에 첫째가 애 아빠랑 고깃집에서 고기를 먹으면서 저 글씨가 다 뭐냐고 물어 남편이 삼겹살, 항정살, 가브리살, 국내산 등의 글씨를 읽어준 적이 있는데 애가 글씨에 관심을 보이면 한글을 가르쳐야 한다길래 모 한글 교육업체에 방문수업을 신청해 배운 적이 있었다. 결론은 나와 아이 모두에게 이중의 스트레스였다. 애랑 놀이터에서 놀고 있다가 부랴부랴 선생님 방문 시간에 맞춰 뛰어들어가기 일쑤였고 밖에서 놀고 있는 우리를 기다리다 그냥 돌아가신 날도 있었다(진짜 쓰레기 고객이었다. 너무 죄송합니다ㅜㅜ). 무엇보다 1년 넘게 한글을 배웠는데 너무 어린 나이에 시작한 터라 그 학습지를 끝낼 때까지 애는 한글을 몰랐다 ㅋㅋㅋ. 때 되니까 저절로 했고, 학교 들어갈 무렵에는 읽고 쓰는 데 아무 문제가 없었다.  


대신 유별나게 집착했던 것이 대화였다. 나는 눈 떠서 애들이 잘 때까지, 계속해서 아이들과 이야기를 나눈다. 그리고 이야기를 나눌 때, 최대한 솔직하게 느끼는 대로를 이야기한다. 그러다 보면 아이가 하는 대화도 매우 진지해진다. 나는 이런 순간에 아이가 내게 해주는 말들이 진심으로 재밌다. 둘째와는 아직 주고받는 대화가 어색하지만, 첫째와는 정말 생각지도 못한 대화를 지속적으로 나누는데, 한 번은 이런 대화를 나눈 적도 있었다. 


교회에 가는 것을 정말로 싫어하는 기독교 신자인 나는, 일요일 아침이면 정말이지 힘겹고 괴로운 자기와의 싸움 끝에 잠에서 깨어난다. 내가 그렇게 겨우겨우 일어나 치카치카를 할 즈음, 나머지 세 사람(12년의 초중고 교육과정과 6년의 학사석사 수료 과정 중 단 한 번도 지각을 해본 적이 없는 남편과 그의 두 딸)은 이미 일어나 아침 먹고 씻고 입고를 끝내 놓고서 거실에 앉아 만화를 보거나 책을 읽으며 내가 일어나기만을 기다리고 있는데, 내가 오늘만 그냥 교회에 나가지 않으면 안 되냐고 사정을 하니 큰 아이가 '꼬박꼬박 나가야 교회지 가다 말다 하면 교회냐'라고 반문을 했다. 그래서 나는 아이에게 "너는 교회에 가는 게 좋아?" 물었는데, 아이는 내게 이렇게 대답했다. "엄마, 교회엘 좋아서 가? 가야 하니까 가는 거지". 


이후로 나는 교회에 가지 말자고 아이들에게 부탁하지 않고 가급적 너무 늦게 일어나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있다. 하지만, 내가 도대체 교회를 왜 다니는가 하는 문제에 있어서는 정말이지 답이 서질 않았다. 부모님이 너무나 독실한 분들이셔서? 일요일 저녁마다 주일학교에서 아이가 무슨 말씀을 들었는지를 전화를 통해 듣는 일을 인생의 낙으로 여기고 계시니까? 단순하게는 지옥에 갈까 봐? 나는 종교를 대하는 나의 이런 어정쩡한 상태를 함께 교회를 다니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물론이고 아이들에게도 굳이 포장하지 않았다. 그런 내 태도 때문이었는지, 그렇게 열심히 교회에 출석하고 있던 아이가 하루는 내게 이렇게 물어왔다. 

  

"엄마, 나는 교회엘 다니고 있으면서도 신이 진짜로 있다는 걸 믿을 수가 없어.
이건 잘못된 걸까?"


  정말 느닷없이 생뚱맞게 물어본 것이었어서 그 얘기를 듣자마자, 나는 정말 깜짝 놀랐다. 정말 깜짝, 누가 옆에서 워! 하고 놀라게 한 것처럼 충격을 받았는데, 동시에 정말 너무 반가웠다. "어머, 너도 그러니? 나도 그래! 나도 진짜 신이라는 존재가 있는지 없는지 믿기지가 않아서 교회엘 다니는 게 맞는 건가 생각할 때가 많아!" 그런 다음,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매주 교회엘 나가는지, 적어도 내가 믿고 있는 것은 무엇인지, 무엇으로부터 나를 보호하고 싶은지 아이가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설명해주려고 노력했다. 아이는, 안심한 것 같았다. 이후로 이런 대화는 다시없었지만, 이후 도쿄에 가 함께 미술관을 방문했을 때, 아이는 다시 한 번 진지하게, 왜 저 작가는 형체가 거의 없다시피 한 그림을 그려내고는 제목을 '존재한다는 것'이라고 지었을 것인지에 대해서 나에게 매우 진지하게 이야기했다. 


아이들끼리는 어떻게 저렇게 즐겁게 놀며 대화할 수 있을까? 서로 유치하다고 무시하지 않기 때문 아닐까?


아이들은 부모가 듣고 있다는 것을 안다. 첫 애 학교에 책 읽어주기 봉사를 하러 가서 최숙희 작가의 <마음아 안녕>이라는 동화를 읽어줬는데, 거기에 뭐든 대충대충 듣는 괴물이 나오자 듣기를 마친 아이들은 일제히 그 괴물이 '아빠'라고 대답했다. 아빠들은 도대체 어디엘 가야 제대로 대화를 나누는 괴물들인가. 집집마다 남편이 이야기를 들어주지 않아 고민인 아내들과 아빠가 이야기를 들어주지 않아 심심한 아이들이 그득그득하다는 것을 아빠들은 알까? 여하튼. 아이들은 부모가 자신을 어떤 대화 상대로 여기는지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다. 쬐끄만 게 뭘 안다고 말대꾸야? 하는 식의 말들을 들으며 '저 사람들과는 대화할 수 없겠구나' 진작에 마음의 문을 닫아버린 아이들도 대한민국에는 많을 것이다.


<러브 액츄얼리>에 이런 명대사가 나온다. Worse than the total agony of being in love(사랑에 빠진 것보다 더 총체적인 고통이 어디 있나요)? 아이 엄마를 떠나보내고 나서 문을 닫아걸고 더는 대화를 나누지 않는 아들에게 아버지가 무슨 고민이 있냐고 물었을 때, 아들은 해결해줄 수 없는 고민이라고 하더라도 듣고 싶으냐고 묻고는 아버지가 그렇다고 대답하자, 자신이 사랑에 빠졌다고 대답한다. 그 얘기를 들은 아버지가 안도의 웃음을 웃으며 난 또 무슨 큰일이 일어난 줄 알았다고 대답하자, 아들은 저렇게 말한다. 사랑에 빠진 것보다 더 괴로운 고통이 있나요? 


아이들에게도 희로애락이 있다. 아이들은 어른이 기쁜 것처럼 기쁘고 어른이 분노하는 것처럼 분노하며, 어른이 슬픈 것처럼 슬프다. 여기서 한 번 "네가 뭘 알아"라고 아이를 면박 줬던 상황을 떠올려보자. 그리고 시간을 거슬러 보내 "엄마 아빠가 뭘 알아!"라고 외치는 아이들의 얼굴을 떠올려보자. 그 두 상황에서 모두, 아이들은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가? 부모와는 더 대화할 수 없으리라는 슬픔이 안기는 절망스러운 표정이 아이의 얼굴에 깃들지 않았는가?


인간은 대화하는 존재이다. 입으로 표정으로 손으로 행동으로 인간은 대화한다. 그 행위를 통해 사랑을 느낀다. 구체적이고 엄밀하고 상세한 사랑은 대화에서 나온다. 아이를 낳아놓고 기르며 그 아이가 세상 무엇보다 중요한 존재라고 여기는 부모는 아주 많을 것이다. 그러나 그 아이가, 내 인생 최고의 대화 상대라고 여겨지는 부모는 얼마나 될까? 성인이 된 이후에는 나는 걔가 팥으로 메주를 쒀도 상관하지 않을 생각이다. 그러나 내 품에서 커야 하는 모든 동안에는 하나하나 알고 싶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뭘 좋아하고 뭘 싫어하는지, 앞으로 어떻게 살아낼 생각인지, 그는 그의 인생을 사랑할 것인지. 그리고 가급적 내가 아는 모든 것, 내가 지향하고 내가 멀리하는 모든 것과 그 이유를 제 인생의 안내와 참고로 삼으라고 공유해주고 싶다. 그렇게 제 갈 길에 대한 정보를 숙지하고 있는 인간이 되고 난 뒤에는 딱히 그 인생을 어떻게 살아라 말아라 조언할 필요가 없어지는 것이다. 


크고 나면, 대화하자고 해도 할 수가 없다. 이미 그때가 되면 우린 아이에게 좋은 대화 상대가 아니게 되어버린다. 뭐든 귀찮게 물어올 때, 자꾸만 왜냐고 질문할 때, 곤란한 것도 막 물어와서 사람 난처하게 할 때, 별 시답잖은 얘기를 몇 시간이나 계속해야 할 때, 그때 대화해줘야 한다. 그런 것도 견뎌내야 아이에게 훌륭한 대화 상대가 될 수 있다. 아직 말을 하지 못하는 영아들에게도 마찬가지다. 즉각적인 반응과 최선의 지원. 그걸 통해 우리의 영아들은 우리가 그들을 얼마나 존중하는지를 배울 수 있을 것이다. 그 존중감을 기억하며 자라는 상태에서 상대를 나의 대화 상대라고 여기며 안심하고 질문할 수 있다. 


얼마 전 우리 둘째는 기분 좋게 욕조 목욕을 하고 나오셔서는 아빠가 너무 팍팍 물기를 닦아준다며 화를 내시었다. 그러면서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이 아닌가. "자꾸 이러면 아빠 잘 때 방귀 뀔 줄 알아!" 우리 둘은 빵 터져서 배를 잡고 깔깔 웃었는데, 그 모습도 기분이 나쁘셨던지 "웃지 마!"라고 소리를 지르셨다. 어느 날 갑자기 애 다 큰 다음에 우리 진지하게 네가 왜 그렇게 공부도 안 하고 자꾸 엇나가는지 대화해보자 한다고 한들 우리의 아이들은 우리를 대화 상대로 쳐주지 않을 것이다. 대화는 쉬지 않고 하자. 애가 나한테 말하면 멋진 부모로서 근엄하고 본이 될만한 말을 해주자는 애먼 다짐도 집어치우자. 짧더라도 솔직하게, 애쓰지 말고 즐거워하면서. 아마 그런 대화를 시작해올 때, 아이는 우리를 '대화할 만한 상대'라고 여기게 될 것이다.    


아이와 일러스트레이션 페어에 다녀와서. 좋아하는 걸 함께 하는 일만큼 즐거운 대화의 매개체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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