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도 얼마든지 기다려야 한다
이제 곧 여섯 살이 되는 둘째 아이는 1월생인 데다 같은 개월 수보다도 큰 편이라 어린이집 같은 반 친구들보다 머리 하나가 더 달려 있다. 덩치는 큰 데다 말은 늦되고 산만하기가 이루 말할 수가 없었기 때문에, 올해 초 어린이집 상담 시즌이 돌아왔을 때 나는 정말 엄청나게 긴장을 했다. 그리고 역시나 마음의 준비를 하고 간 자리였음에도 불구하고, 큰 충격을 받았다. 선생님 말씀에 따르면, 우리 아이가 덩치도 크고 폭력적이라 같은 반 아이들이 무서워한다는 것이었다.
본인이 화가 나면 친구를 밀치거나 때리는 행동은 그 전 어린이집에서도 지속적으로 있어왔고, 사실 놀이치료와 언어치료를 시작한 주된 이유도 아이가 말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게 되면 친구를 때리고 선생님을 힘들게 하는 문제행동을 더는 하지 않게 되지 않을까 하는 기대 때문이었다. 그런 와중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 아이가 '폭력적'이라는 표현에는 평정심을 유지하기가 어려웠다. 사실 아이의 문제 행동에 대해 타인에게 지적을 받는 모든 순간이 매번 견디기 힘들었지만, '폭력적'이라는 표현은 유독 그랬다. 남편은 군대에서도 욕 한 번 해본 일이 없는 사람이고 나 역시 첫째 처음 키울 때 아이가 잘못한 일이 있으면 훈육해야 된다는 말을 어디서 잘못 듣고 발바닥 한 번 때려본 일 말고는 애들 몸에 손을 대본 일이 없었다.
한 번은 같은 문제로 상담 선생님께 조언을 구했는데, 선생님은 조심스럽게 혹시 가정에서 엄마가 아이를 때리기도 하는지를 물어보셨다. 당연한 피드백일 수밖에 없다고는 느꼈지만, 나는 너무 억울하고 서러워서 그날도 집에 와서 엄청 울었다. 정확히 무엇이 문제인지를 알면 당장이라도 바꿀 텐데, 그러지 말라고 1억을 준다고 해도 일언지하에 거절하고 아이가 친구들과 사이좋게 놀 수 있도록 해줄 텐데 내가 할 수 있는 게 없었다(굳이 1억이라고 명시한 이유는 혹 100억 정도라면 친구들과 사이좋게 안 지내도 잘 살 수 있는 방법이 있을지 모른다는 가능성 때문이다 ㅋㅋㅋ). 이후로 한참 동안 아이를 대하는 일이 너무 조심스러웠다. 첫째와는 스스럼없이 장난도 치고 주거니 받거니 대화도 너무 재미가 있었는데, 둘째는 안아주는 일 말고는 뭘 해주기가 망설여졌다.
그래서 정말 주야장천 안아주기만 했다. 어느 순간부터는 자기 말을 다른 사람들이 못 알아듣는다는 것도 알아채버린 듯했다. 아이가 하는 말을 정확하게 이해하려고 되물으면 금세 주눅이 들거나 왜 말을 못 알아듣냐며 화를 내기 일쑤였다. 나는 아이가 하는 거의 대부분의 말에 '아, 진짜?', '그렇구나' 하고 호기심에 찬 눈빛과 흥미진진해서 미치겠다는 표정으로 대꾸해줬으나 매번 대화가 너무 피상적일 수밖에 없었다. 어떤 주제에 대한 말인지를 알 수 없으니 아이와의 대화를 확장시켜나갈 수 있는 어떤 질문도 할 수 없었다.
그래서 때때로 아이가 미지의 누군가처럼 여겨지곤 했다. 아이가 어떤 생각을 하는지, 무엇을 하고 싶어 하고 무엇이 되고 싶어 하는지, 나는 정말 모르고 있구나 하는 절망감이 수시로 엄습했다. 무엇보다 괴로운 것은 그게 나 때문일 것이라는 생각이었다. 아마도 나 때문이겠지. 아이가 태어나고 한동안 내가 아이를 보석처럼 사랑해주지 않아서, 아이의 슬픔을 방관해서, 혼자서 이겨내라고 방치해버렸기 때문이겠지. 스스로 판단하기에 아마도 산후우울증이었던 것 같다고 생각되는 그 시기, 아이로서는 그 어느 때보다 엄마의 사랑이 절실했던 시기에 아이를 외롭고 슬퍼하라고 내버려 뒀던 내가 너무 미웠다.
죄책감은, 나 말고 타인에게 일어난 일에 대한 반성과 후회라는 점에서 견뎌내기가 어렵다. 특히나 아무런 저항도 할 수 없고 혼자서는 어떤 문제도 해결할 수 없는 꼬맹이를 두고 느끼는 죄책감은 더욱 그렇다. 세상의 많은 엄마들이 쥐 잡듯이 애를 잡고 난 다음에 잠든 아이의 천사 같은 얼굴을 보며 느끼는 그 감정, 밤새 울면서 보채는 아이를 벽에 집어던져버리고 싶을 때 소스라치게 놀라며 알아채고는 하는 그 감정. 나는 우리 둘째가 문제를 일으킬 때마다 그런 죄책감을 느꼈다.
그 죄책감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데는 꽤 시간이 필요했다. 아이 언어치료를 본격적으로 들어가야겠다고 판단한 시점에 나는 휴직을 할 수밖에 없었는데, 당시 진행하고 있던 편집 작업을 마무리해야 해서 디자인 실장님의 집을 방문하게 된 어느 주말이었다. 그 집에는 눈이 똥그랗고 애교가 많으며 겁도 좀 많아 보이는 사랑스러운 시츄가 살고 있었는데, 우리 둘째가 그 시츄를 보더니 이제까지는 단 한 번도 보지 못한 표정으로 그 아이의 이름을 다정하게 부르는 것이었다. 착하지, 댕댕아(댕댕이라고 하자)~ 너 정말 이쁘다. 세상 다정한 표정, 흡사 엄마가 자기 아이 어르는 듯한 의젓한 표정으로 강아지를 쓰다듬는 것이었다. 애가 태어나고 그런 표정을 짓는 것을 처음 봐서, 나는 연신 '어머, 얘 얼굴 좀 봐. 어머, 너무 다정하다. 세상에 어머어머' 하고 놀라워했다. 애는 개를 보고, 개를 보는 애를 내가 쳐다보다가 일은 어떻게 했는지 하는 둥 마는 둥 그 집을 나왔다. 막판에 하도 그래 대는 통에 강아지가 슬금슬금 아이를 피하자 아이는 또 '야, 이리 와! 야, 왜 나랑 안 놀아!' 하며 성질을 냈다. 강아지나 실장님께 너무 민폐여서 도망치듯 그 집을 빠져나올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나는 뭔가 가능성을 본 것 같았다. 개를 좋아하는 걸 안 건 둘째 치고, 저렇게 말을 많이 하는 것도 본 적이 없던 터라, 돌아오는 상담 시간이 되었을 때 선생님께 말씀을 드렸다. 그러자 선생님은 아마도 부모가 자신에게 했던 행동을 자기보다 작고 여린 존재에게 그대로 모방하는 것일 거라고 얘기해주셨다. 부모가 자기에게 했던 행동을 자기보다 작고 여린 존재에게 해준 거라고..? 나는 핑, 눈물이 돌았다. 내가 너에게 그렇게 다정하고 포근한 존재였던 적이 있었구나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돌덩이처럼 찍어 누르던 죄책감이 덜어지는 느낌이었다. 내가 그렇게 나쁜 부모였던 것만은 아니구나 하는 생각에 끈으로 꽁꽁 묶어놨던 심장을 다시 풀어놓은 것 같은 해방감이 느껴졌다.
일은 일대로 굴러가야 하고 두 아이의 엄마로서도 최선을 다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생각은, 수시로 엄마인 나를 죄책감의 구렁텅이로 몰아세운다. 그 절벽 끄트머리에서 어떻게든 거기 빠지지 않으려고 애쓸 때마다 결국은 참지 못하고 나를 거기로 빠뜨리려는 아이를 원망하게 되고 만다. 내게 있어 아이를 키우는 과정은 그 사랑스러운 성장을 가장 좋은 자리에서 목도하는 일인 동시에 저 절벽에서 떨어지는 것을 수시로 반복하는 고통의 시간이기도 하다. 오롯이 내가 견뎌내야 하고, 대신해 줄 사람도 없는 자리. 한 번은 내 맘 같지 않은 아이 앞에서 참지 못하고 '도대체 왜, 뭣 때문에 그러는데!!' 화를 내고만 날이었다. 첫째가 절망에 휘감긴 얼굴로 울음을 터트린 둘째 앞을 가로막고 나서더니,
엄마, 얘는 아직 말을 못 하잖아요. 우리가 좀 기다려주면 안 돼요?
제 동생을 감쌌다. 맞다. 나는 왜 고작 그것밖에 안 되는 거냐고 아이를 다그치기 전에, 기다렸어야 했다. 나는 울음을 꾹 참고 첫째에게 말해줘서 고맙다고 이야기했다. 둘째에게 사과도 했다. 기다리자고 다짐도 했다.
얼마 전 둘째 어린이집에서 참관수업이 있었다. 남편과 나는 거기엘 가면서, 오늘 뭘 보더라도 실망하지 말고 아이에게 잘했다고 격려해주자고 다짐을 했다. 그런데 웬걸, 맨 앞에 앉아서 선생님이 물어보시는 모든 말씀에 길지는 않지만, "아니요!", "4번!", "안 된다고 얘기해요!" 똑부러지게 대답하고 있는 것이었다. 음악수업 시간에는 북채를 들고 쿵쿵짝 쿵쿵짝 밑으로 두 번 치고 머리 위로 교차해서 딱 소리를 내는 동작을 틀리지도 않고 제대로 해냈다. 나랑 남편은 두 손을 꼭 잡고서, 거기 있는 다른 많은 아빠 엄마는 아마 짐작도 못할 감격을 느끼며 아이의 모습을 봤다(아이는 막판에 또 친구를 밀쳐서 눈물이 찔끔 나게 혼쭐이 났다. 그 집 엄마에게 정수리 뒤쪽이 보일 정도로 둘이 같이 얼마나 머리를 조아렸던지.. 상담 선생님께 여쭤보니, 쟤만 아니면 자기가 혼날 일이 없다는 생각 때문에 특정한 아이를 유독 싫어하고 있는 것 같다고 이야기하셨다. 진짜 그 집 부모님께는 입이 열 개라도 드릴 말씀이 없다. 어떻게든 교육시켜서 반드시 말로 대화하고 화해하는 아이로 키우겠습니다.. 죄송합니다 ㅜㅜ).
교육하고 기다리는 수밖에는 없다. 이만큼 변화한 것도 우리에게는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모른다. 최근 존경하는 한 분 기자님께 이제 아이의 친구들도 얘가 자기보다 말을 못 하고 대화도 안 통한다는 사실을 인지하기 시작한 것 같다고 슬프게 이야기했다. 그 말을 들은 기자님이 그러셨다. 아이도 최선을 다하고 있을 텐데 옆에서 잘 도와주라고. 아이도 최선을 다하고 있다고 생각하면, 슬프기도 하면서 어떻게든 내가 이 아이의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야겠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가 없다. 아이는 최선을 다하고 있다. 나도 최선을 다해서 아이가 해낼 수 있도록 도와주자.
부모 되기는 참 힘들다. 이곳에 글을 쓰면서 더더욱 그걸 느낀다. 동시에 나는 이 모든 과정을 통해 비로소 어른이 되어 가고 있다고도 느낀다. 아이를 키우며 나 역시 더 좋은 사람이 되고 있다는 생각이 매번 큰 위로가 된다. 엄마들이여. 아빠들이여. 당신들은 오늘도 더 좋은 인간이 되고 있다. 아이의 성장이 그 증거다. 그러니 힘내시라. 힘내는 우리를 우리의 아이들이 축복하리라.. ㅜ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