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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오늘 Nov 04. 2019

때 되면 다 한다는 불변의 진리

자전거 페달을 앞으로 밀고 나가는 데 필요한 시간

첫 아이를 낳고 몇 달 동안은 육아서에 빠져 지냈다. 1,200페이지에 달하는 <삐뽀삐뽀 119 소아과>를 첫 장부터 마지막 장까지 정독하기도 했는데, 혹시나 아이가 갑자기 아플 때 어디에 뭐가 있는지 바로바로 찾아보려면 미리 싹 읽어두는 수밖에는 없다고 생각해서였다. 덕분에 한밤중에 애가 눈 똥이 아무래도 너무 검은 것 같아 장출혈이 아닌가 겁이 나서 응급실에 뛰어간 적도 있었고(정상 변이었다 ㅋ) 하여튼 애 눈동자부터 시작해서 엉덩이 모양까지 일일이 책의 사진과 대조해가면서 마음 졸이고는 했다. 그러다가 육아서를 딱 끊어버린 계기가 있었는데, 엄마도 아이도 꿀잠 자게 하는 비법이 실린 책이라고 해서 찾아 읽은 유명 번역서였다.



거기에는 밤중에 수시로 깨서 젖 달라고 보채는 아이의 수유 텀을 늘리기 위한 스케줄 표가 있었는데, 나는 그 내용을 보고 큰 충격을 받았다. 흡사 고문 표와도 같았기 때문이다. 이미 7년도 전에 읽은 책이라 당시에 받았던 충격과 공포 외에는 크게 기억에 남은 것이 없는데, 요점만 떠올려보자면 애가 배고프다고 아무리 울며 보채도 목표한 시간이 될 때까지 견디도록 두라는 것이었다. 난 또 무슨 대단한 방법이 있는 줄 알았지. 모유나 분유가 마약이 아닌 이상, 달라며 애원하는 걸 주지 않을 이유가 도대체 무엇인가 싶었다. 나는 그냥 일 년은 죽었다고 생각하자, 다짐하고 아무 때고 일어나 젖을 먹였다(내 선택이 전적으로 옳았다고는 말할 수 없다. 수시로 일어나 울며 보채는 아이를 하룻밤에도 수 번, 수십 번 달래야 하는 일이 얼마나 사람을 미치게 만드는지 잘 안다. 차라리 짧은 시간 아이가 좀 고생을 하더라도 장기적으로 부모가 더 건강하고 행복한 상태를 유지하는 일이 아이 양육에 더 안정적일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부모의 딜레마는 언제나 선택을 해야 한다는 것이고, 그에 대한 책임을 아이의 인생으로 져야 한다는 것에 있다).



이후로 간간이 육아서를 읽기는 했지만, 대체로 어떤 걸 하라는 안내 목적보다는, 그만 좀 힘들어도 된다고 위로해주는 책들을 읽기 시작했다. 차라리 그쪽이 내 정신건강과 아이 육아에 도움이 되는 듯싶었다. 하지만 첫 아이를 낳고 8년째에 접어든 최근까지도 포기하지 못한 것이 하나 있었는데, 바로 '땡땡 개월 아이 발달' 검색이었다. 첫째 아이와 둘째 아이의 발달 정도와 성향, 성격이 너무나도 판이하게 달라서, 나는 첫째를 초등학교에 입학하기까지 키워놓았는데도 수시로 둘째의 발달 상황이 정상 군에 속하는 것인지를 검색했다. 대체로 블로그나 개인 계정에 자기 아이의 발달 정보를 올리는 엄마들은 '이거 봐라, 우리 애 이렇게 똑똑하다', '나 좀 봐라, 내가 이렇게 잘 먹여서 애가 이렇게 잘 큰다' 자부심이 넘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대개 '땡땡 개월 검색질'은 내게 좌절감만 안겼다.



니들이 시키니까, 어쩔 수 없이 울면서 한다 ㅋㅋ



그중 정말 오랜 기간 스트레스받았던 것이 자전거였다. 일단 아이가 유아용 자전거를 몰기 시작하는 순간, 주양육자는 일종의 해방을 맞는다. 딱히 경사 지거나 차량이 많은 위치에 두는 것이 아닌 이상, 페달 굴리기와 사랑에 빠져버린 아이가 전진하고 후진해서 좌회전하고 우회전하는 것을 반복하는 동안 애를 안았다가 내렸다가 들쳐업었다가 뛰어가서 잡아오기를 반복하는 일에서 해방될 수 있는 것이다. 아이가 즐거움을 느끼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말이다. 그런데 우리 둘째는 일단 전진이 안 됐다. 제자리에서 계속 페달을 뒤로 굴리기를 반복하다가 어느 순간 저 멀리 앞서 나가 있는 언니를 보며 "야, 돌아와! 가지 마! 언니! 혼자 가지 마!" 자지러지는 것이었다. 그러면 저 멀리 싱글벙글 신나게 앞서 나가던 언니는 잔뜩 억울한 얼굴이 되어 돌아와서는 "왜, 앞으로 나갈 수가 없어?" 하고 답답해했다. 그럴 때마다 나는 열심히 '5세 자전거 타기', '5세 네 발 자전거' 등의 키워드를 검색했다. 하나같이 쌩쌩 바람처럼 내달리는 아이들의 즐거운 얼굴뿐이었다.



나는 둘째의 이름을 다정하게 부르며 "페달을 이렇게, 그렇지 힘을 줘서 이렇게 밀어야 앞으로 나가는 거야. 아니 아니, 봐봐 이렇게, 이렇게 앞으로, 아니 그건 뒤잖아. 뒤가 아니고. 앞으로, 이렇게 앞으로. 아니, 앞으로. 앞으로, 아니 앞으로!" 하다가 왱 하고 소리 지르고 미끄럼틀 타러 뛰어가는 둘째의 화난 뒤통수를 쳐다봐야만 했다.  내적 갈등의 정도로만 치자면 육이오 때 난리는 난리도 아닐 지경이었다.



또 그 난리를 치른 어느 날이었다. 신나게 자전거를 탈 꿈에 부풀었던 첫째는 잔뜩 억울한 얼굴이 되어 미끄럼틀로 소환당하고(둘째는 자전거로 좌절감을 맛본 날이면 평소보다 더 언니를 쥐 잡듯이 잡았다) 나도 될 대로 되라는 심정이 되어서 벤치에 앉아 영혼 빠진 눈으로 애들 노는 걸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애가 저렇게 큰데 아직 자전거 페달을 못 밟는 게 괜찮은 건가? 다시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진짜 뭐가 문젠 건가. 이것도 말이 느린 거랑 무슨 상관이 있는 건가..? 나는 다시 휴대전화를 꺼내 '50개월 자전거'를 검색해봤다. 동영상 하나가 눈에 띄었다. 재생 버튼을 누르고 빤히 손바닥 만한 화면을 쳐다보던 나는 마음속의 회오리가 차분히 가라앉는 기분을 느꼈다. 동영상 속 아이 하나가 자전거 위에 올라 진지한 얼굴로 열심히 뒤로 페달을 밟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발은 구르는데 몸은 제자리에 있는 그 모습을 보는 것이 그렇게 신나는 일이 될 줄이야. 나는 정말 너무 기뻐서 남편에게 전화를 걸어 세상에 우리 애만 뒤로 페달을 구르는 게 아니었다고 외치기 시작했다. 여보! 웬일이야, 다른 집 애도 페달 뒤로 굴러! 우리 애만 그런 게 아니야! 웬일이니 진짜, 어머어머, 여보!



이후로 우리 부부는 첫째 아이를 따로 데리고 나와 자전거를 태우기 시작했다. 첫째는 타고 싶은 자전거를 타고, 둘째는 엄빠 중 한 사람을 독차지해 노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그렇게 한 세네 달, 굳이 둘째에게 자전거를 태우려고 하지 않고 둘째도 자전거를 찾지 않는 나날이 흘렀다. 회사에서 야근을 하고 있는데 남편에게서 동영상 메시지가 도착했다. 자전거 위에 올라탄 채 천천히 앞으로 페달을 밟아 나가고 있는 둘째의 뒷모습이었다. 팽팽하게 긴장된 그 두 어깨가 어느 순간 속도를 내기 시작하더니 급기야 환하게 웃는 얼굴이 뒤돌아 아빠의 이름을 부르고 있었다. 흡사 '아빠, 내 모습 보고 있어? 페달을 앞으로 밟아 달려 나가고 있는 내 모습, 보고 있는 거지?' 확인하는 듯한 외침이었다.



이후 아이는 전에 하지 않던 일들을 하기 시작했다. 니들은 인간이고 나는 장판이라는 듯이 내내 누워만 있던 주일학교 율동 시간에 맨 앞에서 폴짝폴짝 율동을 따라 하기 시작했다. 주말에 나간 공원에서 책을 펼쳐 들고 잔뜩 집중해 한 장 한 장 책장을 넘기기도 했고, 언제나 손만 쪽쪽 팔며 구경만 하던 만들기 키트를 언니 옆에 엉덩이 붙이고 앉아 끝까지 만들어 내기도 했다. 뭔가 깨달은 것 같았다. 나도 하면, 할 수 있는 거구나.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이제 더 많아진 거구나.



심리학에서 자존감만큼이나 중요하게 다루는 개념 하나가 자기효능감이라고 한다. 자존감이 '나는 가치 있는 존재'라고 믿는 믿음이라면, 자기 효능감은 '나에게는 그 일을 해낼 수 있는 능력이 있어!'라고 확신하는 신념을 뜻한다고. 작은 일부터 차례대로 스스로의 노력으로 무엇인가를 성취해보거나, 누군가 성취하는 것을 함께 지켜보거나, 자신의 목표와 지향을 끊임없이 나와 타인에게 말로써 되뇌고, 편안하고 안정적인 마음 상태를 유지하는 정서적 각성 상태를 만들게 되면 자기 효능감도 극대화될 수 있다고 한다. 나의 둘째는, 그날의 페달을 통해 말하자면 자기효능감을 느끼게 된 것 같았다. 나는, 내가 마음먹은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이야. 나는 앞으로 페달을 구를 수 있어. 원하면 선생님이 하는 것과 비슷하게 율동을 따라 할 수도 있고, 만들기도 해낼 거야. 



하루는 넷이 함께 간 노래방에서 신나게 구름빵 노래를 부르고 난 다음이었다. 구름뿌앙, 구름뿌왕, 씬나는 구름뿌왕 여행! 하고 노래방이 떠나가라 진성을 내지른 아이는 96점이라는 점수와 함께 팡파르가 터지자 마이크를 내던지고 두 손으로 자기 얼굴을 감싸 쥐었다. 그리고 그 두 손을 얼굴 옆에서 불끈 쥐더니 우리에게 말했다.


제가 해냈어요, 내가 해냈다!!  


이후로 음치인 남편이 불러도(음색은 그렇게 고울 수가 없다) 고음불가인 첫째가 불러도 고득점 팡파르 행진은 계속되었다. 그러나 둘째에게 터진 그 팡파르만큼 즐거운 팡파르는 없었다.



모든 아이는 페달을 밟는다. 빠를 수도 있고 느릴 수도 있다. 그러나 반드시 페달을 밟아 앞으로 전진한다는 사실에는 차이가 없다. 간혹 물리적으로 전진하기 힘든 상황에 놓인 아이들도 있다. 그러나 반드시, 모든 아이에게는 각자의 진보가 있다. 어떤 형태로든 아이는, 해낼 수 있다고 믿어주는 부모 옆에서 해내게 된다. 스스로 방법을 찾을 수 있도록 조언하고 기다려주는 사이에, 아이는 한 단계 한 단계 그에 걸맞은 성취를 이룩하고 스스로 해낼 수 있는 사람이라는 판단에도 이르게 될 것이다.



그러니 비교는 얼마나 무의미한가. 저 푸르른 초원에서, 꽃이란 달리 어느 한 송이 유독 잘난 줄을 증명해내기 어려운 것이다.  


   

원하는 만큼 얼마든지 달려서, 하늘까지 훨훨 날 수 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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