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생화 개똥철학
복수초는 미나리아재비과의 여러해살이풀이다. 우리나라 각 처 숲 속에서 자생하며 땅에 습기가 약간 있으면서도 햇볕이 잘 드는 곳에서 자란다. 해마다 중심 뿌리에서 새로운 싹이 돋아나서 10~15cm 정도 자란다. 생육환경이 좋으면 25cm에 이르기도 한다. 꽃은 2~4월 중 피고, 원줄기 끝에 꽃봉오리 한 개가 맺힌다.
복수초는 봄의 전령사로 불리는 대표적인 야생화다. 이 복수초는 소복이 쌓인 눈 속에서도 봉오리를 맺고 급기야 눈을 뚫고 올라와서 꽃을 피운다. 스치기만 해도 찢어질 것 같은 여리고 여린 꽃잎이 차디 찬 눈 얼음 덩어리를 밀쳐내며 꽃을 피우는 모습은 그냥 신기하다는 수준을 넘어서 경이롭기까지 하다. 이 모습을 보고 있으면 복수초의 강인한 생명력에 그저 놀랄 뿐이다. 마치, 어떤 험난한 상황에서도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어떻게든 해내고 말겠다'는 굳은 심지를 보여주는 것 같다.
이 아이는 꽃이 먼저 피고 잎이 나중에 나온다. 꽃은 지름이 3~4cm이며 꽃잎이 햇빛에 반사되어 금(GOLD) 빛 노란색을 띤다. 그래서 이를 보고 지나가던 사람들이 그 금빛 매력에 반해서 발길을 멈추는 것을 자주 보게 된다. 그러다 결국은 휴대전화를 꺼내어 복수초 사진을 찍는 사람도 여럿 있었다. 눈여겨볼 것은 다른 꽃들과 달리 꽃을 받치는 꽃받침이 꽃 크기와 같거나 꽃보다 더 크다는 것이다. 마치 복수초는 주인공이 꽃이 아닌 꽃을 받쳐주는 꽃받침이라는 것을 말해 주는 것 같다.
꽃이 지고 나면 작은 씨가 뭉쳐서 둥근 공 모양이 된다. 이 씨를 파종하면 5~6년은 족히 지나야 개화할 줄기가 된다. 5월 말 경에는 지상부 즉 땅 위에 나온 모든 부분이 조용히 고사한다. 꽃은 물론이거니와 잎, 줄기 모두 사그라져 어느새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것이다. 그리고 잠잠히 땅 속에서 뿌리로 번식하고 다음 해에 피울 꽃을 준비하는 것이다.
흐린 날에는 꽃봉오리를 닫기 때문에 맑은 날씨가 만나야 활짝 피어있는 꽃을 감상할 수 있다. 꽃말이 슬픈 추억이다.
이 복수초를 키운 지는 10년이 넘었다. 처음에 내가 복수초 한 포트를 사서 심은 게 전부였는데 여러 해를 보내면서 스스로 씨를 뿌렸다. 복수초 번식방법을 잘 몰랐던 나는 그 사실을 전혀 모르고 지냈다. 어느 날, 우연히 정원 여기저기에 올라온 작은 싹을 보고 그제야 복수초 어미가 새끼를 친 걸 알게 됐다. 놀라운 것은 복수초가 새끼를 친 장소가 복수초가 가장 생육하기 좋은 환경인 햇빛이 잘 드는 나무 아래인 것이었다. 그렇게 좋은 환경에서 자라다 보니 어느덧 작은 복수초 군락을 이루었다.
한 해는 복수초를 보고 소스라치게 놀란 적이 있다. 그 이유는 어미 복수초가 몇 년을 생육한 자리를 떠나 스스로 이동한 일 때문이다. 원래 심은 곳은 소나무 아래 화단이었다. 그런데, 해마다 나오는 그 자리가 아닌 다른 곳에서 꽃봉오리가 나온 것이었다. 그것도 화단이 아닌 잔디밭이다. 너무 놀라서 이동한 거리를 재어 보니 대략 50cm나 되는 것이었다.
덕분에 나는 복수초를 보호하느라 돌멩이로 에워싸기도 했다. 자칫 잔디밭으로 이동한 복수초를 보지 못하고 밟는 사람이 있을 것 같은 걱정 때문이었다. 어떻게 생각하면, 장마철 장대비에 쓸려서 잔디밭으로 내려온 것 같기도 했다. 그러나 야생화를 200종 가까이 키워봤지만 한 번도 그런 화초를 본 일이 없어서 그런지 그 생각도 수긍이 되지 않을 정도다. 때문에 지금도 그 일은 참으로 기이한 기억으로 남아있다.
이렇게 복수초가 바람의 힘을 빌려서 새끼가 잘 자랄 수 있는 땅에 씨를 뿌리거나 좀 더 살기 좋은 환경을 찾아서 스스로 이동하는 것을 보면 여기에도 우리의 인생이 보이는 것 같다. 우리네 인생도 이와 마찬가지 아닌가. 자식을 위해서 지금보다 나은 환경을 찾고 그 좋은 환경에서 자랄 수 있도록 부단히 힘써 노력하는 부모님의 인생말이다. 자식을 위해서라면 조금 더 힘이 들더라도 기꺼이 해내고야 마는! 그러한 부모님의 한없이 퍼 주고 떠나는 숭고한 사랑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자식을 낳은 게 죄도 아닌데!" 일평생을.
사실, 세상 어느 자식이 스스로 태어나 스스로 성장할 수 있는가? 제 아무리 잘난 자식이라고 하더라도 부모 없이는 세상에 혼자서는 태어나지도 못하니 말이다.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지만 살다 보면 가장 쉽게 잊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그러니까 자식은 어머니의 뱃속에서 열 달 동안 고이 지내다 그것도 어머니가 직접 산고의 고통을 감당하고 나서야 태어난다. 그리고 아버지의 책임 있는 헌신과 수고가 없이는 어느 자식도 저절로 성장하지 못한다는 것을 말하고 싶은 것이다. 그렇게 일평생 자신이 아닌 자식을 위해서 살아가는 게 바로 우리 부모가 아닌가! 결국, 어떻게 보면, 자식은 부모가 없이는! 부모의 이런 뒷받침이 없이는 아무것도 아닌 게 아닐까 싶다.
그런데 자식은 어떠한가! 우선, 내 모습만 보아도 그렇다. 살아가면서 잠깐잠깐 부모에 대한 애잔함과 고마움이 떠오르기도 하지만 금방 내 삶 중심에는 나와 내 가족이 우선이 되어 있는 건 어쩔 수 없는 사실이다. '나 사느라 바쁘고 나 사는 게 더 중요해서!' 부모란 존재는 너무도 쉽게 잊히는 것을 매번 경험하고 살고 있다. 더욱이 시아버지는 모시고 살았으면서도 내 부모님은 멀리 산다는 이유로 기껏 연중행사에만 기껏 찾아뵙거나 선물하는 게 전부인 것이다.
자식이 이러니 '부모는 기다려 주지 않는다'는 말이 있는 것 같다. 내가 부모를 생각지 못하고 살아갈 때 내 부모는 나를 떠날 시간을 보내는 중인 것이다. 그러다 부모님이 이 세상을 떠나면 그때서야 여실히 깨닫는다. 자기 입을 옷 하나 선뜻 사지 못하고 대신 자식이 입을 옷을 사주시던 부모님. 그렇게 살다 떠난 불쌍한 내 부모님 인생이 오롯이 자식을 위해서 살다 간 인생인 것을... 부모님이 세상을 떠나고 나서야 비로소 부모님이 얼마큼 큰 존재인지를 깨닫는 것이다.
그래서 그때, 내 아버지가 이 땅을 떠났을 때 늘 우리 가족을 위해서 일만 하느라 굽어버린 내 아버지의 등이 그렇게 생각났는가 보다. 그래서 내가 그렇게 서럽게 울었나 보다. 그래서 자식에게 세상 떠난 부모님은 늘 '슬픈 추억'인가 보다. 복수초의 꽃말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