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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페르소나 Apr 13. 2024

"내 혀를 잘라서 버리고 싶었어..."

남편이 망했어

몇 년 만에 만난 친구가 이렇게 많은 속얘기를 털어놓아서 놀랐지만 한편으로는 참 고마운 생각이 들었다. 사실, 어차피 우연히 부딪힌 만남인데 가볍게 인사나 안부만 서로 묻고 헤어져도 충분했을 것이다. 그런데도 마음 깊이 담아 두었던 이야기를 해 준 게 고마웠다. 나라면 어떤 친구든 우연히 만났어도 꺼내기 어려웠을 것이다. 혼자 '끙끙 앓기나 하지' 털어놓을 용기도 없다. 그러보면 이 친구에게는 나를 만난 게 감정에 도화선같은 것처럼 뭔가 터졌는지도 모르겠다. 


"지금은 어떠니? 함께 출근한다면 남편 일을 같이 돕는 거야?"

"돕는 것보다 직원들이 다 나가 버렸으니 내가 어쩔 수 없이 나가는 거지"

"왜 직원들이 다 나가?"

"나는 몰랐지. 남편이 사업은 뒷전이고 모임에다 툭하면 골프 치러 밖으로만 도니까 직원들이 버티다 안되니까!"


자세한 이야기는 이랬다. 친구 표현이다. 남편 사업이 좀 된다 싶으니까 주변에 (나쁜) 사람들이 헛바람을 넣었다고 한다. 무슨 클럽, 여러 모임에 가입을 시키고 나중에는 회장타이틀까지 달아 주었다고 한다. 그러다 보니 당연히 사업장에 있는 시간보다 회장직을 수행하느라 사업은 뒷전이 되었다고 했다. 직원들이 만류했으나 이미 바깥일에 빠져 재미가 들린 남편이 직원들 말을 들을 리 없었다고 했다. 그런 상황에서 직원들이 자기 일처럼 하지는 않을 것이고 결국은 거래처에서 모두 손절했다는 것이었다. 


"더 기가 막히는 건 그 상황에서도 남편이 계속 주변에 있는 그 사람들에게 휘둘려서 오피스텔 분양까지 받은 거야!"

"아..."

"그게 지금 내가 사는 그 9평 오피스텔이야!"

"아..."

 

친구 남편은 사업장은 직원들에게 맡긴 채 거래가 끊긴 줄도 모른채 친구들 말을 듣고 오피스텔도 분양받은 것이었다. 이후, 사업장에 난리가 났을 때, 빚도 빚이지만 분양받은 오피스텔 중도금을 낼 수 없게 되자 살던 집을 처분헸다고 한다. 친구는 그 상황이 되어서야 모든 일을 알게 되었고 남편에게 이런 일이 있는 줄 듣고도 믿기지 않았다고 했다. 그리고 그동안 남편을 너무나 믿었었기에 그만큼 남편이 너무나 미웠다고 했다. 


"아침에는 내가 운전해서 출근하고, 퇴근할 때는 남편이 운전하는데 가끔 남편이 운전하다가 조금만 실수를 해도 못 참겠는 거 있지!"

"나도 그래. 우리 갱년기잖아"

"나는 그게 아냐. 이 남자 때문에 내가 이 고생을 한다 싶으니까 그 감정이 더해져서 화가 나는 거야!"

"아! 그래그래... 나라도 그럴 거야..."


친구와 내가 이야기를 하다가 목적지에 다다랐다. 서로 목적지가 다르다 보니 다음에 따로 만나기로 하고 그렇게 헤어졌다. 


출처 픽사베이


이 친구를 만나서일까? 최근에 이와 비슷한 이야기를 또 내게 해 준 사람이 있었는데 그 언니가 문득 생각났다. 내가 교회에서 봉사를 하는 모임이 있는데 거기서 함께 한 언니다. 언젠가 봉사하러 가는 날, 날씨가 너무 좋아서 산책 삼아서 교회까지 걸어갔다. 마치고 혼자 오는데 언니가 같은 방향이라고 같이 걷게 되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면서 걷던 중에 언니가 내 팔을 잡더니, 바로 앞 아파트를 보라고 가리키는 것이었다. 쳐다보니 방방마다 에어컨 실외기가 달려있었다.


"언니, 여긴 방방마다 에어컨이 다 있네요!"

"하, 아니야. 이게 한 집이야!"

"네?"

"작은 집. 13평! "


다시 자세히 보니 그랬다. 이 언니는 십 년 넘게 교회 성가대에서 함께 봉사했다. 언니는 알토, 나는 소프라노 파트였다. 그래서 앉는 자리도 완전히 반대여서 특별한 일이 아니면 개인적으로 부딪힐 일이 없었다. 당연히 서로 인사만 나눌 뿐 대화도 따로 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최근 몇 년간 화요일 봉사모임에서 함께 하다 보니 같이 밥 먹은 횟수가 몇 번이며 사적인 대화를 얼마나 했던지 제법 좋은 마음으로 지내는 언니가 되었다. 이제는 서로를 챙기는 사이가 된 것이다.


"근데 이 집을 왜 보라고 했어요?"

"내가 얼마 전까지 여기 살았었어"

"아, 언니 몰랐어요."

"내가 자기 집에 갔을 때 그랬잖아. 여기 와서 보는 게 내 로망인데 실현시켜 줬다고! 너무 좋았어!"


그러고 보니 생각이 났다. 봉사 모임이 종강하는 날, 봉사자 모두 우리 집에서 티타임을 했었다. 그때 언니가 과일 깎는 걸 도와주면서 슬며시 말한 게 기억났다. 15명 커피를 뽑고 차를 끓여 내느라 바쁜 마음에 잊고 있었다. 언니가 오랫동안 내가 사는 전원주택 동네게 오고 싶었는데 초대해 주어서 너무 고맙다고 했던 말이다. 그리고 '로망'이었다는 말에 내가 '언니는 계속 제가 모실게요!' 했던 말도 생각이 났다. 


"사실, 내가 여기만 지나가면 생각나는 게 있어"

"아, 그래요?"

"아주 오래전에 내가 이 집 평수를 듣고 도대체 이렇게 좁은 데는 누가 사는 거야라고 했었어"

"아, 네..."


언니 말은 이랬다. 남편 사업이 잘 나갈 때 자기 모습을 말해 주었다. 사는 데 불편함이 없어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돌이켜보니 남이 사는 것을 함부로 대한 일이 많았다고 했다. 특히 작은 집에 사는 사람은 '왜 그렇게 사는지' 하는 생각을 했고, 큰 집에 사는 사람은 유능해 보여서 그저 같이 하고 싶은 사람들로 보였다는 것이었다. 그런 생각을 가졌던 사람이라서 여기 이 집을 누군가 몇 평이라고 알려 주었을 때 그렇게 말했다는 것이다.  '이런 집엔 대체 누가 사는 거야!?"라고. 


그런데, 이제는 이 집을 지나갈 때마다 그때 자신의 모습을 반성하며 여기 사는 사람들을 위해서 기도해 준다고 했다. 자기가 살아보아서 많은 불편함이 있었기에 잘 돼서 좋은 집으로 이사 갈 수 있도록 기원한다고 했다. 


"언니는 이 집으로 어떻게 오신 거예요?"

"남편 사업이 망해서"

"아!"

"나는 금방 나갈 줄 알았거든. 근데 몇 년을 살았는지 알아?"


그러면서, 언니가 덧붙인 말이 아직도 내 귀에 생생하게 맴돌고 있다.


"정말, 내 혓바닥을 잘라서 버리고 싶었어! 내가 왜 그 따위 말을 하고 살았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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