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이 망했어
언니 말을 듣고 나 역시 공감하는 말이 있었다. '집안에 안 좋은 일이 있으면 그 원인을 자신에게서 찾는다'라고, 나 역시 '내가 뭘 잘못해서 남편 일이 안되나' 하는 생각을 한 적이 있었다. 물론, 처음부터 그런 생각을 한 것은 아니다. 원인이 다른 곳에 있어도 이 문제가 해결될 기미가 보이지 않고 앞으로 이 문제에서 자유롭지 못할 것을 깨닫고 나니 '내 팔자가 왜 이러나' 하며 신세 한탄이 절로 나왔다. '지금껏 징글징글하게 힘들게 여태 살아왔는데 왜 나에게 이런 일이'라는 생각이 어느 순간부터 나를 지배했다. 그러면서 왜, 친정엄마가 넋두리로 팔자타령을 했는지 아주 조금은 알 것 같았다.
"남편 복 없는 년이 무슨 자식 복이 있을라고!"
이 말은 엄마 나이 마흔에 남편이 갑자기 죽고 혼자서 4남매를 키우면서 했던 넋두리다. 우리 4남매가 사이좋게 지내지 못하거나 엄마가 시킨 것은 하지 않고 종일 놀았을 때도 꼭 이 말을 했다. 너무 슬픈 말이지만 엄마가 얼마나 힘들고 마음 아파서 했던 말일까 싶다. 그에 비하면 내 문제는 아무것도 아니었지만 막상 내 현실이 막막해지다 보니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남편이 망했어. 너무 힘들어...' 누군가에게 차마 말로써 입밖에 내지는 못했지만 정말 힘들었다. 그래서 해서는 안 될 이런 생각까지 했다.
'자식 복 없는 년이 무슨 남편 복이 있을라고!'
어느 영화 대사에서는 '사람이 코너에 몰리면 킥 Kick이 나온다'라고 했는데 역시 인생과 영화는 딴 판이었다. 내가 인생 코너에 몰려 보니, 킥 Kick 은커녕 신세 한탄이 먼저 나왔다. 나보다 먼저 떠난 자식이 애달파서 슬펐고 이런 상황을 만든 남편이 그냥 너무 미웠다. 사실 따지고 보면 남편 탓도 아니었다. 그런데도 그냥 화가 나면 나는 대로, 눈물이 나면 나는 대로, 소리치고 싶으면 소리치고 싶은 그대로 내 감정에 충실하며 보냈다. 그렇게 얼마나 보냈을까?
그렇게 내 마음을 추스르고 상황을 받아들이는 동안인데도 어떤 때는 아주 어릴 때 들었던 말들이 나를 괴롭히기도 했다. 그 말은 "큰 계집애는 꼭 지 엄마 팔자를 닮는다!"이다. 4남매 중 장녀로 자라다 보니 사람들에게 종종 들은 말이다. 이 말은 큰딸에게만 해당된다. 그 말을 들을 당시 내가 너무 어려서 어른들이 하는 말에 어떤 대답도 못했다. 대신 조용히 마음속으로 기도하곤 했다.
'나는 그냥 좀 보통 사람으로 살게 해 주세요!' 그 정도로 어린 마음에 엄마의 삶은 쉼이라곤 찾아볼 수 없이 혹독했고 세상살이가 뭔지도 모르면서 '지 엄마 팔자 닮는다'는 말에 겁을 냈다. 이러니 말이란 게 참 무섭다. 이렇게나 오랜 세월이 흘렀어도 어제 일처럼 생생하게 그 말들이 떠오르니 말이다. 그래서일까? 며칠 내내 언니 말을 되뇌며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정말, 내 혓바닥을 잘라서 버리고 싶었어! 내가 왜 그런 말을 하고 살았는지..."
왜냐하면, 앞서 만난 친구나 그 언니나 나나 처한 사정이 별반 다를 게 없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교회 언니 말이 자꾸만 내 머릿속을 맴도는 이유는 과거 내 직업이 강사여서 더욱 그랬던 것 같다. 한마디로 나는 '말로 먹고사는 사람'이었다. 주변 사람들이 내게 붙여 준 호칭이다. 내 과거 직업이 강사였던 것을 아는 몇몇 사람들은 내가 어느 모임에서 분위기 좀 띄우려고 웃기기라도 하면 꼭 (내게) 하는 말이었다. '역시 말로 먹고사는 사람!'은 다르다면서, 그래서 내가 말을 잘한다고 했다.
내 강의는 기업체에서 성공학 특강을 했고 대학교 취업특강으로는 동기부여 특강이었다. 그러니 어떻게라도 내가 만나는 사람들에게 내가 공부하고 배워서 아는 것 그리고 경험한 것들을 알려주고 싶어서 말로써 사람 마음을 부팅시키는 방식이었다. 물론, '말로 부족해서 가끔 소리도 치고 웃기다가도 울리기도 하고' 그렇게 살아왔다. 그때 내 생각은 오직 하나밖에 없다. 내게 주어진 그 시간만큼은 내가 할 수 있는 힘껏, 마음껏, 신나게 함께 하는 청강생들에게 선하고 유익한 영향을 주기 위해서 열심히 말하는 것이다. 이러니, 나는 되도록 좋은 말과 힘이 되는 말을 하며 살아온 것 같은데... 내가 무슨 말을 얼마나, 그렇게 함부로 하고 살아서 살아온 내내 이토록 많은 일들을 겪고 살아가야 할까! 참 내 인생 무엇 하나, 쉬워 보이는 게 없었다
'남들은 다 쉬워 보이는 데 나는 왜, 매번 이렇게 어려울까?'
'남들은 저렇게 편하게 밥 먹고 사는데 나는 왜 이게 이리 힘이 들까?'
'남들은 가만히 있어도 다 누리는 것 같은데 나는 왜 내가 일해야만 겨우겨우 먹고살까?'
이렇게 당시 내 마음을 글로 써놓고 보니 부끄럽고 나 자신이 치사하기까지 하지만 이건 사실이다. 내가 딱 요만큼 생각했다. 그때 내가 나를 보았다. 나는 딱! 저만큼 밖에 안 되는 용량을 가진 사람이었다. 내 마음보가 이 정도란 것을 그때! 남편이 하던 일을 잃었을 때! 여실히 알게 되었다.
그렇다. 간단히 말해서 나도 남편이 망했다. 그런데 남편 잘못은 없다. 남편이 어디 투자를 잘못해서 큰돈을 날린 것도 아니고 다른 곳에 한 눈을 파느라 일을 안 한 것도 아니다. 다만, 코로나시국 몇 년 동안 일을 하지 못하면서 나중에는 그 일이 완전히 없어져 버렸다. 어떤 사람들은 코로나가 종료되면서 이전 매출로 회복했다고 들었지만 남편은 그렇지 못했다. 지금 글을 쓰니 담담해 보이지만, 내가 그동안 실제로 겪은 상황은 매일매일이 지옥 같을 만큼 많이 힘들었다.
그래선지 오죽하면 '내 기도가 약해서일까?'라는 생각도 했다. 기도에 대해서 말하면 빼놓을 수 없는 이야기가 있다. 이웃집 언니 이야기다. 내가 이사를 온 후 교회를 찾고 있을 때 교회를 소개해 주면서 친해졌다. 종교가 같으면 빨리 친해지기도 하는데 우리는 남편에 관한 바람 그러니까 소원이 같아서 더 빨리 친해졌다. 언니와 나는 어려서부터 교회를 다닌 모태신앙인데 남편들은 교회를 나가지 않고 있었다. 그래서 우리는 자주 '남편을 어떻게 하면 교회에 나갈 수 있을까?'라는 주제로 대화를 나누었다.
"자기는 어떻게 기도해?"
"저요? 그냥 남편이 하루빨리 저와 함께 예배드릴 수 있도록 해 주세요! 하는 거죠. 호호호."
"나는 달라! 나는 남편 손끝 하나도 안 다치고 교회에 나오게 해 주세요. 하고 기도해!"
"아! 그럴 수도 있군요!"
그러면서 이 언니가 내게 말했다.
"남자는 그냥 다 돈 버는 기계라고! 그래서 손끝도 다치면 안 되잖아!"
"아...!"
지금 생각해 보면 그때, 내 기도를 수정했어야 했다. 나중에 남편 일이 안 되고 남편이 많은 빚을 지고 힘들어할 때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나도 그 언니 말대로 '기도를 바꿨어야 했구나! 제 남편도 손끝, 발끝 어디든 하나도 안 다치고 교회에 나올 수 있게 해 주세요!' 했어야 했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만약에 내가 기도를 바꿨더라면, 남편이 지금까지 하는 일이 다 잘 되고 앞으로도 쭈욱 자신의 위치가 건재했을까? 싶어서였다. 아무튼 그 언니나 나나 각자 기도한 것에 대한 기도의 응답은 이미 받았다는 것이다.
그 응답은 이렇다. '제발 남편이 저와 함께 교회 나오게 해 주세요!'라고 기도한 내 남편은 교회에 열심히 나와서 나와 함께 예배를 드리고 있다. 그런데 '손끝 하나도 안 다치고...'라고 기도했던 언니 남편은 아직까지 콧방귀도 뀌지 않고 있다. 어쩐지 얼핏 보면 내 기도가 먹힌(?) 것 같은 생각이 들 수 있다. 하지만 여기에 반전이 있다. 내 남편은 현재 교회에 나와 열심히지만 코로나시국에 평생 해 오던 일을 할 수 없게 되고 그로 인해서 우리는 일생일대의 위기를 겪었다. 반면, 언니네 남편 사업은 지금도 여전히 잘 되고 있어서 온 가족이 잘 먹고 잘 살고 있다.
과연, 내가 믿는 신은 누구의 기도를 들어주신 걸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내 기도를 들어주신 것이다. 지금 내가 더 행복한 것 같은 느낌은 어쩔 수 없어서다. 왜냐하면, 남편이 일이 안 되는 위기가 없었다면? 남편이 지금도 잘 나가는 사람이었다면? 남편이 이전에 얼마나 자신 밖에 모르고, 함부로 말하고 거만했는지를 내가 알기 때문에 나는 과거와는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변한 지금의 남편이 더 좋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남편은 돈 버는 기계가 아니었다. 우리 가족을 위해서 열심히 산 가장이었다.
"여보! 걱정 마. 우리 아껴서 살고, 이제 적게 쓰고 적게 먹으면 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