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딕 영문 캘리그라피과제를하고 있다. 과제는 a부터 z까지 한 번에 쓰는 것이다. 중간에 잘못 쓰면 처음부터 다시 써야 한다. 으윽! 무섭다. 처음부터 다시라니. 만약 y까지 잘 넘기고, z에서 망하면? 생각하기도 싫다. 이러니 무섭다는 것이다. 그래서 알파벳 한 글자 한 글자 정성껏 연습을 하고 나서 겨우 하나를 쓴다. 매번 쓸 때마다 살떨린다. 그래서 첫 장을 쓸 때 어려웠던 d는 빼고 썼었다. 하지만 언제까지 미룰 수는 없었다. 그래서얼마 전 새벽에d을 썼었다. 그 어럽다는 d를. 썼는데 결국은 보기 좋게? 아니지 보기 나쁘게 망했다.휘어진 d는 참 못생겼다. 그 느낌 아시죠? 쓰는 순간 '악! 망했다.'라는 생각이 뼛속까지 전해지는 절망의 순간을요. 정말 주마등처럼 몇 날 며칠 연습했던 시간이 스쳐 지나갔다. 머리가 아파왔다. 그래도 a부터 f까지만 쓴 상태라 그나마 다행이라생각했다. 이미 d 때문에 생명이 끝난 종이를 내려버리고, 새로운 종이를 꺼내서 두 번째 작업을 시작했었다.
두 번째는 조금 덜 진지하게 작업을 시작했다. 그런데 사람의 마음이란 어쩔 수 없나보다. 알파벳이 한 글자 한 글자 채워지니열심히 주의보가 찾아왔다. 사실 이왕이면 세 번까지 가는 것보다는 두 번째에서 끝나는 것이 좋은 것이니깐. 어찌 되었든 열심히 연습을 하면서 글씨가 최상의 컨디션일 때 과제 종이에 썼다. 하루 만에 휘리릭 쓸 수 있는 작업이 아니었다. 며칠이 걸리는 작업이다.그래서 주말을 잘 이용해야 한다. 오늘과 내일이바로 그 주말이다. 그것도 과제를 할 수 있는 마지막 주말. 오후 2시부터 쓰기 시작했다. H(×2), I, J, K(×2), L.7글자를 완성했다.기뻤다. 잘하면 내일 오전, 혹은 오늘 잠들기 전까지는 마무리를 할 수 있을 것같았다.
'그래, 가볍게 쓰면 오히려 긴장을 하지 않아서 잘 쓸 수밖에 없는 거야! 이런 마음이스멀스멀 올라왔다. 그때 마침. 정말 익숙한, 나름 쉬운 알파벳인 m이 나왔다. 'm쯤이야. 기본이지.' 이렇게 생각했다. 진짜로 기본선 두 개만으로 쓸 수 있는 글자가 바로 m이긴 하다. 마음을 놓았다. 첫 번째 세로선을 반듯하게 썼다. 뿌듯했다. 두 번째 세로선을 쓰고 있었는데 뭔가가 싸했다.
'어? 세로선이 왜 이렇게 길게 내려가지?'
순간 눈이 커졌다. 자동발사가 돼버린 비명이 방안에 가득 찼다. 빠르게 교재의 d와 비교를 하는 눈을 느꼈다. 그리고 바로 좌절하는 어깨의 처짐 또한 느꼈다. 망한 m이 미웠다. 아니, 너 왜 롱다리인 건데? 원래 너는 숏다리잖아. 롱다리... m이라니. 아이코, 머리야. 아니, 왜? 진짜 왜? 왜 롱이냐고.
사람은 마음을 잘 먹어야 하나 보다. 만만하게 보는 순간 바로 뒤통수를 맞는다. 네, m이 제뒤통수를 쳤어요. m이 말이에요. 허! 어이없네요. m이 m다워지려면 숏다리여야 한다. 짧은 다리라서.그래서 m이예쁜 것이다. 그런데 롱다리가 돼버렸다.세상에나, 다리가 긴 m이라니.휴우. 자만했었다. 너무 쉽게 생각했었다. 언제나 자만심은 나를 무너뜨린다. m은 빌런이 아니었다. 진정한 빌런은 m을 우습게 여겼던 나의 자만심이었다. 내 발등 내가 푹하고 찍은 것이다. 괜히 m한테 미안하네. 화풀이해서...
이제 어쩔 수 없다. 세 번째 과제 종이를 꺼내고, 다시 a부터 쓸 수밖에. 휴-우... 죄송해요. 아직 답답한 마음이 다 해소되지 않아서 그래요. 아니... 언제 쓰냐고요. 흑흑흑. 숙제가 밀렸다고요. 다음 숙제는 더 힘든데. 아, 정말 눈물이 난다. 휴-우. 짝짝짝.(뺨을 때리는 소리는 아닙니다.) 정신차리자. 그냥, 처음부터 다시써야 함을 받아들여야 한다. 포기 할 수는없으니깐. 대신 이번에는 무조건 자만심을 버리고 한 글자 한 글자 신경쓰면서 써야한다. 모든 일이 그렇듯이. 마음을 비우데긴장감은 유지하면서. 그러면 더 이상 비명소리는 나오지 않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