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일의 기적'이라고들 해서 막연히 백일을 기다렸다.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백일의 기절'. 내 몸은 딱 백일만큼만 회복되었고, 육아는 편해지는 게 아니라 간신히 익숙해지면 그 위에 매일 새로운 과제가 얹어지는 평생 숙제라는 걸 깨달았다.
우리나라에서 백일잔치는 영아사망률이 높은 백일 간 아기가 무사히 자란 것을 축하하기 위해서이다. 이맘때 아기가 걸리면 백일 간 기침을 한다고 해서 임신했을 때 백일해 예방주사도 맞았었다. 막연히 백일을 기대했던 이유는, 선배 엄마들이 백일이 되면 육아가 한결 편해진다고 귀에 못이 박히게 일러주어서였다.
'백일의 기적'이라고들 해서 막연히 백일을 기다렸다. 아픈 허리도, 손목도, 밤마다 덜덜 떨게 하는 오한도 모두 좋아질 거라고 기대했다. 아기도 통잠을 잘 거고 육아도 한결 편해질 거라고 막연히 생각했다.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백일의 기절'. 내 몸은 딱 백일만큼만 회복되었고, 육아는 편해지는 게 아니라 간신히 익숙해지면 그 위에 매일 새로운 과제가 얹어지는 평생 숙제라는 걸 깨달았다. 아토피는 수많은 육아의 난관 중 극히 일부라는 것도. 아이와 의사소통이 되고, 기저귀를 떼고, 병원에 갈 일이 줄어들고, 어른의 식사를 함께할 수 있는 나이가 되어서야 육아가 삶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조금이나마 줄어든다는 것도 이제야 알게 되었다. "누워 있을 때가 좋을 때다"라는 선배 엄마들의 말은, "백일만 견디면 할만해"라는 말과 묘하게도 상충되었다. 최근 주변에서 친구들과 선후배들의 임신 소식이 들려올 때마다, 이 모든 건 낳아 봐야 절실하게 깨닫는 것이기 때문에 아기를 갖는 거겠지, 하고 생각했다.
그렇다. 우리는 사랑에 취해서, 장밋빛 미래에 대한 기대감으로, 혹은 단순히 아기가 귀엽다는 이유만으로도 아기를 갖는다. 하지만 아기가 온다는 것은 정말 여자의 삶이 시지프스의 바위처럼 끝나지 않는 형벌 속에 처한 채로 아기의 작은 미소와 행동들에 의미를 부여하며 하루하루 견뎌내는 일이라는 걸, 과연 모르는 게 약인 걸까? 어쩌면 저출산 시대가 온 것은, 사회를 적절하게 유지하기 위한 재생산의 역할이 이렇게도 버거운 과제라는 걸 모르고 당하던 여자들이, 이제는 사회에 진출하면서 알게 되어, 기피하게 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아기를 낳은 것을 절대 후회하지 않는다. 아기가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삶의 진정한 의미를 몰랐으리라. 다소 신앙에 관련된 이야기를 하자면, 인생은 고통이 디폴트 값이며, 그 고통을 감내하면 반드시 오래가는 기쁨이 따른다고 한다. 오래가는 기쁨이란, 희생과 자비와 헌신과 절제와 같은 가치들을 추구할 때만 얻을 수 있는 종류의 의미 있는 기쁨이다. 아기를 낳을 때도 무통주사에 마취주사에 고통을 피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약물을 썼던가. 아기를 키우면서 온갖 육아템들에 의존해 가며 고통을 최소화하기 위해 얼마나 몸부림을 치는가. 아닌 사람도 있겠지만 나에게는 고생한 만큼 자식이 더 귀하다는 걸 깨닫고 나니 자연주의 출산과 같은 것들을 도저히 이해하지 못했던 좁은 관점도 조금은 넓어진 것을 느낀다.
백일 간 아기는 무럭무럭 자랐다.
아기는 먹고 자고를 반복하다가, 이제는 깨어 있는 시간이 길어져 매일 무엇을 하고 놀아줘야 할지 막막해 산책을 나간다. 2개월부터 이미 아기는 자신을 돌봐주는 나를 알아보고 햇살처럼 환하게 미소 지어 준다. 이제는 내가 발치에 있으면 다리를 나에게 척하고 올리기도 한다. 신생아 시절에는 수면교육이고 뭐고 탈진할 때까지 울어서 안아줘야만 자던 아이가, 이제는 조금 안다가 눕혀 놓으면 두리번거리다가 스르르 잠에 들기도 한다. 아기는 이미 옹알이로 자기 의사표시를 다 할 줄 안다. 혼자 너무 오래 두면 날카로운 비명으로 어서 와서 자기를 돌보라고 채찍질한다.
아기는 매일 보는 나와 친할머니 할아버지를 제외하고는 낯을 가린다. 넉 달만에 간 스타벅스. 직장 다닐 때 열심히 마셔서인지 무료 쿠폰을 주더라. 쿠폰을 쓰고야 말겠다는 불굴의 의지로 유모차를 끌고 동네에 하나뿐인 스타벅스 매장으로 열심히 달려갔는데.. 아기는 스타벅스 매장에만 들어가면 모르는 사람이 와글와글 해서인지 뿌엥 하고 운다. 동네를 한 바퀴 더 돌고 나서야 아기는 유모차에서 잠이 들고. 나는 그제야 디카페인 돌체라떼 한잔을 픽업해 나올 수 있었다. 창가 자리에 앉아서 커피를 천천히 음미하며 노트북으로 업무를 보는지 논문을 쓰는지 젊은 여성의 모습이 그저 부러워 물끄러미 바라보다 왔다. 우리 아기보다 조금 더 큰 아기를 데리고 자리에 앉아 있는 어느 엄마도 부러워 바라보았다. 나에게 수고가 많으세요 하고 눈인사를 한다. 나도 언젠가 아기 데리고 스벅에 와서 시간을 보낼 수 있을까? 출근길에 한잔씩 했던 따땃한 돌체라떼가 무척이나 그립다.
백일 간 아기와 나는 꽤 많이 친해졌다. 이제는 아기가 우는 소리만 들어도 졸린지 배고픈지 어느정도 알 수가 있다. 아기는 이제 내가 웃기려고 하면 일부러라도 웃는 척을 한다. 내가 다가가면 흥분하던 몇 주 전과는 달리, 이젠 내가 다가가면 당연하다는 듯이 안도하는 표정을 짓고, 내가 멀어지면 어딜 가냐고 짜증을 부린다. 응가를 치울 때도 그냥 안겨있는 게 아니라 내 목덜미에 옷깃을 붙잡고 매달려 있는다. 맘마를 먹일 때면 내 팔에 발을 비비면서 손가락을 쥐었다 놨다 하며 논다. 아기를 안아서 재우다가 쪽쪽이를 물리고 내려놓으면 아기는 '주워 주세요. 내 곁에 계속 있어주세요.' 하는 것처럼 쪽쪽이를 퉤 하고 뱉으며 나를 말똥말똥 처다본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에이, 그게 뭐 애정 표현이야. 그냥 아기가 크면서 반사적으로 하는 거겠지.' 할 수도 있지만, 매일 아기를 먹이고 씻기고 입히고 하다 보니 그런 것들이 보인다. 아기는 사랑을 갈구하고 있지만 나에게 사랑을 주고 있기도 하다는 걸.
백일 간 나만의 육아 루틴이 생겼다.
아침에 아기가 밤잠을 다 자고 일어나면 컨디션이 제일 좋아서, 왔다 갔다 하며 말 걸어주면 혼자서 장난감을 가지고 한 시간도 놀 수 있다. 그동안 나는 이부자리를 정리하고, 가글을 하고, 머리를 묶고, 아침을 먹고. 그리고 아기가 지루해하면 식탁으로 데려와서 앉혀놓거나 안고서 밥 먹는 모습을 보여준다. 밥을 먹고 한참을 놀아주다가 아기가 낮잠을 잘 시간이 되면 어부바를 하고서 젖병을 씻고, 아기를 배 위에 올려놓고 인간 바운서가 되어 주다가 아기가 졸려하면 낮잠을 재운다. 아기의 낮잠 시간동안 나는 짬짬이 목욕도 하고, 블로그 글도 쓰고, 온라인으로 아기 용품도 주문하고, 이사 준비도 한다. 아기가 깨어나면 잠시 놀아주다가 맘마를 먹이고 기저귀가방을 챙겨서 밖으로 나간다. 반찬 가게에 반찬도 사러 가고, 스타벅스도 가고, 동네 하천을 따라서 당근도 하러 간다. 일요일에는 예배도 다녀온다. 그렇게 밖에 한번 다녀오면 벌써 저녁을 먹을 시간이다. 저녁을 먹고 치우고, 바닥청소를 하고, 빨래를 돌리고, 아기를 씻기고 놀아주다 보면 어느덧 아기는 졸려서 밤잠에 빠져든다.
아기가 밤잠에 빠져들면 머릿속이 복잡해진다. 하고 싶은 건 태산 같은데 우선순위를 정해서 후다닥 처리해야 한다. 나에게 주어진 시간은 딱 한 시간, 아무리 길어도 두 시간 내에는 잠에 들어야 한다. 아기가 긁느라 새벽에 한두 번은 깨서 맘마를 먹기 때문에, 그래야만 다음날 병든 닭처럼 졸지 않고 또 육아를 할 수가 있다. 어젯밤에 적어 둔 오늘의 할 일을 한다. 홈트를 하고, 좌욕을 하고, 씻고, 휴직 전에 마무리하지 못한 앱이 출시되어 써 보고, 지인이 만든 문서를 부탁받아 검토해 주고, 아기 장난감을 주문하고, 내일 아기와 무엇을 하고 놀아줄지 적어 두고, 내일 할 일을 적어 둔다. 출산하고서는 유튜브를 거의 못 봤다. 밤이 되면 꼭 해야 될 일을 해치우느라 유튜브를 볼 시간이 없다. '~를 하고 싶다'는 생각을 한 지가 꽤 오래되었다. 매주 브런치북을 발간하는 것도 꽤나 부담되는 일이다 보니 그것마저 하지 않았다면 어쨌을까 싶다.
반복되는 육아 일상이 어느 순간 무료해져 복직과 지적 활동에 대한 생각이 절실해지면서도, 동시에 아기가 점점 예뻐져서 하루하루 그 모습을 더 눈에 담지 못하는 게 아쉽다. 낮잠 시간에 하고 있는 것들을 복직하면 아기가 밤에 잘 때 후딱 해야 될 걸 알기에, 복직 후의 일상을 상상하며 낮잠을 안 자고 밤에 모든 걸 하는 연습도 해 본다. 아기를 재우다 보면 나도 몽롱해져 졸 때가 많은데 카페인은 복직할 때 수혈할 요량으로 보류해 둔다. 복직을 하면 살림을 할 시간이 절대적으로 부족하겠지만 사람을 최대한 안 쓰고 싶어서, 짐도 많이 버리고 살림을 최대한 효율적으로 할 수 있게 세팅을 시작했다.
백일 간 몸이 많이 회복되었다.
이제는 유모차를 끌고 산책도 한 시간씩 하고 오르막길도 영차영차 오른다. 안될 것 같던 스쾃도 플랭크도 조금씩 시간을 늘려 가고 있다. 다만 손목은 아기 체중이 갑자기 불어날 때마다 아작이 나고, 발목과 발은 계속 아프고 저리다. 손목은 테이핑을 하고 발은 족저근막염 슬리퍼를 신고 스트레칭으로 버틴다. 날이 흐리면 허리가 아프고 앉아있기가 벅차다. 목욕을 할 때마다 머리가 한 주먹씩 빠져서 어떻게 아직도 이만큼 남아 있는지 신기할 지경이다. 이 모든 것들이 아기가 첫 돌이 될 때까지 서서히 좋아진다는 것도 놀라울 뿐이다.
이제는, 평생 이 아이를 돌봐야 한다는 현실이 피부로 다가온다. 아기 보면서 집안일도 하면서 나를 챙기는 게 아직 버겁지만 점점 익숙해져 간다. 아직은 아기 데리고 외출을 하려면 준비에만 한 시간이 걸리지만 이것도 반복할수록 익숙해져 간다.
한편으로는, 아기가 강아지처럼 돌봐야 하는 대상으로만 느껴졌는데 이제는 어엿한 가족의 한 구성원으로 느껴진다. 응가를 씻길 때 처음에는 내 손에 응가가 어떻게 하면 안 묻을까를 고민했다면 이제는 아기를 비데에 눕혔을 때 아기의 등이 배길지를 생각한다. 낮잠 시간을 최대한 활용하기 위해 집안일을 할 때는 무조건 아기를 업었는데 이제는 오래 업으면 아기 다리에 멍이 들고 아기가 지루해하기에 아기가 잘 때도 집안일을 좀더 하려고 한다. '내가 ~하니까 ~해야지'가 아니라 '아기가 ~하게 느낄 수 있으니까 ~해야지'로 천천히 바뀌어가고 있다. 아기가 상호작용을 무척이나 좋아하기도 하고, 내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아이의 건강과 지적 능력 등이 달라진다는 게 신기하면서도 책임감에 어깨가 무겁다.
어느 날은 내가 산후우울증 비슷한 것이 잠깐 왔다 가서 눈물을 흘리다가 닦고서 촉촉한 얼굴을 하고 아기에게 웃으며 짠- 나타났더니, 아기가 웃지 않고 '엄마 왜 이렇게 울었어' 하는 표정으로 몇 분간 심각하게 나를 바라보았다. 작다고 무시하기에 아기는 이미 너무 많은 것을 보고 느끼고 있다.
백일 사진은 엄마들 인스타 용이라지만 아무래도 아기가 이만큼 아기스럽고 예쁜 시기가 다시 오지 않을 걸 알기에 공주 옷을 입혀놓고 사진을 찍어주었다. 5분도 채 앉아있지 않았는데도 아기가 사촌들을 보고 놀라서 많이 울었지만 우는 모습까지도 너무 귀엽고 사랑스러웠다. 가족들이 모여서 식사를 할 때 나는 우는 아기를 달래느라 같이 먹지 못하고, 물도 제때 못 마시고 화장실도 제때 못 가는 정신없는 날이었다. 사진만 간신히 찍고 아기는 울다 지쳐 잠들었지만 아기로 인해 가족이 다 같이 모여서 덕담을 나누는 소중한 시간이었다.
아기가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나는 이 모든 것을 겪지도 알지도 못했을 것이다. 또다시 아기에게 고마워진다. 그리고 희생이 주는 행복이라는 아이러니를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된다. 나를 아기에게 희생할수록 내가 더 행복해지는 마법. 하지만 나를 아기에게 전부 다 주면 내가 남지 않으니, 최소한의 나는 남겨놓기 위해 오늘도 글을 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