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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Innobanker Mar 16. 2024

D+88) 내가 아니면 누가 너를


‘너를 이렇게 사랑하는 나도 고비가 오는데, 남이 너를 돌보면 얼마나 지겨울까. 내가 아니면 누가 너를 이렇게 사랑해 줄까.’

이제 백일이 가까워진 내 딸을 하루종일 돌본다. 


아침에 일어나면 머리를 감기고, 얼굴을 씻기고, 로션을 발라주고, 세 시간에 한 번씩 모유를 먹이고, 모유 먹이는 동안 병원 진료 예약을 하고, 태열 가려움증 약을 먹이고, 또 분유를 먹이고, 트림을 시키고, 나도 밥을 먹고, 또 기저귀를 갈고, 모빌을 보는 동안 젖병 설거지를 하고, 응가를 닦아주고, 터미타임으로 놀아주고, 말을 걸어주고, 노래를 불러주고, 사진을 찍어주고, 빨래와 건조기를 돌리고, 업고 요리를 하고, 장난감을 닦아놓고, 침으로 범벅된 볼과 손을 닦아주고, 빨래를 널고 개고, 당근 판매자와 연락하고, 이사 갈 준비를 하고, 침구 먼지를 털고, 목욕을 시키고, 바닥 물걸레질을 하고, 쪽쪽이와 치발기를 소독하고, 분유포트를 닦고, 안아서 집을 구경시키고, 유모차를 태워서 밖을 구경시키고, 안아서 자장가를 불러주고, 온라인으로 아기 용품과 옷을 쇼핑하고, 아기 놀아주는 법을 검색해 보고, 어린이집 정보를 찾아보고, 아기 밤잠을 재우고, 내 먹을 요리 재료를 주문하고, 나도 목욕을 하고, 홈트를 하고... 


어느 날은, 한 시간 동안 두 번의 응가를 치우다가, 갑자기 멍-해지고 말았다.


기저귀를 가는 단순 반복 동작을 하루에 6번에서 7번 이상 하면서도 지금까지 한 번도 지겹다고 느낀 적이 없었다. 그저 아기가 너무 사랑스러웠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응가를 치우자마자 또 응가를 하니 도돌이표로 느껴지면서 갑자기 세상이 멈추어 띵 - 하는 기분이 드는 것이었다. 


‘너를 이렇게 사랑하는 나도 고비가 오는데, 남이 너를 돌보면 얼마나 지겨울까. 내가 아니면 누가 너를 이렇게 사랑해 줄까.’


내가 아니면 누가 작은 소리에도 깨서 너를 밤에 긁지 않게 손 잡아줄까, 약 한 번을 먹일 때도 약에 대해서 꼼꼼하게 공부할까, 너의 작은 기침 소리에도 심장이 쿵 할까, 너의 칭얼거림이 배고픈 건지 졸린 건지 구분할까, 코 막히는 소리에 코부터 뚫어줄까, 품에 파고드는 널 안정시킬 수 있을까, 너의 짜증을 끝까지 받아줄 수 있을까, 너의 응가를 치우며 응가 상태부터 먼저 걱정할 수 있을까, 네가 눈 마주치고 놀고 싶을 때 맞춰서 말 걸어줄 수 있을까... 아빠는 못하고 엄마만 할 수 있는 것들이 참 많다. 


새 기저귀를 채우는 동안 아이의 모든 눈짓 손짓 발짓 옹알이를 눈에 담아 본다. 눈에 담아도 모자라 동영상도 찍어 본다. 이 온도, 이 햇빛, 촉촉한 눈망울로 나를 바라보며 하는 알 수 없는 말들, 허우적거리는 손발을 곧, 그리워하게 되겠지. 


요 며칠 하루종일 얼굴을 긁어 병원에 갔더니 아토피가 의심된다고 한다. 마음이 덜컹 내려앉았다. 앞으로 갈 길이 구만리구나. 동네에서 가장 인기가 많다는 소아과에서 진찰을 받았지만 스테로이드를 끊자마자 증상이 악화된다. 아토피 엄마들 카페에 가입을 하고 정보를 수집하고. 아토피 전문 병원에서 진료를 보고 약을 타오고. 대학병원에 진료 예약을 걸어두고. 그리고 또 아기 귀에서 진물이 난다. 또다시 비대면 진료를 알아보고. 약을 타오고. 아기가 조금 덜 긁는 것 같다. 조금 덜 힘들어하는 것 같다. 귀에도 약을 발라 준다. 피부가 빨갛게 되었을 때 병원에 보여줄 사진을 열심히 찍어둔다. 목욕도 온도를 체온과 비슷하게 해서 하루 5분에서 10분 정도 적당하게 해 주고 로션도 열심히 발라준다. 방의 온습도를 다시 한번 맞춰본다. 침구도 열심히 세탁하고 먼지도 털어 본다. 아기가 벅벅 긁으면 내 손을 대어 막아본다. 조금씩 손싸개와 속싸개를 풀어주고 있었는데 다시 씌워서 재운다. 


새벽 한 시가 되면 아기에게 찾아오는 가려움은, 성인도 참기 어려운 수준이라고 한다. 손을 묶인 채 고통스러움에 도리도리를 하며 발로 침대를 내리찍는 아기를 내려다보며 내가 대신 가렵고 싶다. 긁느라 괴로운 아기를 조금 더 안아줘 본다. 다행히도 엄마 품에 안기자마자 가슴에 얼굴을 묻고 쌕쌕, 평온한 표정을 지으며 다시 깊은 잠에 빠진다. 깊은 잠에 빠지면, 아기는 잠시나마 가려움을 잊는다. 아기가 통잠을 다시 못 자니 새벽 한 시부터 아침 일곱 시까지 한 시간에 한 번씩 깨어 삼십 분씩 아기를 안아서 재우고 다시 쪽잠을 자는 생활을 한 달 이상 반복했다. 가족들과 지인들에게 말을 하면 녹차물로 목욕을 시켜봐라, 내가 아는 분은 스테로이드를 일 년 쓰니 낫더라, 대학병원을 가봐라, 이런저런 방법을 권유하지만 내 아이에게 무엇이 가장 좋은 방법일지는 내가 결정해야만 한다. 그 결정에 따라 아기는 일 년을 아플 수도 십 년을 아플 수도 있겠지. 


‘내가 아니면 누가 너를 이렇게 세심하게 하나부터 열까지 챙길 수 있을까. 내가 내려놓는 순간 끝이겠구나.’


피곤해도 잘 수가 없다. 내 몸이 아파도 아파할 새가 없다. 


사람들이 자식을 낳으면 나 자신보다 더 사랑하게 된다고 했을 때, 그 말이 곧이곧대로 믿어지지 않았다. 무슨 뜻인지 몰랐다.


이제는 알 것 같다. 계좌에는 온통 아기를 위한 소비뿐 나를 위한 소비는 오로지 먹는 것과 보험료, 소모품뿐이다. 내 몸은 씻지 못해도 아기 목욕은 시킨다. 아직까지는 남편도 눈에 들어오질 않고 온통 아기에 대한 생각뿐이다. 문득, 일하던 내가 그리워 잠을 줄여가며 짬을 내어 직장 동료들에게 신년 인사를 건네 본다. 엊그제까지만 해도 풀타임으로 일했었는데, 무슨 일을 했었는지 기억도 나질 않는다. 내가 누구인지 어떤 사람인지도 자꾸만 기억에서 사라져 간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도 아기가 잘 자고 있는지 숨소리에 귀 기울이게 된다. 어제보다 더 긁지는 않는지, 잠꼬대는 하지 않는지, 코가 막히진 않는지, 너무 춥거나 덥진 않은지.. 내 몸이 아픈 건 어느새 생각이 나지 않는다. 


언제까지고 이런 상태로 살지는 못하겠지. 계속 이 상태가 계속된다면 미쳐 버릴지도 모르지. 언젠가 딸은 학교에 가고, 사춘기가 오고, 나에게서 멀어져 가겠지. 독립도 하고 결혼도 하겠지. 그러니 지금은 아기에게로 향하는 애타는 이 마음을 일부러 막지는 말자. 더 안아주고 사랑해 주자. 


이렇게 엄마가 되어가는 걸까? 

다섯 살에 집을 나간 내 엄마는 무슨 심정이었을까? 

할머니도 나를 이렇게 키우셨을까? 

할머니 생각이 많이 나는 밤이다. 

별들이 반짝이는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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