낳고 키워보기 전에는 돈을 써서 사람을 구하면 모든 게 해결될 줄 알았다. 그런데 그게 아니다. 아기는 졸릴 때도, 배고플 때도, 불안할 때도 엄마인 나를 절대적으로 필요로 한다. 테이프를 칭칭 감고 출전하는 축구 선수들처럼, 나도 며칠간은 목욕을 하고 나면 손목에 테이프를 칭칭 감고 아기 돌보기 전투에 나설 준비를 했다. 그리고선 엉엉 울면서도 우량한 우리 딸을 혼신을 다해 돌보았다. 바야흐로 내가 고통을 회피하고 나밖에 모르던 인간에서, 타인을 위해 고통을 감내하는 인간으로 한 단계 올라서는 순간이었다.
우리 아기는 뱃속에서부터 우량아였다. 조리원에서도 먹성이 대단해서 집에 오니 이미 백분위 상위 97퍼센트에 가까워 비만이 걱정될 정도였다. 옛날에는 우량아 선발 대회라는 것도 있었다고 하니 우량아가 무조건 좋은 것인 줄로만 알고 있었는데, 요즘 트렌드는 영유아 비만도 성인 비만으로 이어지기 쉬워서 조심해야 한다나? 공부해 보니 안되겠다 싶어서 퇴소하자 마자 배고파서 우는 아기를 쪽쪽이를 물려 가며 다이어트 시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엄마아빠가 모두 키가 커서 그런지 유전자의 힘은 강력했다. 아기는 생후 50일 경에 이미 출생 체중의 2배가 되었지만 나의 관절은 별로 회복이 되지 않았다. 그땐 몰랐다. 6키로였던 아기가 7키로가 되는 데에는 채 한달 반이 걸리지 않는다는 걸.. 아기가 먹으면서 스르르 잠들던 조리원 시절과는 달리 내려놓기만 하면 우는 시기에 너덜너덜한 손목과 허리를 하고서는 7키로 아기를 하루 종일 안고 있자니, 어떤 날은 앉지도 눕지도 서지도 못할 만큼 허리가 아파 왔다. 관리사 선생님은 이제 오지 않으시니 집안일은 집안일대로 해야 하고 밥도 챙겨 먹어야 하는데, 아기가 깨어 있는 시간은 점점 늘어나기만 하고, 몸뚱아리가 하나밖에 없으니 도무지 짬이 나질 않았다. 하는 수 없이 이사를 핑계로 시댁으로 아예 거처를 옮겨 버렸다.
시댁 어른들이 나를 대신해서 육아를 해주시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아침밥을 드실 때 숟가락 하나 더 얹어서 식사를 하니 밥은 굶지 않았고 감사하게도 설겆이도 얹어서 같이 해주셨다. 내가 볼일 볼 때, 샤워할 때, 밥먹을 때, 젖병 씻을 때 오며 가며 잠깐씩 아기에게 말을 걸어주시니 그나마 숨통이 트였다. 관리사님이 출퇴근하실 때도 혼자 있는 적막이 무서웠는데 이제는 관리사님이 안 오시니 말 못하는 아기와 덩그러니 있는 적막은 더욱 길게만 느껴졌었다. 시댁 어르신들이라 아무래도 조금 어렵기는 하지만 오늘은 이랬어요 저랬어요 하고 대화할 상대가 있다는 것만으로 마음에 위안이 되었다. 시어머님이 남편을 키우실 때의 이야기를 듣기도 하면서 옛날에는 육아템도 없이 대부분의 엄마들이 천기저귀를 빨고 홀로 아기를 키우며 살림을 어떻게 꾸려 나갔는지 놀라기도 위안을 받기도 했다. 이래서 아기는 온 마을이 키운다는 말이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시댁에서의 임시 생활도 점차 적응해 가던 어느날, 사단이 났다. 깜빡하고 아기띠를 놓고 예방접종을 맞추러 병원에 갔다가 손목이 나가버렸다. 아무 것도 쥘 수도 들 수도 없었다. 퇴원 후 주기적으로 도수치료를 받고 있었는데, 그 날은 도수치료를 다녀와서도 손목이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밤에 잠을 자는데 다음날 아기를 또 안아올릴 생각에 앞이 캄캄하고 눈을 뜨기가 무서웠다. 돈을 쓴다고 해도 갑자기 생판 모르는 남에게 아기를 봐달라고 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시댁 어른들이 감사하게도 아기 트림 시킬 때나 들어올려야 할 때마다 도와주셔서 어떻게든 힘을 내서 버텼다. 하지만 응가를 씻길 때나 모유수유를 할 때처럼 도움을 받을 수 없을 때는 울면서 아기를 들어올려야 했다. 손목보호대도 소용이 없었다. 다음날 저녁, 2차로 시누이께 SOS 를 쳤다. 시누이는 나와 동갑임에도 아이 둘을 열 살, 여섯 살까지 키워낸 파워 우먼이다. 시누이는 울고 있는 나를 달래고 팔을 주물러주었다. 집에서 아기를 태울 수 있게 유모차까지 가져다 주었다. 그리고 본인이 아기를 키울 때 버티던 방법인 '스포츠 테이핑'이라는 것을 알려 주었다.
생전 이런 세계는 모르고 살았는데, 그날 저녁 테이프를 주문하고 유튜브로 관련 영상을 찾아보며 새로운 것들을 많이 알게 됐다. 스포츠 테이핑은 관절이 온전치 못할 때 테이프로 근육이 특정 방향으로 움직이는 걸 막아줘서 통증을 줄여준다고 한다. 남편은 유명한 축구 선수들의 스포츠 테이핑 영상을 보여주며, 저 선수들은 매 경기마다 발목에 붕대처럼 테이프를 칭칭 감고 출전한다고 알려주었다. 이렇게까지 하면서 이를 악물고 아이 둘을 키워낸 시누이가 새삼 대단해 보였다. 그리고 세상에 생각보다 큰 고통을 매일같이 묵묵히 견뎌내고 있는 사람들이 많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낳고 키워보기 전에는 돈을 써서 사람을 구하면 모든 게 해결될 줄 알았다. 그런데 그게 아니다. 아기는 졸릴 때도, 배고플 때도, 불안할 때도 엄마인 나를 절대적으로 필요로 한다. 테이프를 칭칭 감고 출전하는 축구 선수들처럼, 나도 며칠간은 목욕을 하고 나면 손목에 테이프를 칭칭 감고 아기 돌보기 전투에 나설 준비를 했다. 그리고선 엉엉 울면서도 우량한 우리 딸을 혼신을 다해 돌보았다. 바야흐로 내가 고통을 회피하고 나밖에 모르던 인간에서, 타인을 위해 고통을 감내하는 인간으로 한 단계 올라서는 순간이었다.
신기하게도 테이프가 손목을 지탱해 주어서인지 힘이 덜 들어가니 통증이 덜해졌고, 시댁 어르신들의 도움과 응원에 힘입어 나의 손목 관절은 조금씩 회복되어 갔다. 아기는 고맙게도 70일 즈음에 이미 밤에 오래 안아주지 않아도 여덟 시간씩 통잠을 자 주었고, 밤잠을 끊기지 않고 푹 자니 몸 컨디션은 빠르게 좋아졌다. 그 즈음에 아기가 울어서 급하게 밥을 먹다가 체하기도 했는데, 역시나 내가 체한 것과는 상관 없이 아기는 배가 고프면 울고 졸리면 울었다. 그래서 체하는 게 무서워서 밥을 천천히 꼭꼭 씹어 먹다가 남기기 시작했고 식사량이 줄은 나는 다이어트를 따로 하지 않았는데도 100일이 채 되기 전에 이미 임신 전 몸무게로 돌아가버렸다.
육아가 아이가 클 수록 난이도가 줄어든다고 많이들 이야기 하지만, 이제는 안다. 육아는 장기전이라는 것을. 이 고비를 넘어서면 또 다른 고비가 올 것이고, 관절은 미약하게나마 평생 아플 것이며, 잠은 항상 모자를 거라는 걸.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는 것 자체가 마냥 꿈같은 행복길만 놓여 있는 것이 아니라 어마어마한 희생을 전제로 하는 약속이라는 것을, 왜 이제야 깨달았을까.
어릴 때를 회상해보면 나를 돌봐주시는 할머니가 아프신 게 너무 싫었다. 할머니가 아프시면 칭얼거려도 받아줄 사람이 없었으니까. 엄마는 이런 것이구나, 아파서는 안 된다는 걸 깨달았다. 그리고 엄마는 강해야 한다. 나만을 위한 삶이 아니니까. 길을 걸어가는 모든 엄마들이 위대해 보이고 모든 사람들이 새삼 소중해 보였다. 아프면 누군가에게 기대고 싶고 서러워지는데, 엄마는 아프면 엄마만 아픈 게 아니라 아이도 힘들어지니 되도록 아플 때까지 몸을 혹사하거나 방치해서는 안 된다. 평소에 운동을 열심히 해서 체력도 기르고 밥도 영양제도 잘 챙겨먹고, 위생도 철저히 해서 질병에 걸리지 않도록 노력하고 몸과 마음을 잘 다스려야 한다.
마음을 다스리기 위해서 나는 글을 쓴다. 내가 우울하면 아이를 온전히 돌볼 수 없다. 내가 육아를 하면서 자신을 잃지 않고 밝고 씩씩하게 아기를 돌보기 위해서는 글을 쓰는 것이 큰 도움이 된다. 그래서 이 글은 초보 엄마인 나에게는 생명줄이다. 육아를 하면 현타가 오는 순간들이 많고 멍하니 하루가 지나가버려 허망할 때도 많은데 글을 쓰면서 그래도 엄마가 되었기에 오늘도 한뼘 더 성장했구나 하고 모든 것에 감사하게 되니 말이다. 내 머릿속에서 나온 말들인데도 다시 읽어보면 허물 벗은 듯이 낯설고 새롭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아기가 낮잠 잘 때는 노트북 앞에 앉아 글을 쓰고, 밤잠을 자면 홈트를 한다. 아기가 잠든 후 한 시간이 나에게는 닳아버린 배터리를 충전하는 시간이다. 이렇게 하루하루 이겨내다 보면 나는 아기와 함께 못 알아보게 자라 있으리라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