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광란의 자전거 대탈주
카이스트의 또 하나 독특한 모습이라면 신입생이 대부분 기숙사 생활을 한다는 점이다. 넓은 캠퍼스 안에 잘 곳과 먹을 곳, 공부할 곳, 작게는 놀 곳까지 다 갖춰져 있다. (수영장에 이어 최근에 코인노래방이 생겼다 하니 말 다 했다고 본다.)
다른 대학의 ‘대학로’, ‘대학 문화’와 비교했을 때 확실히 텐션이 다르다. 교통카드 대신 자전거를 구비하고서 막차가 끊길 걱정일랑 없이 네 발로 기어서라도 기숙사에 돌아가 잘 수 있는 ‘캠퍼스 365일 생활권’이 형성되어 있다. 기본적인 인프라는 물론 우리에게 집이자 학교이자 같이 놀 친구들까지 다 있는 캠퍼스는 그 자체로 마을과 같다. 안 그래도 평화로운 대전에 갑천을 옆에 두고 외따로 떨어진 섬마을 같달까. 강원도 어딘가에 동막골이 있다면 대전엔 카이스트가 있지 않을까 싶은 평화로움이다.
캠퍼스 생활권에서 신입생들은 대게 비슷한 생활을 했다. 오전 9시부터 오후 4시까지 수업을 듣고 저녁이면 일반 화학, 물리, 미적분 연습반이나 보충수업을 가고, 퀴즈가 있는 날이면 퀴즈 공부를 했다. 대전시 유성구 어느 외딴섬의 이공계에 특화된 단과대학에서 함께 기숙사 생활을 하며 똑같은 수업을 듣는 신입생들. 얼핏 보기에도 종 다양성이 그리 커 보이진 않는 환경인데 그 와중에도 누구는 성적이 좋고 누구는 성적이 나빴다.
눈물의 성적표를 받아 들고 이제 종강도 했겠다, 지긋지긋한 캠퍼스 수도원을 떠나보자 벼르던 차였다. 마침 가오리도 본격적인 여름 훈련에 들어가기 전 일주일간 방학이다. 친구들은 모처럼 집에 돌아가 쉬거나 배낭여행을 떠났다. 나는 뭘 하며 첫 방학을 보낼까 대학생의 로망을 꽃피워보려는 찰나, 매정하게도 내 앞에는 여름 보충 학기가 마련되어 있었다. 드롭했던 대학수학 과목을 그해 여름 보충 학기로 바로 재수강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단 하루의 방학도 없이 보충학기가 시작되었다.
혼란하고 심란했던 학기 끝 종강만을 기다렸건만 종강과 함께 개강이 시작되고 종강인 듯 종강 아닌 개강과 함께 나는 울적한 방학을 시작한다. 그나마 감사했던 건 절친했던 친구 둘, 나의 룸메이트였던 혜원과 길 가다 우연히 친해진 지원과 함께였다는 점이었다. (우연의 일치인지 혜원은 나처럼 일반계고등학교를, 지원은 외국고등학교를 졸업했다.)
셋이 나란히 여름학기를 듣게 된 우리는 밤이면 자주 밖으로 뛰쳐나갔다. 속에서 열이 올랐다. 나름 한다고 했는데도 성적이 왜 이 모양일까? 눈을 뜨고 귀를 쫑긋 세우고 수업을 들어도 왜 이해가 되지 않을까? 한때 우등생이었던 나는 어쩌다 이렇게 되었을까? 고향에 가거나 과외를 하러 캠퍼스 밖에 나갔다 돌아오는 날이면 유난히 혼란스러웠다.
우리 딸
카이스트 다녀.
현실의 나는 똥멍청이 일 뿐인데. 카이스트에 걸맞은 천재와 영재는 따로 있고요, 나는 어쩌다 같이 있는 들러리 같은 존재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차올랐다. 캠퍼스 밖의 세상이 나를 보는 시선과 캠퍼스 안의 내가 위치한 자리가 매번 아득히 멀게 느껴졌다. 경계인이 된 기분. 나에게 맞지 않는 옷을 입고 뒤뚱뒤뚱 겨우 어깨를 맞추려 갖은 애를 쓰는 광대가 된 것 같았다.
그 시절 가장 힘들었던 건 모든 걸 나의 문제로 귀결 짓는 마음이었다. 내가 머리가 좋지 않아서, 내가 노력을 덜 해서, 내가 일반계고등학교를 졸업해서. 스무 해 가까이 살면서 노력을 해도 안 되는 일은 크게 없었던 것 같은데 처음으로 마주한 무력한 상황에서 가장 탓하기 쉬운 건 나였다.
A, B, C 몇 개의 알파벳과 그에 따른 차등적인 장학금은 친구들을 나란히 줄 세우고 서로 더 아득바득 경쟁하라고 몰아세우는 듯했다. 유약하고 모자란 나를 탓하다 못해 그 시선은 친구들에게까지 옮겨가 친구가 부럽고 미운 마음이 불쑥불쑥 솟아났다. 나 스스로와 친구들과 끊임없이 경쟁하는 마음. 학교와 잠시간 거리를 두고 나를 돌봐야 할 시간이 절실했지만 끝나야 할 학기가 끝나지 않는 상황에서 또다시 밀려오는 과제와 시험을 앞두고 열등감과 질투, 죄책감으로 범벅이 된 마음은 바짝 타 들어갔다.
그런 마음들이 차곡차곡 차오를 때면 우리는 어김없이 페달을 밟았다. 밤의 캠퍼스를 누비는 세 명의 폭주족. 속도감이 최고에 다다르면 세상은 고요해지고 하나의 점 속으로 빨려 들어가지만 그 소실점을 통과할 순 없어 다가갈수록 점점 더 멀어지는 영화의 한 장면처럼 그리 낭만적이지는 않지만 다소 하이틴스러운 밤이었다. 누군가 악, 하고 소리를 지르면 그 시원함에 깔깔 웃어대고 누군가 허공에 욕을 내뱉으면 그 통쾌함에 또 함께 환호하는 하이틴스러운 밤이기도 했다. 좌 혜원 우 지원, 든든하게 캠퍼스를 함께 내달릴 친구들이 있어 그나마 하루하루를 또 견뎌보는 그런 날들이었다.
그 해 봄 우리는
그 해 봄, 마음이 아픈 건 나뿐만이 아니었다. 어느 밤 뜻밖의 문자가 날아왔다.
갑작스러운 소식에 우리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몇 달 전까지만 해도 함께 수영을 하고 강의실로, 기숙사로 헤어지며 장난스레 손을 흔들던 우리였다. 갑자기 휴학을 하고 집에 머물고 있다는 소식만 얼핏 들었던 너였다. 아주 오랜만에 너의 소식을 듣고 우리가 향한 곳은 장례식장이었다. 모든 게 낯설었다. 수영복 대신 검은 정장을 갖춰 입은 친구들도, 영정 사진으로 마주하기엔 너무 앳된 그 얼굴도, 늘 웃고 장난치던 선배들의 넋 나간 표정도. 모든 게 낯설고 얼떨떨한 밤이었다. 그날 밤 캠퍼스 밖에서야 동그랗게 다시 모인 우리는 많이 울었다.
4개월 동안 4명의 친구들이 연이어 가슴 아픈 선택을 했다. 세 명의 학생들이 세상을 등지고서야 총장은 학교 홈페이지에 글을 남겼다.
“명문 대학 학생들은 남보다 더 잘하기 위해 경쟁을 한다. 이런 학생들은 경쟁력 있는 대학에서 공부하기를 원하며 스스로 이런 대학을 선택한다. 해외 일류 대학의 경우, 개교 이래 학생들의 자살 사건은 계속 있어왔다. 이 세상 그 무엇도 공짜로 얻을 수 있는 것은 없다. 노력 없이, 고통 없이 희생 없이는 아무것도 성취할 수가 없다”
나는 두려웠다. 우리가 원한 미래가 이런 것일까? 내가 부러워하고 동경하던 그런 친구였다. 과학고를 조기 졸업하고 대학에 와서도 수학 천재라며 사람들이 놀리곤 하는, 카이스트 하면 퍼뜩 떠오르는 천재들. 나처럼 그저 공부를 열심히 한 모범생 말고 진짜 머리가 비상한 아이들. 머리도 좋고 고등학교 때부터 함께 해온 친구들도 많고 이렇게 함께 수영하는 친구들도 있고. 내 눈에는 마냥 힘들 게 없어 보이던 친구였다. 앳된 얼굴의 영정 사진을 마주하고 나는 두려웠다. 공부를 잘하면, 성적이 좋아지면 괜찮아질 줄 알았는데. 무엇을 위한 것인지는 몰라도 하라는 공부 열심히 하며 참 열심히 살아왔는데. 우리의 미래가 이거라면 우리 너무 불쌍하지 않아? 살 수 있을까? 나는, 잘 살 수 있을까? 탈출구라 막연히 생각했던 미래도 남모를 아픔에 스러지는 모습에 나는 더 나아질 수 있겠다는 희망 같은 것이 무너지는 기분이었다.
학생회관 앞에 세워진 ‘총장님께 보내는 질문’이라는 게시판에는 총장이 쓴 글에 대한 학생들의 성토가 빼곡히 적혀 있었다.
“경쟁을 통해 카이스트에 왔지만 경쟁하고자 온 사람은 없습니다.”
“꿈을 좇으려 들어온 사람들도 있지만 꿈을 찾기 위해 들어온 사람도 있다는 걸 기억해 주세요.”
세계 최고의 대학을 목표하는 그곳은 우리에게도 최고의 대학이었을까? 어린 시절부터 이미 경쟁에 익숙했던 아이들. 몇몇 친구들은 말했다. 대학에 들어오기 전부터 이보다 더 한 경쟁으로 인한 스트레스를 받아왔다고. 징벌적 등록금제로 받는 스트레스는 중고등학교 대 느꼈던 스트레스에 비하면 새 발의 피라고. 이미 경쟁을 통해 이곳에 모인, 누구든 알게 모르게 경쟁에 익숙해진 아이들. 십수 년을 경쟁만 하고 어쩌면 그 경쟁 덕분에 이곳까지 왔을 이들에게 진리의 상아탑이라는 대학마저 그저 경쟁에 최적화된 학생을 길러내고 차등적인 등록금을 받는 자본주의식 교육 장사를 할 뿐이었다. 모든 게 갖춰진 캠퍼스와 맞춤형 커리큘럼이 있으니 뒤처지고 싶지 않다면, 자신의 존재 가치를 증명하고 싶다면 그 속에서 한눈팔지 말고 공부할 것을 강요받은 아이들. 세상을 살아가는 것조차 서툰 열아홉스물의 우리들에게 내가 아픈 동안 너는 아프지 않으냐고 따뜻한 말 한마디 건넬 여유도 가르치지 못한 학교였다. 결국 너를 부러워하던 나도, 부러움을 받던 너도, 그런 서로를 돌봐주지 못했던 우리도, 그 해 봄의 끝자락에 우리는 모두가 많이 아팠다.
꿈과 책과 힘과 벽
그날 한울 오빠를 마주하고 내가 진짜 하고 싶었던 이야기는 “살고 싶어요.” 같은 것이었는지 모르겠다.
“내가 잘하는 건 공부밖에 없는데 여기서는 그게 더 이상 통하지 않아요. 내가 잘하는 게 뭔지, 내가 살 가치가 무엇인지 도무지 모르겠어요.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여기서 수영이라도 최고로 잘하면 자신감이 생기지 않을까. 그래서 나는 수영을 더 잘하고 싶었다. 나에게 당장의 존재의 이유와도 같았던 수영. 스물의 나는 풀뿌리라도 잡는 심정으로 헤엄쳤고 고맙게도 그 수영과, 함께 헤엄치던 이들 덕분에 유난히 어두웠던 그 봄을 헤쳐 나올 수 있었다. 불안했던 나의 한 시절을 잡아준 것만으로도 고마운 일이지만 그게 꼭 아름다운 일이었느냐 하면 여전히 잘 모르겠다. 신영복의 <담론>에서는 이런 글귀가 있다.
“모든 인간은 자기 이유를 찾았을 때 ‘자유로워진다.’”
학벌로, 성적으로, 수영으로 꼭 무언가를 통해 나의 존재를 인정받으려던 시절. 내 인생에 더없이 반짝거렸던 그때의 나는 그 반짝임만으로도 충분히 아름답고 자유로웠을 텐데. 그때의 나는 몰랐다. 학고를 받아도 여름학기 보충수업을 들어도 수영을 못해도 나는 그 자체로 충분하다는 것을.
그리고 때가 되면 모든 것은 다 지나갈 것임을. 내 머리는 저 천재들을 따라가지 못할 거라며 자책하곤 했던 내가 4학년이 되어서는 학과 성적 우수 장학금을 받았고(대놓고 자랑하는 거 맞다.) 졸업이나 할 수 있을까 막막했던 그곳을 무사히 졸업했고, 이제는 더 이상 학교를 말하지 않아도 수영 실력이 좋지 않아도 나를 사랑하고 보듬어 주는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살아가고 있다. 까마득해 보이는 1500m처럼 시간은 흘러가고 대게는 나아지더라. 끝내 나아지지 못하고 끝나버리는 일들도 있다마는 그럼에도 대게는, 그러니 어떤 일이든 지나가더라.
“카이스트에서 수영했던 이야기”로 처음 이 글을 쓰고 싶었을 때 나는 한 달을 망설였다. 그때는 그때 나름대로 자신이 없어서 카이스트에 다닌다고 자신 있게 말하지 못했는데 졸업을 하고 사회인이 되고서는 또 너무 학벌주의 같아서 카이스트라고 말하지 못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애증의 카이스트. 에라이, 카이스트가 대체 뭔데!)
그럼에도 나는 우리 학교를 정말 사랑할 수밖에 없는데 그곳이 대단히 좋은 학교여서가 아니라, 내가 정말 반해버린 멋진 친구들이 있었고 많이 힘들었던 만큼 또 많이 행복했고 그래서 사랑할 수밖에 없는 나의 청춘이 가득 담긴 곳이라서. 그곳에서 보낸 5년이 뭉텅 사라진다고 상상해 보면, 지금의 나라는 사람은 어쩐지 조금 맹숭맹숭한 기분이 들 것 같다.
그래서 쓴다. 꿈과 책과 힘과 벽 사이를 오가며 눈치 보기에 바빴던, 불현듯 어른이 되어 하루하루 무서워하던 밤들을, 캠퍼스 너머에서 보기엔 모든 게 완벽해 보였던 그곳에서의 시간도 결코 완벽하지 못해 힘들고 처절했음을. 굳이 돌아가고 싶진 않지만 소중하고 그리운 마음을 가득 담아 그 봄의 우리를, 그 스물의 나의 이야기를 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