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궁아 눈치 챙겨
으앙, 저 터졌어요!
며칠 전부터 불안, 불안하던 게 결국 터져버렸다. 하필 훈련 시작 10분 전, 그것도 탈의실 화장실에서 그 사실을 발견하다니. 낭패였다. 급하게 뒤처리를 하고 탈의실로 뛰어들며 말했다.
반쯤 감긴 눈으로 수영복을 갈아입던 여자들이 나의 외침에 놀라 눈을 번쩍 떴다. 나른한 새벽의 여자 탈의실을 깨운 건 다름 아닌 나의 생리였다. 훈련 10분 전에 생리라니, 출국 하루 전에 코로나에 걸린 듯한 당황스러움이었다. 훈련 시작까지 7분 전. 여성 명의 여자들이 여자 탈의실에 앉아 머리를 맞댔다. 생리가 터진 마당에 수영이라니 “그냥 물에 안 들어가면 되는 거 아니야?” 싶지만 우리는 매일 훈련에 참여해야 하는 입장이었다.
“일단 옷 입고 들어가서 의자에 앉아 있자.”
“생리한다고 훈련부장한테 따로 문자라도 보낼까? 아니다, 회장한테 말해야 하나?”
“아니면 나 탐폰 있는데 그거라도 빌려줄까?”
당장에 현실 가능한 대안들이 나왔다. 건네받은 탐폰을 손에 들고 허겁지겁 화장실로 향했다. 난생처음 탐폰을 써보려니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난감했다. 몸에 이물질이 들어가는 것부터 탐탁지 않았다. 게다가 이걸 끼고 물에 들어가야 한다니. 무리하다 쇼크 오는 거 아니야? 덜컥 겁이 났다. 사이클처럼 속절없이 줄어드는 시간을 바라보며 내 마음도 덩달아 쪼그라들었다. 발을 동동 구르다 결국 포기를 선언하고 화장실을 나왔다.
신입생 선발 기간에 한 여자 선배에게 물어본 적이 있다.
언니, 훈련할 때 생리하면
보통 어떻게 해요?
언니는 마치, 이름을 말할 수 없는 자의 이름을 들은 양 주위를 살피며 말했다.
“양이 엄청 많은 날 아니면 그냥 훈련해. 물에 들어가면 수압 때문에 잠깐 생리가 멈추거든. 생리 때문에 달마다 사나흘씩 훈련 빠지려니 눈치 보이기도 하고. 양 적은 날엔 그냥 물에 들어가.”
우린 비밀 이야기를 하듯 소곤소곤 정보를 주고받았다. 수압으로 나오려던 피도 잠시 멈춘다니, 자궁도 눈치가 있는 모양이었다. 과학적으로 일리는 있어 보이지만 찝찝한 해법이긴 하다. 생리 중의 한창 예민한 몸에 염소 소독한 물이 썩 좋을 것 같진 않은데. 훈련 시 비상생리대응매뉴얼에 대한 얘기는 그때 선배에게 들은 게 다였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이제 막 시작해 양이 많지 않았고, 일단 분위기 봐서 훈련부장에게 얘기하자 생각하며 주섬주섬 수영복을 챙겨 입었다.
여느 때와 같이 출석 체크를 하고 체조를 시작했다. “물에 빨리 들어가서 수압으로 막아야 하는데…” 체조하는 10분 새 조바심이 났다. 조심조심 몸을 풀었고, 체조가 끝나고 사람들이 하나 둘 물속으로 뛰어드는 소란스러운 틈에 훈련부장에게 쭈뼛쭈뼛 다가갔다.
막상 훈련부장 얼굴을 보니 입이 안 떨어졌다. 보통 부상으로 인해 훈련에 빠질 경우 다 같이 모인 출석자리에서 직접 이야기한다. “어제 자전거를 타다 넘어져서 무릎이 크게 까졌는데 병원에서 하루 정도 물에 닿지 말라고 하네요. 육상훈련으로 대체하겠습니다. 죄송합니다.”라고 구체적인 사유와 대책, 그리고 사과를 하는 식이다. 육상훈련도 여의치 않은 상태이면 “몸살 기운이 너무 심해 오늘 훈련은 쉬고 참관하겠습니다. 죄송합니다.” 하고 훈련 참관의 양해를 구했다. (아무리 아파도 결석은 하지 않는다.) 다치거나 몸이 아프면 본인이 가장 속상할 상황이지만 어쨌거나 훈련에 참여하지 못할 정도로 컨디션 조절에 실패한 데에 대한 사과이자 힘든 훈련을 혼자만 빠지게 된 데에 대한 미안함을 공개적으로 전했다.
그렇다면 갑자기 생리가 터져 쉰다는 말은 어떤 어조로 전하는 게 좋을까? 가장 무난하게 “생리를 합니다. 오늘 훈련은 쉴게요.”라고 휴먼덤덤체로 말하는 게 좋을까, 아니면 “자궁이 눈치도 없이 갑자기 생리가 터져버렸네요. 죄송합니다. 앞으로 신경 쓰겠습니다. 오늘은 육상훈련으로 대체하겠습니다.”라고 대략난감 제발저림체로 바싹 몸을 낮춰 사과와 대안까지 제시해야 할까, 그것도 아니면 “저 생리 첫날이에요. 아휴, 코끼리가 밟고 지나가듯이 배가 아파요. 첫날 생리통이 얼마나 아픈지 모르시죠들? 오늘 육상 훈련이고 뭐고 기숙사 들어가서 쉴게요.”라고 초현실주의당당체로 말해야 할까. 나의 생리 소식을 담담함과 죄송함, 당당함 사이의 어떤 어조로 전해야 할지부터 난감했다.
게다가 내 생리를 모든 부원들이 알게 된다니. 당장 훈련부장에게 말을 전하는 것도 민망해 입이 떨어지지 않는데 이 사실을 공개 석상에서 전하는 일은 더더욱 난감했다. 그렇다고 별다른 얘기도 없이 사나흘을 물 밖에 앉아 있자니 어휴, 벌써부터 눈치가 보였다. 결국 이 모든 신경 쓰임을 가뿐히 뛰어넘는 방법은 그냥 물로 뛰어드는 것이었다. “나의 생리를 부원들에게 알리지 마라!” 식의 아무일없음체를 선택하고 “신에게는 아직 2m의 수압이 남아있습니다!”라는 선배의 말을 믿고 부디 수압이 내 자궁을 잘 디펜스 해주길 바라며 물속으로 뛰어들었다.
추앙받거나 무시받거나
올해 카이스트 남녀 입학생 성비는 약 8:2였다. 최근에 “공대 졸업자 4명 중 1명은 여성…. 처음으로 25% 넘었다.”라는 제목의 기사들이 줄줄이 쏟아지는 걸 보면 과거에 비해 공대의 여학생 비율이 늘긴 느는가 보다 싶지만, 솔직히 25%라는 비율이 기삿거리가 될 정도로 절대적으로 큰 숫자도 아니다. 당장의 졸업생 성비 속에 오랜 시간에 걸쳐 형성된 남성 중심의 분위기까지 담기지 않는 게 현실이다.
나는 여자이고 공대생이다. 여자가 공대에 다닌다고 하면 생각나는 단어가 있다. 바로 ‘공대 아름이’. 한 통신사 광고에서 과의 유일한 여자로 모든 남학생들에게 여신 대접을 받는 공대녀가 묘사된 적이 있다. 그 이후로 공대녀는 왕왕 남학생들 사이에서 추앙받고 대접받는 여왕벌의 이미지로 소비되곤 한다.
마치 모든 공대녀들이 CF 속 아름이기라도 한 듯 “(너의 절대적인 매력치에 비하여) 남학생들한테 인기 많겠다.”거나 “홍일점이라 이것저것 혜택을 받겠다.”라는 식의 차별적인 시선들이 은연중에 남아있었다. 글쎄.. 공대에서도 인기가 많은 건 꼭 여자여서가 아니라 그냥 그런 사람이어서 즉, 사바사에 케바케인 것 같은데 말이다. (마찬가지로 인기가 많은 남학생은 아무리 공대여도 인기가 많다.)
그런가 하면 전혀 다른 식의 차별적인 말들도 있다. “남자 애들이랑 경쟁하는 거 힘들겠다. 수학, 과학은 남자애들이 더 잘하지 않나?” 수학 과학 하는데 테스토스테론이 끼치는 영향력에 대한 논문이라도 본 걸까? 내 주변만 해도 과탑을 놓치지 않는 여자친구들이 얼마나 많은데 말이야! 게다가 보통 공대생 하면 머리는 똑똑하지만 사회성은 떨어지는 너드(nerd)로 희화화되곤 하는데 그 와중에 여자 너드는 어째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건 다행스러운 일인지 섭섭해야 할 일인지 모르겠다.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외모나 성적 매력으로 어필하고, 머리나 능력으로는 꿀릴 거라 생각하는 건 꼭 ‘공대’녀가 아니더라도 한국의 여성들을 바라보는 오래된 차별적인 시선이다. 결국 공대녀라는 소수자는 추앙받거나 무시받거나, 상황에 따라 입맛대로 해석되는 제3의 성이었다.
그런 공대에서 여자가 운동부에 든다는 건 희소한 존재를 넘어 원치 않게 희귀한 존재가 되는 일이다. 어쩌다 수영 동아리에 들게 되었느냐는 물음에 한 여자 선배는 술잔을 쾅 내려놓으며 말했다.
“사람들이랑 같이 운동하고 싶어서 운동 동아리를 찾아보는데, 다른 데서는 죄다 매니저만 뽑더라고? 축구부 매니저, 농구부 매니저, 야구부 매니저…. 아니 내가 매니저 하려면 경영 동아리를 들지, 왜 굳이 지들 매니징을 해? 여기는 그나마 여자도 똑같이 수영한다길래 왔지.”
남초 사회의 운동부에서 여자의 역할은 ‘운동하는 남자를 돕는 여자’가 대부분이다. 여자가 직접 축구를, 농구를 하고 싶어 할 것이란 생각은 대체 왜 하지 못하는가? 대학생 정도 되었으면 자기 케어는 자기 스스로 하면 되지 않는가? 그들이 원하는 여성 부원은 함께 필드를 누빌 귀한 동료가 아닌, 자신들의 플레이를 케어해 줄 귀한 엄마일 뿐이었다.
캠퍼스 운동장에서 여자들에게 할당된 공간이 그리 넓지 않았을뿐더러, 또 다른 회소한 여성들이 필요한 팀 스포츠보다 개인플레이가 가능한 수영은 그나마 사정이 나은 편이었다. 내가 ‘좋아하는 운동’을 골라서 하기보다 그저 내가 ‘할 수 있는 운동’을 고르는 편이 더 현실적이었다는 점에서 수영만을 바라보고 동아리를 찾았던 나는 그저 운이 좋은 케이스였다고 할 수 있다.
그나마 운 좋게 발견한 나의 작은 수영장에서도 미세하게 기울어진 시선을 피할 순 없었다.
2분기 훈련이 한창인 어느 금요일이었다.
“6시 40분까지 각자 웜업 하세요. 오늘은 기록 잽니다.”
기록이라고? 잠이 확 깼다.
기록회 때는 자유형 50m을 기본으로 재고 개인 영법을 하나씩 재곤 한다. 가장 실력이 좋은 1 레인의 남자 다섯이 레인 앞으로 나섰다. 보통 실력이 비슷한 사람들끼리 함께 기록을 쟀다. 1 레인답게 너도나도 크라우칭 스타트(Crouching Start) 자세를 잡았다.
“준비, 차렷, 삑-”
박수받는 자와 유제품 쏘는 자
출발 신호와 함께 다섯 명의 남자들이 하늘 높이 튀어 올랐다. 점프와 동시에 공중에서 한 번 더 용수철 튕기듯 튀어 오르는 모습이 마치 팔딱이는 고등어 같았다. 곧바로 두 손을 모으고, 불구덩이 루프 속으로 뛰어드는 서커스 사자와 같이 물속의 한 점을 향해 입수했다. 1초도 되지 않는 그 찰나의 순간에 솟아오르는 머리와 포물선을 그리며 하강하는 몸의 곡선은 언제 봐도 예술적이다. 스타트부터 입수와 돌핀킥, 스트로크까지 물 흐르듯 이어지는 1 레인 사람들의 헤엄을 넋을 놓고 바라보았다. 다섯 주자는 금세 턴을 하고 출발점으로 돌아와 벽을 탭 했다. 훈련부장이 들어온 순서대로 주르륵 기록을 불렀다.
“29초 87. 오~ 20초대!”
네 번째쯤 들어온 남자 선배가 포효했다. 그의 첫 20초대 기록이었다.
수영 기록은 보통 초 단위로 소수점 두 자리까지 잰다. 일반적으로 1초를 눈 깜짝할 새로 치부하지만 수영 시합에서 1초는 아주 긴 시간이다. 이 1초를 줄이기 위해 숨을 한 번 더 참고, 스타트를 바꿔가며 연습하고, 그러고도 1초가 줄지 않아 울고 웃는다. 같은 35초도 35’58과 35’02의 체감은 천지차이인데 대회에서도 보통 이 소수점 아래 숫자로 승패가 갈리곤 한다. (소수점 둘째 자리까지 정확히 기록이 같은 경우도 왕왕 있다.)
그만큼 초 단위로 돌아가는 싸움에서 앞자리가 3에서 2로 바뀌었다는 것은 개인사적으로나 동아리사적으로나 지극히 고무적인 일이다. 게다가 남자 부원들 사이에서 자 50m 20초대의 기록은 “수영 좀 한다”라는 인정을 받는 암묵적인 기준과 같았다.
20초대에 진입한 선배를 시작으로 오늘 기록회는 시작부터 분위기가 후끈 달아올랐다. 열정만수르들의 물 튀기는 자유형이 몇 번 이어지고 내 차례가 되었다. 나는 기록이 비슷한 소은이와 보통 함께 기록을 쟀다. 앞선 멋진 다이빙에 자극을 받은 나도 스타트대에 올라 기록회에서는 처음으로 크라우칭 스타트를 시도했다. 다행히 수경이 벗겨지거나 배치기 하는 일 없이 성공적으로 입수했다. 앞사람들을 보며 계속 이미지 트레이닝한 대로 버벅대는 부분 없이 다이빙부터 스트로크와 발차기까지 매끄럽게 이어졌다.
젖 먹던 힘까지 짜내 50m를 돌고 벽을 탭 했다. 내 기록은 39초 84. 신입생 선발 기간에 처음 쟀던 50m 기록이 45초 91이었던 걸 감안하면 무려 앞자리 숫자가 바뀐 엄청난 발전이었다. 6초라니, 6초를 한 번에 줄이다니. 정말 기뻤다. 그동안 뺑기 친 거에 비하면 깜짝 수영 퀴즈 선방했다! 한껏 뿌듯해하며 레인 밖으로 빠져나오는데 들리는 소리.
“최소은이 윤명해보다 빠르네.” 남자 동기가 말했고, “역시 소은이 에이스!” 남자 선배가 말했다.
누가 수영은 자기 자신과의 싸움이라고 했던가? 나의 수영은 항상 비교가 되었다. 해마다 어떤 여자부원이 수영을 잘하는지는 남자 부원들의 관전 포인트였다. 처음 신입부원 훈련을 시작했을 때부터 나는 에이스 소리를 들었다. 그건 소은이도 마찬가지였다.
에이스라는 말은 괴상하다. 이제 막 30초대에 진입한 우리의 기록이 20초대를 찍은 그들의 기록과 비교해서 대단한 것도 아니고, 신체적인 차이를 고려해 남자는 남자끼리 여자는 여자끼리 기록을 비교한다 해도 아마추어 여자 선수들의 기록에 비해 우리는 한참이나 느렸다. 그나마 우리 동아리를 대표할 여자 선수로서 최고로 빠른 사람을 치켜세운다 해도 그것은 무엇을 위한 칭찬인가? 듣는 사람 기분 좋으라고 에이스니 뭐니 하는 칭찬이었다면 그 또한 잘못된 전략이었는데, 그 말을 들을 때마다 나는 어쩐지 늘 마음이 좋지 않았다. 어느 날은 내가 더 못해서, 어느 날은 내가 더 잘해서 속상했고 눈치가 보였다. 친구랑 경쟁 붙이는 거 말고 “나의 경쟁자는 오직 지난 분기의 나뿐이다…” 뭐, 그런 멋짐은 대체 없는 거냐고. 동아리가 아닌 한 ‘팀’ 임을 강조하는 이곳에서 우리는 대체 언제부터, 왜, 원치 않는 그들의 에이스가 되었나? 차라리 제시처럼 “We are not a team, this is competition”이라고 솔직히 말하든가. 열심히 하고도 왠지 찝찝한 마음으로 레인을 빠져나와 숨을 골랐다.
자유형 50m 기록을 재고 이어서 영법 기록도 쟀다. 나는 주 종목인 배영 50m 기록을 재기로 했다. 배영 스타트는 잠영을 길게 뽑을수록 힘이 덜 들어 유리하다. 잠영 거리가 15m를 넘겨버리면 또 실격이라 딱 13, 14m 정도까지 최대한 적당히 길게 뽑는 게 중요한데, 내가 그걸 잘했다. 처음 배영 경기를 볼 때 잠영을 보고 반했었다. 모든 이들이 힘겹게 수면 위로 올라와 헤엄을 치고 있을 때 배영 잠영을 길게 하면 레인 중간에 뿅 하고 나타나 거기서부터 고고하게 헤엄을 친다. 실상은 잠영하는 동안 코로 물을 엄청나게 먹어가며 존버하는 거지만, 그렇게 최대치의 잠영을 뽑아냈을 때의 통쾌함에 취해 나는 배영 잠영에 공을 들였다. 오늘도 잠영을 쭉쭉하고 올라오는데 사람들이 손뼉을 쳤다.
와 배영 대박! 역시 에이스!
무시하거나 추앙하거나. 도대체 어느 장단에 맞춰야 할지 모르겠군. 오락가락했던 훈련이 끝나고 아침을 먹으러 학식 앞에 모였다.
가오리에는 자유형 50m 20초대 진입 시 유제품을 쏘는 문화가 있다. 동아리에 알음알음 내려오는 전통과도 같은 것인데 마의 20초대를 뚫은 기념으로 친히 사람들에게 대접할 기회를 주는 것이다. 덕분에 겸사겸사 신기록 자랑도 하고 나눔도 실천할 수 있는 멋진 문화였다.
공짜 유제품이라니 신이 나서 제일 비싼 우유 속에 딸기과즙을 고를까 모카치노를 고를까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는데, 한 남자 선배가 다가왔다.
“이야, 명해 오늘 소은이한테 졌지? 어떡하냐?”
모카치노를 선택하고 설레는 기분이 한순간에 잡쳤다. 다 고른 유제품에 재 뿌리는 이 오지랖은 뭐죠? 방긋 웃으며 말을 건네는 이 사회성 떨어지는 선배에게 한 마디 해주고 싶었다.
“당신, 오늘 내 크라우칭 스타트가 군더더기 없이 얼마나 깔끔했는지 봤어, 못 봤어? 내가 인생 첫 30초대에 진입한 역사적인 날에 유제품 골든벨을 울릴 기회는 또 왜 없어? 왜 같은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이 코딱지만 한 동아리의 에이스는 허구한 날 바뀌어서 환호하고 박수치고 난리야? 누가 손뼉 치고 칭찬해 달래? 응? 그리고 내가 오늘 당신보다 배영 빨랐던 거 알아 몰라?”
부다다다 쏘아붙이고 싶었지만 현실은 사회성 좋은 여자 신입생이 되어 헤헤 웃어넘기며, 텁텁해진 입을 게워 내기 위해 모카치노를 딸기과즙으로 바꿨다. 진심으로 묻고 싶었다. 당신들은 왜 그렇게 여자 부원들의 순위 매기기에 혈안인가? 왜 우리의 헤엄을 늘 서로 이기고 지는 프레임으로 바라보는가? 누군가는 그날 유제품을 쐈지만 누군가는 그저 그들의 인정과 환호를 받는 꽃 같은 아름이일 뿐이었다.
그날로 돌아간다면 레인을 박차고 나와
에이, 또 수영하는 꿈 꿨네.
나는 아직도 종종 그 스타트대 위에서의 꿈을 꾼다. 그때 그 수영장, 출발을 기다리는 너와 나. 우리를 지켜보는 시선에 둘러싸여 나는 열심히 헤엄치지만 늘 앞으로 나아가질 못한다. 자꾸만 물속으로 가라앉으려는 나와 그런 나는 아랑곳 않고 환호하고 또 야유하는 소리를 듣다 잠에서 깨는 날이면 그때 그날처럼 입이 텁텁해지는 기분이다.
수영을 좋아하는 털털한 여자 신입생. 그때의 나는 진짜 나였을까? 성인이 되어 처음 발을 디딘 사회에서 나는 분명한 소수자였고 나를 둘러싼 세상이 그저 정상인 줄 알고 그에 맞춰 이쁨 받으려 애썼다.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나서야 내가 경험했던 세상이 그저 정상적이지만은 않았던 것이었을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단 하루라도 그때로 돌아갈 수 있다면 나의 생리를 부끄러워하고 미안해할 것이 아니라, 그 환호 소리에 기뻐하고 슬퍼할 것이 아니라, 너를 이기려고 미워할 것이 아니라 다른 부당한 것들에 눈을 돌려 분노할 수 있을 텐데. 지나간 날들로 돌아갈 수 없음을 잘 알지만 꼭 하루, 그때로 돌아갈 수 있다면 나는 꼭 평범한 기록회 날로 돌아가서 수영을 하고 싶다.
요즘 잔뜩 벼르고 있다. 다음에 또 수영하는 꿈을 꾼다면 레인에서 벌떡 일어나 걸어 나와야지. 그리고 박수 친 사람들한테 가서 얘기해야지. 니가 뭔데 박수 치냐고, 네 수영이나 잘하라고. 아유, 속이 다 시원하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