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의실종을 대하는 수영인의 자세
3분. ‘여자 수영복’을 검색하고 결제 완료 창이 뜨기까지 딱 3분이 걸렸다. 봄 트렌치코트와 쉬폰 원피스가 캠퍼스를 점령하기 시작한 4월에 나는 기숙사에서 앉아 3분 카레 돌리듯 훈련용 수영복을 고르고 있었다. 두 달 전 수영복을 처음 살 때까지만 해도 예쁜 수영복을 고르기 위해 모델 실착 샷은 물론 고객 리뷰와 룸메이트의 조언까지 다각도로 따져보던 나였다. 그랬던 내가 불과 두 달 만에 마파람에 게눈 감추듯 거침없이 수영복을 결제하게 된 건 다 훈련 때문이다.
새내기 수영인 시절 내게는 수영복에 대한 확고한 취향과 미적 감각이란 것이 있었다. 비키니가 아닌 이상 실내용 원피스 수영복의 디자인이 다 거기서 거기인 것 같지만 자세히 보면 원피스 수영복에도 따져볼 게 많다. 이를테면 등이 우아하게 파인 U자형 백 스타일을 선호한다거나 어깨가 넓어 보이는 얇은 어깨 끈은 피하고 허리가 잘록해 보이게 세로로 라인이 들어가 있는 수영복을 찾는 식이다.
거기에 “자고로 패션리더라면 ‘Simple is the Best’ 아니겠어!”를 외치며 깔끔한 단색의 수영복을 골랐다. 그것은 정말 많은 디테일을 고려한, 3분 수영복에 비할 바 없는 24시간 냉장 숙성 시켜 만든 일본식 수제 카레와 같은 정성스러운 쇼핑이었다. 그렇게 심혈을 기울여 고른 수영복을 입고 훈련에 나간 날 친구들은 말했다.
뭐냐 이거,
미스코리아냐?
내 모든 조건을 만족하는 나의 첫 훈련용 수영복은 파란색 미스코리아 수영복이었다. 내 무의식 속에 그녀들의 태가 남아있던 걸까. 이 구역의 진선미라도 될 듯 그 파란색 수영복은 내 맘에 쏙 들었는데 딱 한 가지 안타깝게도 그리 튼튼하지는 못했다. 첫날의 쫀쫀함이 무색하게 훈련이 거듭될수록 수영복은 빠르게 해졌다. 다이빙을 자주 하다 보니 가슴팍의 arena 로고는 일부 떨어져 온몸으로 “a na(아놔)”하게 되었고 염소 소독된 물에 우레탄 코팅이 삭아 수영복 군데군데 보풀이 일어났다. 평생 곱게 물에 한번 안 닿을 수 있는 운명이었건만 어쩌다 진짜 수영하는 주인을 만난 미스 수영복이 고생이다. 결국 예쁘지만 튼튼하지는 않았던 그 수영복을 뒤로하고 나는 두 달 만에 새 수영복을 사게 된다.
두 번째 수영복을 사기 전 기숙사 침대에 모로 누워 곰곰이 따져보았다. 나에겐 어떤 수영복이 필요한가? 훈련을 하는데 수영복이 특별히 예쁠 필요는 없다. 물론 아름다움은 다다익선이라지만 무엇보다 가장 우선되는 기준은 수영과 훈련에 도움이 되느냐 하는 것이다. 물에 있는 시간이 늘어날수록 수영복을 입고 예뻐 보이는 것보다 수영을 잘하는 것이 중요했다. 수영복이 기록에 도움을 주면 더 좋겠지만 그것은 당장의 예산을 훌쩍 초과하는 일이니 차치하고, 일단은 훈련을 위해서라도 수영복이 금방 해지고 늘어나지 않는 것만도 감지덕지한 일이었다. 결론은 예쁘고 튼튼하지 않은 수영복보다는 적당히 예뻐도 오래 입을 수 있는 내구성 좋은 수영복이 필요했다.
그렇게 찾은 훈련용 수영복이 탄탄이다. 탄탄이 수영복은 내구성을 높이기 위해 특수원단으로 만들어졌다. 탄탄이라는 이름만 들으면 왠지 탄력 갑일 것 같지만 오히려 일반 수영복에 비해 신축성이 떨어지고 뻑뻑하다. 새 탄탄이를 입는 날이면 질긴 수영복에 몸을 껴 맞추느라 여간 고생스러운데 그만큼 원단 자체가 질기고 회복력이 좋아서 수영을 오래 한 사람들이 즐겨 찾는다. 하지만 브랜드 입장에서는 수영복 교체 주기가 길어지는 게 썩 반갑지는 않을 터. 그래서 탄탄이 수영복은 디자인도 많지 않고 출시되는 횟수도 적다. 덕분에 화려했던 나의 수영복 옵션은 한순간에 단출해졌지만 그에 굴할 쏘냐. 탄탄하기만 하다면 U자형도, 두꺼운 어깨 끈도, 허리라인도, 단색도 더 이상 중요하지 않았으니. 탄탄이와 함께 나의 수영복 쇼핑은 24시간 정통 카레에서 3분 카레 순한 맛이 되었다.
그런가 하면 탄탄이를 넘어 일부러 저항 수영복을 입고 훈련하는 이들도 있었다. 마치 육상 선수가 다리에 모래주머니를 차거나 히말라야 등반을 앞두고 배낭 가득 돌을 넣고 중량 훈련을 하듯 수영복으로 물의 저항을 일부러 크게 만드는 것이다. 훈련은 배로 힘들지만 실력을 키우기 위해 자발적으로 장애물을 만드는 사람들. 그렇게 지독하게 훈련을 하고 경기 때는 또 다른 비장의 수영복을 꺼낸다.
“헐 대박! 9부 삼? 얼마 주고 샀냐?”
“돈 좀 줬지. 간지 나지? 엄청 쫄려 가지고 입느라 고생했네. 나 이거 입고 오늘 20초대 찍는 거 아님?”
수영에 진심인 친구들은 여윳돈이 생기면 주식 대신 값비싼 수영복을 하나씩 사 두었다. 우리의 수영장에서는 특별히 예쁜 수영복보다도 기록을 0.1초 앞당겨줄 기능성 수영복들이 더 큰 관심을 받았다. 물의 저항을 최소화하기 위해 등 파임은 U자형보단 X자형으로, 팔과 다리의 운동성을 최대화하기 위해 가슴과 겨드랑이 사이 그리고 다리 부분은 최대한 많이 파인 것으로, 근육 수축을 위해 허벅지나 발목까지 덮는 5부, 9부 수영복 등 기록 단축을 위한 수영복은 예쁜 수영복만큼이나 종류도 많고 가격도 천차만별이다. 겉보기엔 반전신 쫄쫄이일 뿐인 새 9부 수영복을 입은 선배의 얼굴에서 일말의 부끄러움 대신 자신감과 기대감이 물씬 풍겼다. 주식과 달리 수영복은 소모품이지만 옷장 포트폴리오 안의 다종다양한 수영복 종목을 보는 것만으로도 새 수영복을 입은 수영인의 기분은 기록 떡상에 대한 기대로 반짝 상한가를 치곤했다.
하의실종을 대하는 수영인의 자세
수영인의 옷장에서 수영복만큼이나 공고한 지분을 가지고 있는 아이템이 있다. 바로 반팔 티셔츠들이다. 이 티셔츠로 말할 것 같으면 누구나 알 법한 브랜드 로고가 떡 하니 박혀 있는 값비싼 옷이라거나, 프린트가 취향 저격인 나머지 “어머 이건 사야 돼!”를 외치며 가격도 보지 않고 홀린 듯이 지른 영웅담이 있다거나, 원단이 특별히 두껍고 질이 좋아 이제 다른 옷은 안 사고 이걸로 몇 년은 입어야지 하는 감언이설로 자신을 속여가며 결제에 성공한 그런 옷들은 아니다. 그보다는 등판에 대문짝만 하게 적힌 “대전시 유성구청장기 수영대회” 문구 덕분에 입는 것만으로 유성구 홍보대사가 되어버리는, 왜 때문인지 주로 파랑 아니면 회색 계열의 단색에 가슴팍에는 시크하게 수영복 브랜드 로고 정도가 박힌, 급하게 대량 생산한 것이 짐작되는 아주 얇은 면 재질 또는 메쉬 소재의 기념품 티셔츠에 가깝다. 스치듯 안녕하며 옷장에서 언제 사라져도 모를 것 같은 이 티셔츠들은 비싸고 예쁜 티셔츠들도 신상에 하나 둘 자리를 내어주는 마당에 수년째 버젓이 옷장 한편을 차지하고 있다.
수영인들에게 이런 유의 티셔츠들은 그 쓰임이 아주 분명하다. 수영장에서 수영복 세트 다음으로 자주 찾는 옷이 있다면 바로 이 반팔 티셔츠가 아닐지. 기록회나 시합 때 보통 두세 개의 경기를 뛰는데 그 사이에 텀이 있다. 경기 때마다 수영복을 갈아입기 번거로우니 그냥 수영복 위에 티셔츠 한 장 걸치고 돌아다닌다. 그때 주로 입는 게 이 기념품 티셔츠들이다. 수영복 위에 대충 걸쳐 입기 편한 딱 그 정도의 가벼움과 소중함. 영리하게도 ‘수영장 안 레인 밖’이라는 니치 마켓을 공략한 덕분에 이 기념품 티셔츠들은 여전히 공고한 옷장 점유율을 차지할 수 있었다.
그런데 육지적 작가 시점에서 이 레인 밖 패션을 보자면 사실 티셔츠에 팬티만 입은 것과 같다. 육지에선 언젠가부터 ‘하의실종’이 하나의 패션이 되었다. 입은 듯 안 입은 듯 보일 듯 말 듯 꾸민 듯 안 꾸민 듯 멋스러운 하의실종 패션의 시초는 사실 수영계다. 수영인들의 하의로 말할 것 같으면 은근히 숨겨진 게 아니라 없다. 하의가, 정말로 없다. 이것은 3인칭 법률가 시점에서 봤을 때도 대중체육시설에서 살색의 면적이 과하다는 근거로 풍기문란과 공연음란죄로 기소되어도 이상할 것이 없을 법한 일이지만 수영계에서는 이러한 옷차림이 예부터 공공연한 것이었다. 아마 팬티 차림으로 수영장을 활보하는 수영인을 붙잡고 “왜 바지는 안 입으세요? 당최 부끄럽지 않으세요?” 하고 묻는다면 그는 마치 선악과를 따 먹기 전의 아담과 이브처럼 어리둥절해하며 “바지라뇨? 글쎄, 제가 뭘 부끄러워해야 하죠? (ㅇㅅaㅇ)” 하고 자신의 하의 없음에 대해 생각조차 해본 적 없다는 식의 소크라테스도 울고 갈 순수한 무지의 무지를 드러낼 것이다. 이쯤 되면 짐작할 테지만, 그렇다. 이곳은 수영복 하나로 패션의 마침표를 찍게 되는, 남녀노소 모두가 평등하게 아랫도리를 실종해버린 살색의 향연이자 팬티의 에덴동산이다.
수영장에 만연한 집단 하의실종을 보고 있자면 노출에 대한 수영인과 육지인의 감각은 확연히 다름을 느낀다. 혹자에게는 수영복 자체가 이미 선정적으로 느껴질 수 있지만 수영인에게는 수영복을 입었다면 그 외에는 아무리 살색이 넓게 보여도 크게 야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아마 수영복을 엄연한 운동 장비로, 우리의 몸을 기능하는 도구로 여겨서 그럴 것이다. 덕분에 다시 입수할 때도 어디서든 입고 있던 티셔츠를 훌렁 벗어던지고 물에 뛰어드는데 쉽게 말해 우린 막역하게 같이 옷 벗는 사이가 된다. 같이 옷 벗는 사이라니, 사회에선 통용되지 않는 일이라 더욱 그런지 어디서든 훌렁훌렁 옷을 벗는 이 자유로움이 나는 늘 든든하고 통쾌했다.
노출만큼이나 아름다움에 대한 기준도 다르다. 우선 당신의 머리가 길든 짧든 생머리든 파마머리든 앞머리가 있든 없든 상관없이 수영장에서 우리의 머리는 모두 수모로 덮인다. 수모를 쓰면 당최 머리빨이라는 것은 받을 수 없게 되는데 그 수모 한 장으로 우리는 한순간에 거짓 없는 두상과 민낯을 내보이게 된다. 그리고 오래 쓰면 눈 주위에 동그랗게 자국이 남는 수경까지. 수영계에서 멋을 부린다는 게 고작 수영복 디자인 정도가 최고 사치일 정도로 수모며 수경, 맨 얼굴에 쫄쫄이까지 도무지 어느 하나 쉽게 멋부리기 힘든 환경이다. 어쩌면 수영장에선 그 어떤 꾸밈도 불가능하다는 걸 경험적으로 알기에, 깊은 산골의 서비스 불가 지역에서 본의 아니게 디지털 디톡스를 하게 되었을 때 차라리 후련한 마음이 드는 것처럼 꾸밈 노동에 지친 우리에게 탈코르셋이 불가피한 수영장은 더 반갑고 숨통이 트이는 곳인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사회적인 아름다움을 내려놓은 자리에서 새롭게 발견한 아름다움도 있다. 수영복 너머의 아름다움으로 나를 초대한 이가 있었으니, 나의 새파란 미스 수영복만큼이나 새빨간 삼각 수영복을 입고 나타난 윤수 오빠였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