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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명하이 Oct 16. 2023

네, 팔은 장식이고요.

발수영의 최후


팔은 장식이냐?
이거 완전 발수영이네.

  날카로운 지적이 오늘도 수모 위로 내리 꽂힌다. 요며칠, 냉혹한 훈련부장의 눈길이 멈춘 곳이 있었으니 바로 ‘발’이었다.


  보통 조악한 실력의 무언가를 낮잡아 표현할 때 발을 갖다 붙인다. '발로 만든 영상'이라든가 “내가 발로 해도 그것보단 낫겠다.” 혹은 ‘발연기’와 같이 접두사로 쓰이며 아예 새로운 분야를 만들기도 한다. 그런 발이 수영에까지 붙어 훈련부장은 며칠째 ‘발수영’을 신랄하게 지적하고 있다. 그렇다면 여기서 발수영은 아주 형편없는 수영실력을 의미하는가? 저 발수영은 정말이지 ‘발(足)로 하는 수영'을 의미한다.  



이 구역의 발수영은 나야 나

 

  보통 헤엄을 칠 때 앞으로 나아가는 추진력은 팔로 물을 잡는 스트로크(Stroke)와, 발차기(kick)에서 비롯된다. 평균적으로 스트로크가 초당 1.2m씩 추진한다면 다리는 0.6m 정도 추진할 수 있다고 한다. 그럼 팔도 휘젓고 발도 차면 초당 1.8m를 나아갈 수 있느냐 하면 꼭 그렇지는 않다. 격렬하게 발을 찰수록 그만큼 더 큰 저항을 만든다. 게다가 발차기는 스트로크의 4배의 산소를 소모하는 등 추진력만 놓고 보자면 그리 효율적이지 못한 것이다.

  그렇다면 헤엄을 치는 데 발은 전혀 중요하지 않은 것인가? 발차기는 몸의 전체적인 밸런스나 스트로크 할 때의 롤링(rolling)과 적절하게 연결됐을 때 좀 더 강력한 추진력이 되어 준다. 엉덩이의 구동력을 통해 몸의 리드미컬한 추동력에 플러스알파와 같은 힘을 준 달까? 그런 점에서 단거리 경기나 상체 동작에서 나오는 역량이 이미 최대치인 사람, 그러니까 단거리 선수들 같은 경우에는 발차기에서 승부가 결정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발차기는 에너지 소모가 큰 만큼 프로 선수의 경우 보통 스트로크 70%, 발차기 30%로 비중을 둔다고. 초보자는 그런 비율을 따질 여유가 없는 만큼 전적으로 스트로크에 의존해 나아간다.


  4살 때부터 수영을 시작해 초등학생 때까지 선수 생활을 했다는 훈련부장은 유난히 스트로크를 자주 뽐냈다. 지는 걸 참 싫어하는 사람이 내기는 또 엄청 좋아했는데 그가 자주 하던 내기가 스트로크 시합이었다. 한창 수영에 열을 올리는 후배가 보이면 그는 이런 식으로 내기를 걸었다.


  “야, 우리 자유형 50m 내기할래? 나는 다리에 킥 판 끼고 스트로크만 하고, 너는 그냥 자유형 하고. 진 사람이 술 사기, 콜?”

  “아 형, 킥 판 끼고 하는 거면 당연히 제가 이기죠~”

  안돼,, 이건 덫이야! 매혹적인 끈끈이를 펼쳐 두고 순진한 나비가 앉길 기다리는 식충식물의 계략이 느껴졌다. 분명 플랜 B에 C, D까지 생각해 두고 자신이 질 내기는 시작하지도 않을 그였지만 암만 그래도 ‘스트로크 vs 그냥 자유형’이라면 그래도 제법 승산이 있지 않을까 싶어 매번 흥미진진하게 시합을 구경하곤 했다. 그렇지만 아니나 다를까, 킥 판으로 두 다리를 단단히 묶어 두고도 그는 스트로크만으로도 보란 듯이 자유형을 이겨버렸다. 어쩌면 그는 자유형에서 발차기까지 하는 것이 스트로크만 하는 것과 실상은 그렇게 큰 차이가 없다는 점을 알고 내기를 걸었을지 모른다. 어쨌거나 팔 젓기만으로도 유유히 자유형을 이겨버리는 훈련부장을 보고 우리는 혀를 내둘렀다.


  그렇게 발은 연기나 시합은 물론 아주 보통의 자유형에 있어서도 큰 역할을 하지 못하는 천덕꾸러기 같은 존재였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발로만 수영을 하는 이가 있었으니, 그게 바로 나다.

어느 날 킥(kick) 훈련을 한다며 훈련부장이 킥 판을 하나씩 나눠주었다.

  “발차기 50m 사이클 할 거예요. 1 레인은 50초, 2 레인은 1분 20초, 3,4 레인은 1분 30초, 5 레인은 1분 40초 네 개입니다. 다음 60초 정각에 출발하세요. 한 명이라도 사이클 못 맞추면 한 세트 더 할 거예요.”

  가오리에는 대대로 내려오는 훈련용 초침 시계가 있다. ‘미노리’의 거대한 초침은 40초 후 출발을 가리키고 있었다. 나는 “1분 30초짜리 4개니까 늦어도 1분 20초 안으로 들어와서 10초는 쉬고 나가야지. 뒤로 갈수록 쳐지니까 처음 두 개는 1분 10초에 최대한 맞춰봐야겠다.” 하고 알뜰살뜰 체력 분배까지 고려해 나름의 작전을 세웠다. 출발 10초 전, 일제히 시계를 바라보는 형광 주황색 뒤통수들. 나와 사이클만 남은 수영장에서 모두 비장하게 숨을 골랐다. 새빨간 초침은 한시의 멈춤 없이 착실히 흘러갔고 초침이 정확히 북쪽을 가리키는 순간, 각 레인의 1번 주자들이 킥 판을 잡고 출발했다.


  “창창창창-“

  대차게 발차는 소리가 수영장에 울려 퍼졌다. “앞사람 출발 후 5초 뒤 출발”이라는 말이 무색하게 앞사람과 사이가 벌어지지나 않을까 다들 1, 2초 정도 일찍 출발했다. 역시 나만 긴장한 게 아니었군. 다들 사이클 못 맞출까 잔뜩 쫄아 있었어!! 3 레인의 네 번째에서 순서를 기다리던 나도 초침이 3에 가 닿기도 전에 서둘러 출발했다. 다행히 발차기는 머리를 물에 처박지 않고 가다 보니 앞사람 뒤통수가 훤히 보여 거리 조절하기도 편하다. “저 뒤통수만 놓치지 말고 가야지.” 생각하며 열심히 발을 굴렸다.


  근데 웬걸, 너무 일찍 출발한 건지 발차기 몇 번에 앞사람 발끝에 다다랐다. 뒷사람에게 발이 치이면 마음이 얼마나 조급하고 민망해지는지 잘 알기에 속도를 낮춰 슬렁슬렁 킥을 찼다. 앞사람의 발차기 물보라를 피해 얼굴을 옆으로 돌렸다. 그렇게 세 바퀴쯤 돌았을까, 이제 슬슬 발이 지친다 싶을 때쯤 훈련부장이 말했다.

  “야, 윤명해! 왜 자꾸 2 레인만 쳐다보냐? 뺑기 치지 말고 2 레인으로 올라가.”

  “네? 뺑기 아닌데… 물먹을까 봐….”

  갑작스러운 승진에 기쁠 새도 없이 어버버, 하다가 출발 20초 전이라 일단 2 레인으로 후다닥 이동했다. 그렇게 얼떨결에 2 레인 끄트머리에서 발차기를 했고, 오늘따라 유독 내 발만 쳐다보는 것 같은 훈련부장의 매의 눈에 걸려 몇 번의 교통정리 후 나는 어느새 2 레인 1번 주자가 되어 있었다.


  “똑같이 한 세트 더 할게요. 1번으로 출발하는 사람들, 출발 시간 잘 맞추세요.”

처음 서 보는 1번 자리는 생각보다 신경 쓸게 많았다. 앞사람 출발 후 5초만 신경 쓰면 되는 뒤 주자들과 달리 1번은 매 바퀴마다 정확한 시간에 맞춰 출발해야 한다. 게다가 시간에 딱 맞춰 들어와 버리면 그 뒤로 줄줄이 휴식 시간 없이 출발하게 돼 버리니 적당히 일찍 들어와 휴식시간을 만들어주는 레인별 페이스메이커이기도 했다. 내가 아직 그럴 여유까진 없을 것 같아 슬쩍 뒤를 돌아 2번 주자에게 물었다.

  “나랑 자리 바꿀래?”

  질문이 끝나기도 전에 단칼에 거절당했고, 이 자리를 기꺼이 넘겨받을 사람은 여기 수영장에 아무도 없다는 걸 깨닫고 잔말 말고 출발 시간이나 계산해 보았다. 2 레인은 1분 20초니까 정각에 출발해서 그다음 바퀴는 20초, 40초, 그리고 또 정각에 출발. 계산까지 단단히 하고 출발을 기다리는데 이제 앞에 아무도 없다 생각하니 문득 욕심이 났다. 1번 주자는 다섯 개 레인이 함께 출발하니 다른 레인 1 번들과 비교해 내 발차기가 얼마나 빠른지 비교할 수 있다. 다음에 또 무슨 훈련이 튀어나올지 모르니 힘을 조금씩은 아껴 두는 식으로 뺑기 아닌 뺑기를 치곤 했는데 어쩐지 이번엔 앞뒤 안 재고 최선을 다해보고 싶었다. 그렇게 출발 10초 전, 체력 안배는 잠시 넣어두고 최선을 다해보자 마음을 고쳐먹었다.


  초침이 또 한 번 60초 정각에 닿는 순간 1번 주자들이 일제히 벽을 차고 출발했다. 발차기의 매력이라면 상체와 하체가 따로 노는 언밸런스함에 있다. 킥 훈련을 할 때는 상체가 뒤뚱뒤뚱 흔들리지 않게 딱 고정하고 그야말로 발만 열심히 차야 한다. 수면 아래 분주히 발을 움직이는 백조의 치열함도 느껴지지만, 동시에 그런 열심은 티 내지 않고 아주 고고하게 앞으로 나아가는 상체를 보고 있으면 마치 공부 하나도 안 했는데 백 점 맞았다는 귀여운 얌체 같은 것도 느껴진다. 발차기의 그런 반전 매력을 생각하며 쭉 뻗은 수면을 향해 발을 굴렸다. 이번에는 정말 앞뒤 재지 않고 앞사람 눈치 보지도 않고 최선을 다했다. 그랬더니 웬걸, 1 레인 1번 주자 못지않게 빨리 들어온 게 아닌가!

  

  그렇다.
나는 발차기에 소질이 있었던 것이다!


 “오~ 윤명해, 발차기 잘한다? 다음엔 1 레인 가야겠네.”

  앞사람 페이스에 맞추지 않고, 다음 훈련 각 재지 않고 있는 힘껏 발을 차니 내 킥은 생각보다 빨랐다. 게다가 고양이 같은 훈련부장의 육성으로 들은 첫 칭찬이었고, 그게 또 그렇게 신이 났다. 칭찬은 뺑기도 발 차게 하는 법. 선배들도 잘해줄 테니 1 레인으로 넘어오라며 제안했고(1 레인은 이전 훈련부장들과 20초대 기록자들이 있는 어나더 레인이다.) 잔뜩 신이 난 나는 지친 줄도 모르고 신명 나게 발차기를 했다. 그렇게 행복했던 4바퀴가 끝이 나고 훈련부장이 말했다.

“자, 이제 킥 판 다리에 끼우고 스트로크 할 거예요.”

 


나의 팔과 다리는 오늘도 레인을 넘나들지

 

  어디 한번 팔 젓기도 뽐내 볼까? 호기롭게 다리 사이에 킥 판을 끼우고 다음 출발을 기다렸다. 그런데 또 웬걸. 출발하고 10초는 되었을까, 툭툭 뒤에서 발을 처댔다. “뭐야, 왜 이렇게 일찍 출발함..?” 당황스러운 마음에 속으로 툴툴댔지만 발이 차이니까 또 금세 조급해지기 시작했다. 마음이 조급해지니 괜히 팔만 더 자주 휘저어 대고, 팔을 빨리 돌리려니 한번 밀 때 물을 끝까지 밀지 못하고, 그나마 잡은 물은 손가락 사이로 우수수 빠져나가고, 그럴수록 허공에서 리커버리 동작만 요란하게 해 대는 꼴이 그야말로 총체적 허우적이었다. 소심한 나와 달리 신나게 발을 처대는 뒷사람과 냉큼 순서를 바꿔주고 싶었지만 레인 중간에서 멈출 수도 없고 그렇다고 빨리 가줄 수도 없는 난감한 상황이었다. 어쩔 수 있나, 그렇게 정체된 채로 50m를 돌았고 우리 레인은 첫 주자의 페이스에 말려 첫 바퀴부터 사이클을 못 맞췄다.


  “너 스트로크는 왜 이렇게 못해? 팔은 장식이냐?”

  그러게요. 저도 몰랐어요.. 나에게는 애초에 팔 근육이라는 것이 없었고 발만 믿고 날뛰던 자, 그 발이 묶이자 바로 고꾸라졌다. 인생지사 새옹지마라더니. 1 레인의 스카우트 제안을 받던 나는 한 사람, 한 사람 앞으로 보내고도 느려서 결국 4 레인 끄트머리까지 주르륵 좌천되었다. 아아- 스트로크를 못해 슬픈 짐승이여- 그날 이후로도 나는 킥을 할 때면 1 레인을, 스트로크를 할 때면 4 레인을 오가며 극명한 우등생과 열등생 사이를 오락가락한다. 아아- 잡힐 듯 잡히지 않는 헤엄이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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