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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명하이 Oct 17. 2023

훈련부장과 공포의 사이클

데스노트에 적힌 오늘의 죽음은


  거친 숨을 고르며 초침만 노려보고 있었다. 어쩌면 다음 사이클에서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레인별로 선배들이 붙어 자세를 봐주던 호시절은 끝이 났다. 이제 실력을 화끈하게 업그레이드할 시간. 2분기부턴 훈련부장이 등판했다.  


  그를 처음 봤을 때 나는 살짝 쫄았다. 훈련부장은 다부지게 각진 얼굴에 앙다문 입술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포커페이스를 가진 동아리 2년 차 선배였다. 해맑은 회장과는 대조적인 인물이었다대게 생글생글 웃거나 무표정일 때도 딴생각이라곤 안 하는 게 확실해 보이는 회장은 요즘 그 노래 좋던데오빠 그 춤 좀 춰줘요.” 부탁하면 학식 앞에서라도 걸그룹 춤을 선보일 인물이었다잔망스러운 회장에 비해 훈련부장은 좀체 흐트러진 모습을 보여주지 않는 자존심 센 고양이 같았다어딘가 꿍꿍이가 있어 보이는 훈련부장. 포커페이스에 가려진 속내가 의뭉스러웠다

   그도 그럴 것이 올해 훈련부장성근 오빠로 말할 것 같으면 지금까지 내가 만난 사람 중에 가장 논리적이고 말을 잘하는 사람이다동아리 회의에서 민감한 문제를 논의할 때마다 그는 화려한 언변으로 여론을 장악했다의견 1에 근거 1, 2, 3은 물론 백업 의견 1’와 근거 1’, 2’, 3’, 예상 반대 의견에 대한 반박 의견 1과 반박 근거 1, 2, 3, 그리고 정반합을 아우르는 최종 의견 1과 시행계획 1, 2, 3까지, “네가 뭘 좋아할지 몰라서 (내가 좋아하는 걸로다 준비했어마음껏 골라봐” 하는 철저함어느 의견이 채택돼도 원래 그가 짜놓은 판대로 흘러가는 것 같은 꺼림칙한 느낌MBTI로 치자면 아마 S T 부문 만점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빈틈없는 논리와 말문을 턱 막히게 하는 언변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것 같은 이성의 소유자였다

 

  훈련부장은 레인 밖에 앉아 훈련을 지시했다대게 구체적이고 개별적인 지시였다.

  “다음은 자유형 100m 사이클이에요. 1 레인은 1분 40초 여섯 개, 2 레인은 1분 50초 일곱 개, 3 레인은 2분 일곱 개, 4 레인은 2분 10초 여섯 개. 60초 정각에 출발할게요앞사람 출발하고 5초 뒤에 다음 사람 출발하세요.”

  군더더기라곤 없는 태연한 지시에 멋모르는 신입부원들은 그러려니 하고 일단 돈다일단 최선을 다해 돌다 보면 이러다간 숨이 꼴딱 넘어가겠다.” 싶을 때쯤 절묘하게 한 세트가 끝나고 아니이런 걸 시켰단 말이야미친..!”하고 감탄할 새도 없이 또 다음 인터벌다음 스프린트다음 드릴이 착착 이어지는 식이었다그는 교묘하게 사람을 굴리는 신통방통한 재주가 있었다


  그에게는 ‘훈련 노트라는 것이 있었다.  노트 말할  같으면 귀염뽀짝한 하트들과 “Happiness is…”라는 다소 아이러니한 제목이 붙은 아래로 해석하자면 “행복은 용들이 성문을 지키는 요정 세상의 궁전과 같다…. 그것을 정복하기 위해 우리는 싸워야 한다..⭐️라는천천히 음미해 보면 훈련 일지임을 짐작 하는 문구가  노트대체  데스노트아니 훈련 노트에는 뭐가 써져 있을까? “오늘의 주검xx, xx, xx, xx” 이런  아니야? 정신없이 헤엄치는 훈련 부원들과 달리 그가 하는 일이라곤 의자에 앉아 훈련 일지에 적힌 프로그램을 태연하게 불러주는 게 다인 것 같지만 사실 훈련부장은 매의 눈으로 부원들의 일거수일투족을 관찰했다

 

  새벽의 수영장엔
시키는 놈과 따르는 놈, 
그리고 뺑끼 치는 놈이 있다. 


  뺑끼란 힘든 훈련으로 혼란한 틈을 타 요령을 피우는 자잘한 수작들을 의미한다. 1:25의 비율쯤 되면 물 밑의 작은 수작 하나하나는 캐치하기 어려울 성싶은데도 훈련부장 1인분의 시선은 늘 매섭게 뺑끼를 잡아냈다

  “xx, 앞사람 발 치지 말고 둘이 순서 바꿔.”는 기본이고 xx, 하나도 안 힘들어 보이는데? 2 레인으로 올라가.”라고 깜짝 승진을 시켜준다거나(겸손한 우리는 대게 승진을 원하지 않았다.), 스트로크 수에 맞춰 호흡수를 제한하는 저산소(Hyposic) 트레이닝에서 xx, 숨 한 번 더 쉬는 거 봤어숨 쉬지 마세요.”라고 숨 막히게 지적하는 식으로 부원들 간의 교통정리와 컨디션 체크는 물론 숨소리까지 훤히 내려다보고 지적했다


  발수영인 나는 팔이 장식이라 슬펐지만 누군가는 발차기를누군가는 다이빙을누군가는 턴 때문에 울고 웃었다못하는 것도 서러운데 대차게 주는 면박도 그렇게 서운했다오죽하면 새벽 훈련이 끝나고 교내 셔틀버스에서 가오리 신입 아무개가 우는 걸 훈련부장의 룸메이트가 보고 적당히 좀 하라며 훈련부장을 말릴 정도였다그렇게 저마다의 슬픔을 안고 우리는 각종 사이클을 헤쳐 나갔는데 그런 우리 모두가 초주검이 되었던 날이 있었으니다름 아닌 첫 단체 기합이었다

 

  며칠 전부터 조마조마했다레인에 매달려 다음 출발을 기다리고 있자면 어디서 알싸~한 냄새가 풍겼다. “어휴누가 또 술 마셨어?” 들숨날숨 사이로 은은하게 퍼지는 알코올 향기그 시절 우리는 종종 음주 수영을 했다주로 다음날 훈련이 없는 화요일 밤에 술을 먹었다빌어먹을 훈련피도 눈물도 없는 훈련부장 욕을 하면서 술잔을 부딪치던 나날이었다. 그러다 조금씩 훈련이 익숙해지면서 여차하면 에라 모르겠다일단 마시고 밤을 새워서 새벽 훈련에 나갔다그렇게 몇 번술 냄새가 저 위의 훈련부장 코에까지 전해졌고 훈련 분위기가 해이해졌다며 그가 잔뜩 벼르고 있단 소리를 들었다


  그날은 동그랗게 모여 출석 체크를 하는데 어쩐지 머리가 둘이나 비었다그런 적은 처음이었다음주 수영을 할지 언정 꾸역꾸역 수영장에 나오던 사람들이었는데 말이다선배들의 얼굴이 굳었고 회장이 탈의실을 오가며 전화를 거느라 바빴다지각결석을 막기 위해 서로 전화로 깨워주고 같은 기숙사에 사는 사람들끼리 만나 함께 훈련을 나오곤 했는데 이날 빠진 건 하필 동행하던 둘이었다둘 다 술을 먹고 뻗어버린 것이다원래 혼나기 전이 제일 긴장되는 법흉흉한 분위기 속에서 우선 체조를 시작했다착 가라앉은 체조 구령이 차가운 수영장에 울려 퍼졌다결국 체조가 끝날 10분 동안에도 둘은 나타나지 않았고 시종일관 침묵을 유지하던 훈련부장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들어가세요.

  그렇게 시작된 첫 단체 기합잠영 사이클이었다결석자들이 올 때까지 돈다고 했다. 25m를 맨발로 잠영해 가서 레인의 마지막 사람이 도착하면 다시 출발하는 식이었다중간에 누구 하나 머리가 떠오르면 단체로 한 바퀴 추가되는 고통 배가식 시스템이었다나 하나 힘들고 말면 되는 개인 기합보다도 나 때문에 다른 사람한테 폐 끼칠지 모른다는 점에서 마음이 더 힘든아주 교묘한 기합이었다그렇게 호루라기가 울리고 우리의 잠수는 시작되었다.


  사이클그것도 잠영 사이클을 하는 기분은 대체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인간에게 숨을 거둔다는 건 단순히 몸이 힘든 문제를 떠나 아주 두려운 일이다우리는 최대한의 숨을 그러모아 물속으로 들어갔다수영 자체가 기본적으로 그러하지만 특히 잠영은 앞으로 나아가는 데 드는 불필요한 에너지를 최소화하는 것이 중요하다그러려면 몸의 저항과 함께 마음의 동요도 최소화해야 한다마음이 어지러울수록 호흡이 더 급해지기 때문이다잠영을 잘하려면 기본적으로 몸이 릴랙스 되어 있어야 한다는 점에서 실은 멘털 싸움이라고 할 수 있겠다그런데 잠영이 사이클이 되는 순간 마음가짐이고 뭐고 물 밖에서부터 호흡이 가빠진다거기에 중간에 누구 올라왔어요한 바퀴 추가라는 말이라도 들을라 치면 도무지 물속에서 태연해질 수가 없는 것이다.

  그렇게 벌써 대여섯 바퀴 돌았을 때였나내 앞에서 1번 주자로 출발하던 열아홉 막내 소은이와 눈이 마주쳤다순간내가 잘못 본 건가 싶었다


소은아, 너.. 
왜 수경에 물이…

 


눈물의 뺑뺑이는 내 마음속에 남아 

 

  “삐익-”

  말을 채 끝맺지 못한 채 호루라기 소리가 울렸고 1번 주자들이 출발했다잠깐만내가 본 그게 뭐였지왜 수경 안이 찰랑거려..? 안에서 새는 수경 으로는 안 샌다고눈물로 찰랑이는 수경을 고쳐 쓸 새도 없이 출발한 소은이를 보고 문득 우리 처지가 너무 슬펐다그렇게 나 또한 촉촉해진 눈가를 닦으려는 찰나 다시 한번 삑-. 도무지 애잔할 틈을 안 주네…. 욕을 하면서도 내 몸은 기어코  자동반사로 수영장 벽을 차고 다시 수면 아래로 향했다

  또 한 바퀴아찔한 50m가 끝나고 여전히 찰랑이는 수경을 쓴 소은이가 이번엔 슬금슬금 뒤로 갔다

  “아니,, 여기서 뒤로 가버리면,,” 

  “-” 

  사이클을 돌 때 1번 주자와 마지막 주자의 거리는 분명 다르다. 1번 주자는 이쪽 벽을 차고 나가 저쪽 벽을 탭 하기까지 벽 to 얄짤 없이 25m를 간다하지만 뒤 주자로 갈수록 앞사람들이 줄줄이 서 있으니 벽까지 탭 할 필요 없이 그 앞에서 멈추면 되는데 마지막 주자는 벽에서 2-3m나 일찍 멈추는 것이다. 2m쯤이야 별것 아니지 싶지만 사이클에서 2m는 티끌 모아 태산이고 그동안 숨을 몇 번은 더 쉴 수 있다그래서 마지막 주자만이 누릴 수 있는 이 느긋한 피니시 라인을 두고 우리는 최대한 뒤로 가려고 했다그렇게 갑자기 앞이 비어 버린 나는 예상보다 5초 먼저 출발했고 이 끔찍한 사이클의 구덩이에 진절머리를 내면서도 다시 한번 물속으로 깊은 잠영을 시작했다.  

  눈물의 뺑뺑이를 돌던 그날을 떠올리면 나는 문득 궁금해진다그 시절 우리는 왜 그토록 훈련에 열심이었을까? 수영이 좋았고 더 잘하고 싶었고무엇보다도 다들 열심히 하는 분위기에 폐가 되지 않으려 덩달아 열심에 열심을 더했던 것 같다그럼에도 몇몇 장면들을 떠올리면 분명, “그렇게까지 할 일이었나?” 싶은 생각을 떨칠 수 없다. “누구를 위하여 호루라기는 울리나?” 외치며 전쟁 같은 사이클은 이제 그만 좀 돌자며 건의할 수도 있었고 “잠영으로 이렇게 뺑뺑이 돌리는  대체 훈련이냐고요!!” 외치며 레인 한가운데 벌떡 멈춰 설 수도 있었다그럼에도 그 누구도 그 모든 훈련이 과하다고 말하지 못할 정도로 우리 스스로가 치열함이라는 집단적인 무의식을 공유하고 있었는데 그토록 광기 어린 헤엄에 대해서만큼은 단순히 열정으로 치부하기엔 분명 조금 과했다


  오랜 시간이 흘러 내가 바라본 그 마음들은 결국 불안이었다. 스무 살의 나는 끊임없이 불안해했다쉬는 시간을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을게으르게 시간 보내는 것을그 시간들이 쌓여 결국 뒷사람에게 발이 차이고 순서가 밀려날까 두려워했다바쁨을 자랑하는 사람들을 종종 본다자신이 얼마나 많은 일을 하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만나는지 나열하기에 바쁜 사람들그 사람들을 보고 있자면 일기장 가득 빼곡한 불안과 해야 할 일들을 털어놓던 스무 살의 내가 떠오른다정신 못 차릴 정도로 계속 사이클을 돌고 끊임없이 운동을공부를술을 마시던 나날들결국 나를 그토록 정신없이 굴렸던 건 훈련부장이 아니라 멈추는 게 두려웠던 내 마음이었다어쩌면 훈련부장보다 더 지독하게 나를 재촉하던 나의, 우리 마음속 각자의 훈련부장


  그나저나 그 훈련 노트에는 대체 무엇이 적혀 있었을까? 오랜 시간이 지나서야 성근 오빠에게 그 노트에 대해 물었고그렇게 보게 된 데스노트엔 아니나 다를까 신입생, OB 할 것 없이 훈련에 참여한 모든 이들의 이름이 빼곡히 적혀 있었그 옆으로 매일의 훈련 일지와 개인별 기록, 그날그날의 이슈들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었다그리고 내 이름 아래로 달려 있는 짧은 코멘트

 

  “… 윤명해: 자 50m, 40”23 -> 36”93. 수영을 좋아하고 운동도 좋아한다. 수영을 굉장히 진하게 하는 스타일. 특히 kick이 아주 좋다.”

  한   모든 훈련 부원들에 대해 손글씨로 꾹꾹 눌러쓴 피드백을 보고 나는 적잖이 우리의 주적피도 눈물도 없는 훈련부장이라고 얼마나 욕을 하고 또 그 분노를 연료 삼아 수영했었는데. 이렇게 모든 사람을 관찰하고 기록하고 있을 줄이야판도라의 상자를 열어버린 기분이었다. 

언제였던가, 그가 지나가는 말로 그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윤명해, 얘 일 잘해. 일머리가 있어.


  이제는 어엿한 사회인이 된 나는 아주 가끔, 버거운 일을 마주할 때마다  말을 가만히 떠올려본다. 내 눈에 그렇게 똑똑하고 똑 부러지게 일을 하던 사람이 나한테 그런 칭찬을 했었지나에 대한 믿음은 자주 흔들리지만 내가 믿고 따랐던 그의 말이라면 어쩌면 나 진짜 일머리가 좋은지도 모르겠다는 자신감이 차오른다그 해 봄우리는 우리가 만든 그 작은 사회에서 정말이지 열심히 헤엄쳤다그 열심 덕분에 내 몸에 아로새겨진 든든한 기억들나의 수영을그리고 인생을 대하는 마음을 한층 진하게 만들어준 그대여내 인생의 잊지 못할 스승이어라


*사진 출처: 인스타그램 @kaist_kaor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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