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오리는 왜 가오리인가?
미국에 <빅뱅이론>이 있다면 한국엔 <카이스트>가 있다. 그 너드스러움 덕분이었을까, 드라마 <카이스트>는 1999년 방영된 해에 상당한 화제가 되었다. 1화였던 ‘로봇 축구 동아리’ 편부터 인기를 끌어 책과 함께 음반도 발매되고 그 기세로 드라마 출연진들이 SBS 인기가요 무대까지 올랐다고.
정체를 알 수 없는 이 종합예술적인 드라마에 가오리도 출연했다. 극 중 로봇 동아리 부원이었던 최재명 씨는 핀 수영에도 열심인 자였는데 그의 수준급 수영 실력을 소개하는 5화 ‘귤과 오리발’ 편에 가오리와 수영장이 잠깐 등장한다.
인기 드라마의 조연으로 출연한 이력 때문일지, 가오리에는 남다른 가오리 부심 즉 가부심이 있다. 수모와 수영 가방, 동아리 과잠 등 온몸으로 가오리임을 드러내는 선배들을 보며 품어온 한 가지 의문이 있었으니.
가오리는 왜 가오리인가?
KAIST FIN SWIMMIMG TEAM에서 앞의 KA를 따다 말고 어쩌다 오리ORI, 즉 ‘가오리KAORI’가 되었는지 내심 궁금했다. 가오리가 수중 생물이긴 하나 그것이 우리의 정체성과 무슨 관련이 있는가? 가나다순의 동아리 리스트의 명실상부 부동의 첫 주자를 선점하기 위한 창립 멤버들의 행정적인 큰 그림이었나? 누구에게도 털어놓지 못한 소소한 궁금증을 간직하고 신입생 선발 훈련을 거치다 보니 한 가지 합리적 의심을 품게 되었다.
가오 잡아서 가오리가 아닐까?
길 가는 카이스트생을 붙잡고 “도를 아십니까?”와 같은 톤으로 “가오리를 아십니까?”라고 묻는다면 아마 그는 손사래를 치며 “어휴, 그 지독스러운 사람들이요? 말도 말아요.” 하고 혀를 끌끌 찰지 모르겠다. 지독스럽게도 이번엔 학생식당의 아주머니를 붙잡고 물어보면 “어휴, 매일 아침마다 구석에서 단체로 학식 먹는 건장한 친구들이요? 그 친구들이 우리 매출의 1%는 올려 줄걸. 껄껄” 하며 웃지나 않을지.
지독함과 건강함 사이 그 어딘가, 그러니까 지독하게 건강한 사람들의 총집합이랄까. 이제 막 가오가 잔뜩 들어간 새끼 가오리의 가부심이 꾸며낸 상상이긴 하지만 실제로 가오리는 가부심과 가오를 가질 수밖에 없는, 단순히 수영 동아리 그 이상의 대명사였다.
한 달간의 훈련을 마치고 소수 정예 부대로 선발된 15명의 가오리 신입생 환영회 자리였다. 유서 깊은 동아리답게 어화둥둥 신입생들을 보러 많은 선배들이 모였고 작정하고 먹어보자, 고깃집을 통째로 빌렸다.
고등학교를 조기 졸업하고 갓 입학한 열아홉 막내부터 회사를 그만두고 석사 과정 중인 스물아홉 왕언니까지, 나이도 생김새도 전공도 수영 실력도 다양한 신입부원들이 모였다. 3주간 매일같이 얼굴은 물론 몸까지 본 사이였지만 수영 말고는 이렇다 할 개인사를 나눌 여유가 없었다. 선배들만큼이나 나도 궁금했다. 대체 가오리엔 어떤 사람들이 들어왔을까? 같은 학번 동기가 된 우리는 저마다 카이스트, 그것도 이 수영 동아리까지 오게 된 이야기를 늘어놓는다.
한울오빠는 판다 같은 다크서클이 인상 깊은 사람이었다. 배시시 웃는 것도 판다같이 푸근한 구석이 있었다. 그는 타지에서 의대를 졸업하고 박사과정 차 대전에 왔다. 바로 전공의 과정을 밟지 않고 의과학대학원으로 박사를 하러 오다니. 그것만으로도 신기한데 갑자기 수영을? 힘들기로 유명한 생명과학 쪽 연구실에서 쥐 먹이 주고 케이지 갈아주며 교수님 눈치 보는 것만으로도 24시간이 모자랄 것 같은데 말이다.
어쩌다 수영 동아리를 하게 되었느냐는 물음에 “기숙사 룸메가 새벽형 인간이라 새벽에 알람을 맞춰 놨는데 나도 깨버렸네? 이 새벽에 뭘 할까 고민하다가 새벽 수영 동아리가 있다는 거야. 수영도 공짜로 해 교육도 공짜야, 개이득- 하고 지원했지 뭐” 하고 웃었다. 안온했던 새벽 브레이크 타임을 깨운 룸메의 알람 덕분에 break your limit에 코가 꿰인 그는 어쩌다 보니 limit your break 하게 되었고 “기왕 합격한 거 운동이나 빡세게 하면서 건강하게 살아 보자”라며 으레 그 허허 너털웃음 지으며 소주잔을 들어 올렸다. 애주가인 그는 효소 인덕션(Induction) 이론에 대해 이야기했다.
“과학적으로 술 잘 마시는 방법 알려줄까? 이른바 ‘효소 인덕션 이론’이라는 건데 자 봐봐, 알코올이 몸에 들어오면 간에 있는 효소에 의해 아세트알데히드가 되고 아세트알데히드가 분해되면 아세트산이 되잖아. 여기서 알코올 분해를 잘하려면 이 효소를 늘려주면 되는 거지.
그럼 이 효소를 어떻게 늘리느냐? 바로 낮에 술을 미리 마시는 거야. 낮부터 이 효소가 늘어나서 일을 할 준비를 하게 되고, 본격적으로 술을 마시는 저녁이 되면 알코올 분해를 도와줄 효소가 이미 넉넉히 준비가 되어 있는 거지.
근데 알코올 분해가 재밌는 게 일정 농도를 채워버리면 이게 간에 혈류가 겁나 가도 분해가 제대로 안 돼요. 그냥 골로 간다는 거야. 결론은 술 먹는 날 점심에 캔맥주 하나만! 사서 먹으면 끝이야.”
본격적으로 술을 마시기 위해 낮부터 체계적으로 효소를 유도하다니. 애주가들의 고민을 날카롭게 꿰뚫고 임상심리학적으로 간 워밍업을 돕고자 하는 의과학대학원생의 애정이 느껴져! 그나저나 연구에 훈련에 이렇게 체계적으로 술까지 병행하다간 건강이 더 나빠지지 않을까요, 하는 말이 차올랐지만 차마 말하지 못했다.
동갑내기 친구인 혜승이는 자기소개부터 남달랐다.
“안녕하세요! 가오리 신입생 김혜승입니다.^^ 일단 가오리에 뽑혀 너무너무 기뻐요. 제 생일은 10월 23일이에요. 어떤 수인지 아시죠? 네, 아보가드로 숫자(10^23)가 들어가 있는 만큼!! 멋진 화학자가 되고 싶은 화학과 학부 2학년입니다. 친하게 지내요~^^”
입자수를 물질량과 관계 짓는 비례상수처럼 자신의 생일과 화학과를 운명 짓는 신선한 자기소개였다. 그 와중에 “1023은 1+2+2^2+…+2^9니까 수학자가 되는 건 어때?”라는 수학과 선배의 전과 제안이 튀어나오고 원래 카이스트 애들은 다 이런 건가 하고 내 미래가 아스라해지는 와중에 “왠지 내 이름은 이효리, 거꾸로 해도 이효리처럼 이 생일과 자기소개는 평생 못 잊을 것 같아….” 하는 생각이 스쳐갔다. 비록 지금까지 혜승이 생일 하면 10^23 대신 그냥 아보가드로라는 이름만 떠오르지만, 어쨌거나 화학자가 될 출생의 비밀을 발견하고 설렜을 그 옛날의 혜승과 그 사실을 자랑스럽게 소개하는 오늘날의 혜승은 참 순수했다.
어쩌다 수영장까지 흘러 들어오게 됐냐는 물음에 “가오리만의 건강한 정신에 반해서 지원했어^^ 나도 Break your limit에 완전 꽂힘!! 작년에 가오리 지원했었는데 떨어지고 올해 재수한거야^^재수라 그런지 이렇게 아침에 일찍 일어나서 수영하고 아침 먹는 게 아직도 꿈만 같아!” 하고 눈을 반짝였다.
가오리에서 1년간 훈련하고 나면 우린 정말 break our limit 하게 될까? 가오리를 통해 내 한계 너머 무슨 일이든 해낼 수 있을 것 같다는 부푼 기대를 이야기하는 그녀 곁에 앉아 왁자하게 돌아가는 술잔들을 위태롭게 바라보았다.
열아홉 스물아홉, 한 스노클을 탄 사이
불판과 함께 분위기도 한껏 달궈질 즈음 가오리 신환회의 오래된 전통 ‘스노클샷’이 시작되었다. 스노클샷이라 함은 소주를 스노클로 받아먹는, 大수영 동아리의 전복적인 샷이다.
무릎을 꿇고 앉아 경건하게 스노클을 착용한다. 이때 약간의 기술이 필요한데 혀로 스노클 입구를 단단히 밀봉할 것. 스노클 가득 채워진 소주는 혀를 뗌과 동시에 에너지 보존 법칙에 따라 엄청난 위치에너지가 운동에너지로 전환되어 J자 튜브를 통해 입속으로 솟구치고, 좁은 주둥이를 통과하려는 소주는 베르누이의 정리처럼 속력이 급속도로 증가하여 바로 목젖까지 가닿아 마치 빨대로 술을 마시듯 식도부터 적셔진 알코올에 빠른 속도로 만취하게 되는, 이른바 소주 병나발이다.
한울 오빠가 기세 좋게 일어나 스노클 앞에 무릎을 꿇었다. 이에 답하듯 동아리 회장이 친히 소주를 꺼내 들었다. 가오리는 음주문화로 대변되는 동아리들과 달리,, 저겨, 회장님….
무릎을 꿇고 소주잔 대신 소주 스노클을 받아 든 한울 오빠는 삼국지의 장비 같았다. 스노클을 움켜쥔 그의 손에서 비장함이 흐르는 와중에 그는 술 한 방울 흘리지 않고 깔끔하게 병샷을 했다. 그리고 기분이 좋아져 버려 저세상 텐션으로 쭉 달린다.
이어서 오늘 스노클샷에 영광스러운 제물을 바친 스노클 주인 의렬이 등판했다. 그는 부산 영재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올해 입학한 동갑내기 물리학도였다. 오호라, 자네가 말로만 듣던 그 영재인가?
모든 게 신기한 새내기에게 카이스트엔 안 그래도 신기한 사람들이 많았는데, 그 신기한 사람들이 신기해하는 사람들이 바로 부영고 학생들이었다. 알면 알수록 종잡을 수 없는 매력의 부영고와 아이들 이야기는 차차 하기로 하자. 키 188에 앙상하고 멀대 같은 체구의 이 청년은 다부지게 자기소개를 했다.
그 역시 “아침에 수영장을 공짜로 쓰고 싶어서”라고 가오리 지원 배경을 밝혔다. 중학교 2학년 때 수영을 배우기 시작해 고등학교 가기 전까지 등교 전 새벽 수영을 했다는 의렬은 고등학교 때 기숙사 생활을 하면서 수영을 끊을 수밖에 없었다고. 대학에 와서도 계속 수영을 하고 싶어 동아리까지 들게 되었다고 말했다.
좋아하는 게 정말 많은데 그중에 운동을 최고로 좋아해 수영 말고도 벌써 축구 모임이 두 개, 농구 모임이 하나라 말하는 의렬은 신나 보였다. 끝으로 “수영장 아침 공짜 출입증을 얻기까지 몸이 매우 고단했지만, 그 은혜에 보답하고자 학교에 있는 날은 하루도 빠지지 않고 수영장에 나오겠습니다!!”라고 종합운동학과 신입생 같은 공약을 밝혔다. 다부진 포부만큼이나 소주 한 병에 또 한 병 묻고 더블로 갔다가 장렬하게 사망한다.
물론 나도 피할 수 없었다. “규칙적인 대학 생활을 생각하고 들어왔어요.”라고 말하기 무섭게 입에서 입으로 규칙적으로 전해지는 스노클 병나발을 불고 “우린 한 스노클을 탔어”라며 내가 마신 게 침인지 흘린 게 소주인지 분간이 안 되게 건배를 남발할 때쯤 좌중을 둘러보니 서정이가 쓰러져 있었다. 몸에 알코올 분해 효소 자체가 없다며 한사코 술을 거절하던 서정이었다. 조금만, 정말 조금만 따라주겠다는 선배의 말에 결국 스노클샷을 했고 쓰러졌던 것이다.
서정이 기절했어!!
119 불러야 하는 거 아냐?!
얼굴이 희다 못해 창백해진 혜승이 발을 동동 굴렀다. 그 옆에서 내가 “팀 닥터, 팀 닥터 한울오빠 불러와!” 하고 응급 콜을 외치려던 때 옆 테이블의 한울 오빠는 이미 일정 농도를 넘겨버린 알코올 분해 효소들과 저세상을 떠돌고 있었다. 다행히 서정이가 빼꼼 눈을 뜨고 “나 어지러워서 그냥 누워있어. 조용히 좀 해.” 하고 힘없는 손사래로 혜승과 나를 말렸다. 머쓱해진 나는 술이 약간 깼다. 그제야 좌중을 둘러보니 신환회는 이미 가오와 만취의 아비규환이었다.
그나저나 나를 이렇게 만취시킨 가오리, 대체 뭐지? 일개 동아리지만 마치 그 자체로 살아있는 유기체 같아. 거나하게 취한 사람들 사이로 두둥실 떠다니는 가오리가 보이는 듯했다. 톡 쏜다 가오리..
건강과 도전과 공짜라는 저마다의 기대를 품고 가오리가 된 우리는 선배들의 엄청난 환영을 받았고, 스물아홉의 입에서 열아홉의 입으로 전해진 스노클을 통해 우리는 침을 나눈 동기가 되었다. 여전히 가오리가 왜 가오리인지는 모르겠지만 물도 술도 지독하게 마셔버리는 가부심과 가오 가득한 우리 모두가 가오리 그 자체였다.
카이스트의 새벽을 여는 사람들! 알면 알수록 취하게 되는 당신들! 수영복으로 기억되던 15인이 또렷한 얼굴을 가진 동기가 되기까지. 앞으로 더 질척이는 사이가 되도록, 내일 새벽 수영장에서 만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