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이스트 大수영동아리 신입부원 모집!
물리 실험실로 향하는 발걸음을 멈추게 한 건 흰색 대자보였다. 온 캠퍼스가 포스터로 도배된 계절이었다. 긴 입시 끝 FA시장에 나온 새내기들을 모셔 가기 위한 동아리들의 구애가 한창이다. 신나는 대학생활을 꿈꾸는 신입생들은 보송보송한 얼굴로 게시판을 훑었다. 서로를 유혹하는 달뜬 기운이 3월의 캠퍼스에 감돌았다.
휘황찬란한 포스터들 사이의 흰색 대자보는 볼품없었다. 장식이래야 궁서체로 몇 자 적어 놓은 것이 다일까. 이 정도 노력으로 신입생들의 마음을 얻겠다? 코웃음 치며 바쁜 걸음을 재촉하려던 찰나, 제목을 보고 그대로 멈춰버렸다.
KAIST SWIMMING TEAM 가오리
신입부원 모집!
드디어 떴다. 카이스트 수영 동아리, 가오리!
우리의 아침은
수영복만 입고 모였을 때 비로소 시작되지
카이스트에 수영 동아리가 있다는 사실은 익히 알고 있었다. 대학생이 되면 꼭 운동 동아리, 특히 수영을 하려고 별렀다. 고3 때 낙이라면 대학마다 수영장이 있는지 검색하는 일.
"이 학교 수영장은 천장이 유리로 되어 있군. 여긴 경영 풀에 다이빙 풀까지 있네? 저긴 수영장 바닥 높이까지 조절할 수 있대!"
내게 대학과 수영은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의 물교일체의 영역이었다. 진학하고 싶은 수영장, 아니 대학이 참 많았다. 나는 공대, 그 중에서도 수영장이 있는 공대에 가겠다는 목표를 세운다. 구체적인 목표 설정과 캠퍼스별 수영장 현황 조사.xlsx의 꾸준한 동기 부여, 수능만 끝나면 마음껏 뛰어놀리라는 집착에 가까운 답답함을 연료 삼아 나는 마침내 수영장을 가진 공대생의 꿈을 이룬다.
물이 있는 곳엔 물고기도 있게 마련. 수영장엔 당연히 수영하는 사람들도 있을 테고 아니나 다를까 카이스트엔 수영 동아리가 있었다. 수영장을 헤아리며 긴 입시터널을 지나온 내가 아니던가. 내 찬란한 물빛 캠퍼스 라이프가 펼쳐질 바로 그곳! 입학과 동시에 새 수영복을 장만하고 수영장 답사도 가보며 다가올 물장구를 위해 북 치고 장구치고 신입부원 모집 공고만 기다리고 있었다.
고대하던 모집 공고는 이렇게 시작한다.
가오리의 아침은 새벽 6시,
학교 수영장에 수영복만 입고 모였을 때
비로소 시작됩니다.
새 아침의 결기부터 남다르군. 해도 뜨기 전에 아침부터 열어젖히는 담대함. 잠옷 대신 수영복을 입고 자야 할 것 같은 비장함. 오로지 수영의, 수영에 의한, 수영을 위한 새벽을 여는 숭고함이 느껴졌다. 뒤이어 오는 멘트도 인상적이었다.
멋진 몸과 건강한 정신,
규칙적인 대학생활을 꿈꾸시는 분들!
두려워하지 말고 찾아오세요!
공고문에서 갓 제대한 복학생의 군기 같은 것이 전해졌다. 특히 내 눈길을 사로잡은 건 ‘규칙적인 생활’. 내가 공대에 오게 된 것도 바로 그 규칙적인 생활 때문이었다.
나는 해군이 되고 싶었다. 국가를 방위하고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하며 조국의 통일에 이바지하겠다는 원대한 꿈이 있었다기보다, 정해진 일과를 착실히 살아가는 군대 생활이 내 천성에 잘 맞겠다 싶었다. 원체 몸 움직이는 걸 좋아하니 군인이 되면 꾸준히 훈련도 할 테고. 게다가 해군이면 바다 가까이 지내며 수영도 곧잘 할 것이 아닌가. 단순히 ‘물 가까이서 사는 규칙적인 삶’의 바람은 해군이라는 장래희망으로 이어졌다.
자연스럽게 해군사관학교 입학을 준비했다. 그러다 2학년이 되는 해에 해군 함정이 어뢰에 폭침되는 사건이 터진다. 하루 아침에 해군 장병 수십 명이 죽고 실종됐다. 그 사건은 내 가벼운 진로 선택을 와장창 흔들어 놓는다. 흔한 일은 아니라지만 언제고 내 목숨을 바칠 정도로 군인이 되는 일에 소명이 있는가? 확신이 없었다. 그렇게 어물쩍 해군의 꿈을 접고 대안으로 찾은 게 공대였다.
나는 공대생을 떠올리며 명쾌하고 성실한 일상을 상상했다. 매사에 정답이 분명하게 떨어지고 항상 최적의 효율을 추구, 고요한 실험실에 앉아 결과값을 내기 위해 몰두하는 모습이랄까. 정해진 시간표에 해야 할 일이 분명한 일상이었다.
돌이켜보건대 열아홉의 내게 익숙한 일상을 이어가고자 했을 뿐. 집과 학교, 답이 딱 떨어지는 오지선다형 시험의 연장선에서 그와 가장 닮아 보이는 곳이 군대 혹은 공대였다. 좁디좁은 내 세상이 상상할 수 있는 최선의 미래였다.
그나저나 규칙적인 대학생활은 물론 멋진 몸에 건강한 정신까지 가질 수 있다니. 아무것도 주지 않는 대도 수영가방을 챙길 나였지만 당신들과 함께라면 갓생을 살 것만 같아..!
그런데 두려워 말라고? 도도하게 동아리 쇼핑을 하고 있을 새내기들에게 “아유~ 몸만 오세요. 어화둥둥 업어 드릴게.” 라거나 “우리 동아리 들어오면 매일 술 사준다!” 같은 극진한 공약 선포, 여차하면 “졸업할 때 이만한 스펙 없다.”하는 현실주의도 아니고 두려워 말라? 싸한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걱정도 잠시. 새내기의 풋풋한 긴장을 두려움으로 표현했겠거니 생각하며 내일 있다는 모집 설명회 일정을 캘린더에 저장했다.
수영 못해도 괜찮아요. 1500m만 돌면 돼.
신입부원 설명회 날, 설레는 마음으로 동아리방으로 향했다. 상상의 동물 가오리는 어떤 사람들일까? 뿔 달린 유니콘처럼 간지 작살 나면 어떡하지? 잔뜩 기대하며 도착한 동방 앞에는 이미 수십 켤레의 신발이 놓여있었다.
“오, 여자분~ 안녕하세요~ 어서 들어오세요.”
열린 문틈으로 한 청년이 해사하게 인사를 건넸다. 세평 남짓한 동방은 이미 사람들로 빼곡했다. 생각보다 많은 인파에 살짝 움츠러들었다. 쭈뼛쭈뼛 신발을 벗고 안으로 들어서니, 죄다 남자였다. 다행히 한쪽 구석에 선배로 보이는 여자분이 있었다. 20명 남짓한 무리에 여자는 고작 두 명이라니. 극명한 성비에 또 한 번 위축되었다.
자리를 잡고 앉아 동아리방을 둘러보았다. 출입문 맞은편으로 빛바랜 라꾸라꾸 침대와 묵직한 데스크톱, 장난스러운 낙서가 적힌 화이트보드가 보였다. 그 옆의 유리로 된 선반에는 각종 메달과 상패들이, 아래 칸에는 미분기하학, 유체역학 II 같은 두꺼운 전공서적들이 꽂혀 있었다. 한쪽 구석에는 급하게 치운 듯한 노란 스노클들이 삐죽 고개를 내밀고 신참내기들을 구경하고 있었다.
내게 인사를 했던 해맑은 남자는 자신을 동아리 회장이라 소개했다. 유니콘처럼 얼굴이 희고 길었다. 그는 모니터에 PPT를 띄우고 수모를 쓴 이들이 활짝 웃고 있는 사진을 보여주었다. 다들 한껏 신나 보였다.
단체 사진을 시작으로, 1992년 창단되었다는 가오리의 유구한 역사와 그 해 아시아 핀 수영 선수권 대회 800m 부문의 금메달리스트를 배출할 정도로 실력이 출중했던 창립 멤버들에 대한 이야기, 이듬해 전국체전 금, 은메달을 획득하고 대한수중협회에서 최우수 대학팀으로 선정되는 등 여기가 공대인지 체대인지 착각이 들 정도로 화려한 수영 이력을 들려주었다.
그 외에도 봄이면 딸기파티를, 여름이면 MT를 겸한 바다수영 대회를, 가을이면 교내 수영 대회를, 겨울쯤 되면 라이프가드 자격증을, 그리고 갖가지 개파, 종파, 생파, 야식 파티 등의 행사가 있다고 했다. 내가 바라던 캠퍼스의 로망을 한 데 모아둔 곳이군.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매력 어필을 듣던 중 본격적으로 수영 이야기가 나왔다.
“앞으로 3주간 훈련을 통해 신입부원을 선발합니다. 훈련은 월화목금 새벽 6시고 수요일은 쉬어요. 신입부원이 된 후에도 1년간 네 번의 분기 훈련과 여름 두 개 분기 훈련에 모두 참여해야 가오리 정식 부원이 됩니다.”
인간이 가오리가 되는 길은 멀고도 험했다. 3주간, 그리고 1년간 훈련에 꼬박 참여해야 정식 부원이 되는 대장정. 그러니까 나는 지금 ‘예비’ 신입부원이고 앞으로 3주간 새벽 훈련을 거쳐야 비로소 가오리 ‘예비’ 정식 부원이 된다니. 예비 넘어 예비가 되기 위해 나에게 예비된 훈련들이 대자보의 궁서체만큼이나 도도하게 놓여있었다.
“모레, 목요일부터 목, 금, 월 3일간 접수 기간을 거친 후에 3주간 훈련해요. 3주 차, 마지막 금요일에 1500m를 돌아야 합격이고요. 돈다고 해도 지각, 결석 횟수와 훈련 태도 감안해서 뽑습니다.”
1500이라는 숫자가 가슴에 턱 하고 걸렸다. 1500m라고? 1500m면 25m 왕복 30바퀴? 수영장 30바퀴를 돌아야 합격이라고요? 일 년은 연습해야 할 것 같은 수영장 30바퀴를 동아리 가입 조건으로 내걸다니. 이미 실력자들만 뽑는 거야 뭐야 이거…. 맥이 빠졌다. 다들 비슷한 생각인지 누군가 용기 내 물었다.
저 완전 초보인데,
수영 못해도 괜찮나요?
“수영 못해도 괜찮아요. 신입부원 중에 절반은 가오리에서 수영을 처음 배워요. 선발 기간 동안 저희 부원들이 기초부터 친절하게 가르쳐 드리거든요.”
이거 앞뒤가 맞는 말인가? 수영을 못해도 괜찮은데 3주 뒤에는 수영장 30바퀴를 돌아야 한다. “아가야, 엄마가 걸음마 가르쳐 줄 테니까 다음 달에 같이 마라톤 나가자” 같은 포부인가? 아니면 “공대니까 영어 성적 크게 안 봐요. 수업만 영어로 할게요” 같은 뒤통수인가? 수영을 못하는 자도 30바퀴를 돌 게 가르친다는 저 자신감은 대체 어디서 나오는 거지? 3주 만에 1500m를 가능케 하는 기초수영 101의 비법을 묻고 싶었지만 왠지 들어도 이해가 안 갈 것 같았다. 그 와중에 시종일관 해맑은 저 회장. 어딘가 믿는 구석이 있어 보여, 듬직해. 저 미소에 내 걸음마와 영어 성적까지 맡겨도 좋을 것만 같다고 정신이 아득해질 때쯤 그의 마지막 멘트가 가슴에 꽂혔다.
Break your limit!
저희 가오리는 대학 문화의 건강한 대안을 찾아 나선 모임입니다. 음주문화로 대변되는 기존의 대학 동아리들과는 달리, 대학생 시절에만 가질 수 있는 가슴 깊은 곳의 순수한 열정을 각자의 자아 성취로 이끌어 내려합니다.”
옳소! 내가 꿈꾸던 갓생 라이프 아니겠냐고요!! 자신의 한계를 뛰어넘듯 두 팔을 힘껏 펼쳐 접영 하는 남자의 사진으로 회장의 발표는 끝이 났다. 학업과 운동, 꿈을 향해 정진하는 바람직한 동아리에 대한 비전은 입학 2일 차 새내기의 가슴에 파란 물보라를 일으켰다.
그날 밤, 첫 팬미팅을 다녀온 성덕이 된 기분으로 기숙사 책상에 앉아 일기장을 펼쳤다.
꼭 가오리에 들어가
카이스트 최고의 수영 선수가 될 것이다.
그 회장 영업 실력이 엄청난 걸. 모집 설명회가 쏘아 올린 자아 성취의 작은 공은 예상치 못한 꿈으로 이어졌다.
그날 밤 나는 무척이나 설렜다. 이제 모레면 꿈에 그리던 수영장에서 수영복만 입고 나의 대학생활이 비로소 시작되겠군. 새벽 5시 30분 새 알람을 맞추고 침대에 누웠다. 내가 있을 곳을 찾았다는 안도감에 두둥실, 부푼 마음으로 잠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