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정도 돌았으면 꺼내줄 줄 알았지
카이스트의 아침은 수영장에서 시작된다. 어스름한 새벽, 지구 끝의 온실처럼 수영장은 덩그러니 반짝이고 있었다. 문을 열자 익숙한 소독약 냄새가 끼쳤다. 스물. 차고 긴 밤을 걸어 맞이한 새 아침의 시작이었다.
5시 57분에 풀장은 이미 만원이었다. 짱짱한 새 수영복을 연신 매만지며 아는 얼굴이 없나 주위를 살폈다. 오픈 동방 때 본 사람은 거의 없었다. 밤의 의욕이 새벽잠의 유혹을 이기지 못한 모양이다. 다행히 여자들은 제법 있었다.
수영복 차림의 유니콘 회장을 중심으로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 있었다. 천장의 디지털시계가 06:00으로 변함과 동시에 선배들은 돌아가며 출석 번호를 불렀다. 그 사이 한 여자 선배가 신입생 사이를 돌며 이름을 물었다. 수영복 차림에 노트와 펜을 쥐고 스스럼없이 말을 건네는 모습에서 노련함이 묻어났다.
출석 체크가 끝나고 스트레칭이 이어졌다. 살색의 청년들은 5개 레인을 가운데 두고 동그랗게 둘러섰다. 원 중간중간의 선배들이 구호를 읊으며 몸을 풀었고, 신입생들은 눈치껏 동작을 따라 했다.
“핫둘셋-하나, 헛둘셋-둘”
일어난 지 30분 만에 초면의 이들과 수영복만 입고 PT 체조를 하다니. 꿈같기도 종교의식 같기도 한 게 묘했다.
물에 들어가세요~
조찬 수영복 모임이 어색했던 나는 풍덩, 망설임 없이 물에 뛰어들었다. 물에 처음 닿을 때의 차가움은 늘 정신을 번쩍 들게 한다. 그리고 고요. 삶의 소란스러움을 뒤로하고 물속에 뛰어들 때면 그 평화로움에 언제나 후련한 기분이 든다. 수영복 위에 겹 입은 물의 보드라움이 느껴졌다. 물속에서 머리를 동동 내밀고선 다른 이들이 뛰어드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우리 사이에 물이 있다는 사실에 그제야 안정감을 느꼈다.
자유형 50m를 시작으로 3주간 매주 금요일마다 100m, 400m, 마지막 주에 대망의 1500m 기록을 잴 것이다. 첫날은 가볍게 실력 테스트부터 시작했다. 오늘의 50m 기록을 가지고 훈련 레인이 정해졌다. 초급은 수영을 처음 시작하거나 25m 정도 완주할 수 있는 사람, 중급은 수영을 좀 했거나 50m까지는 거뜬한 사람, 고급 레인은 접영, 배영, 평영, 자유형 4개 종목을 할 수 있고 자유형 100m 이상도 가능한 사람으로 나뉘었다.
레인마다 2명의 선배들이 메인 강사와 보조 강사를 맡았다. 선배들의 지도에 따라 정해진 훈련대로 차근차근 헤엄쳤다. 열정 넘치는 초급 레인은 낮에도 따로 만나 특훈을 한다는 소문이 들렸고, 고급 레인의 몇몇은 다음날 훈련이 없는 화요일 밤이면 훈련 대신 술련을 한다는 소식이 새벽의 술 냄새를 타고 전해졌다. 새벽의 캠퍼스를 깨우는 물장구 소리. 그렇게 저마다의 레이스가 따로 또 함께 시작되고 있었다.
샤워 15분이면 귀밑머리는 무리죠.
새벽의 평화가 깨진 건 3주 차의 어느 날이었다.
“훈련이 좀 늦게 끝났네요. 지금 7시 32분이니까 47분까지 위에서 볼게요.”
오늘도 가오리 세상은 분 단위로 흐른다. 샤워는 15분 컷이었다. 샤워실로 걸어감과 동시에 수경과 수모를 벗고 수영복 어깨 끈까지 물 흐르듯 집어 내렸다. 미리 세팅해 둔 샴푸와 스포츠 타월을 챙겨 샤워실에 들어가 7분 컷으로 샤워를 끝내고, 3분 동안 한 손에는 수건과 한 손에는 드라이기를 저글링 한 뒤, 4분간 옷을 입고 짐을 챙겼다. 남은 1분은 계단을 올라 나가는 시간. 오늘도 한바탕 전쟁 같은 샤워였다. 산발이 된 머리를 털며 위풍당당 전쟁터를 나서는데 들리는 말.
지각입니다.
“네? 제가요? 제가 지각이라고요? “
청천벽력이었다.
“저 47분에 딱 저기 문에서 나왔는데… 수영장 문을 나온 게 7시 47분이었는데 저 못 보셨어요?”
회장이 예의 그 싱글벙글한 미소를 띠며 말했다.
“대강당 앞 여기 동그랗게 모이는 것까지가 47분이에요.”
이렇게 단호할 수가! 내가 선망하던 공과대학식 명확함이었다. 수영장 문에서 대강당 앞 집합 장소까지 불과 20m 거리를, 그러니까 대략 5초 정도 지각했다고요. 우물쭈물 부질없는 항변을 늘어놓았지만 이곳은 이미 이 세상 융통성이 아니었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거지? 내 5초는 어디서 사라진 걸까? 가방 지퍼는 계단을 올라오면서 잠갔어도 됐을 텐데. 마지막에 거울 한 번 더 들여다볼 게 아니었어. 내가 왜 귀밑머리까지 말렸지? 내가 왜, 내가 왜에- 서른댓 명의 지원자들이 새벽 열정을 불태우는 마당에 지각이라니. 입이 바싹 말랐다. 내 뒤로 줄줄이 지각 처리된 물미역 부원들 모두가 망연자실한 표정이었다.
대거 지각의 충격에 아랑곳 않고 회장의 해맑은 아침 공지가 이어졌다.
“오늘도 고생하셨습니다. 내일이 드디어 1500m 기록회네요. 도실 때 몇 가지만 주의하세요. 발바닥이 땅에 닿으면 안 되고 턴할 때 2초 이상 벽 잡고 있으면 실격입니다. 각 레인 담당자가 10바퀴마다 킥 판을 넣어서 몇 바퀴인지 알려줄 거예요.”
군더더기 없지만 얄짤도 없을 기준을 듣고 누군가 물었다.
“기록은 상관없이 완영만 하면 되나요?”
기록은 상관없어요.
힘들면 물에 떠서 쉬세요.
진정한 수영인은 쉴 때도 물에 떠서 쉬는 것이다. 이건 또 마치, 달리다 힘들면 가볍게 뛰라는 말 같기도 하고 영어 수업하다 못 알아듣겠으면 원서 보고 자습하라는 말 같기도 하고. 무엇을 물어보든 명쾌하게 답하는 회장을 보며 신비로운 가오리식 자신감에 동화되는 기분이었다.
어쨌거나 시간은 상관없으니 30바퀴만 돌라니. 규칙은 간단했다. 비록 오늘 지각을 했지만 내일 30바퀴만 돌면 무사히 동아리에 들 가능성이 있다. 내가 수능 때도 이렇게 절실하지 않았던 것 같은데 말이야. 3주간의 노력이 동아리 입단의 마지막 관문, 1500m를 향해가고 있었다.
이 정도 돌았으면 꺼내줄 줄 알았지
새벽 3시 30분 알람이 울렸다. 자는 둥 마는 둥 선잠을 떨치고 일어났다. 밤새 허우적대는 꿈을 꿨다. 마른세수를 하며 긴장을 털어냈다.
여느 때와 같이 출석 체크와 스트레칭을 끝내고 레인 주위에 둘러섰다. 꼭두새벽부터 기어코 수영장에 모인 사람들. 근성 하나는 인정해 줘야 돼. 3주간 같이 물먹은 멤버들이 유독 정겹게 느껴졌다. 이들과 다 함께 수영하는 것도 오늘이 마지막이구나. 푸석한 얼굴들 위로 묘한 긴장이 감돌았다. 헤드셋을 끼고 수영장으로 들어서는 박태환의 공허하지만 상기된 얼굴이 떠올랐다. 새내기 수영인에게는 오늘이 흡사 올림픽 경기와 같은 날일테다.
첫 주자 5명이 호명되었다. 나머지 사람들은 챙겨 온 티셔츠를 걸치고 바닥에 자리를 잡았다. 출발을 기다리는 이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나의 레이스를 상상해보았다. 1500m 기록회쯤 오니 이제 온전히 자신과의 싸움이었다. 한 걸음을 뗄 수 있다면 42.195km도 가능하다는 어느 마라토너의 말은 사실이더라. 하루 한바퀴씩 늘려가다보니 까마득하기만 했던 30바퀴도 충분히 닿을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겼다.
변수라면 욕심이었다. 빨리 가려는 마음이 들면 호흡이 엉키기 시작한다. 몸이 긴장되면 두 배 세배로 힘이 든다. 한번 힘들다 생각하면 앞으로 펼쳐질 10바퀴, 20바퀴가 그렇게 막막하게 느껴질 수 없다. 물속에 머리를 처박고 까마득한 시간을 보내야 한다는 생각은 결국 물에 빠져 죽을 수도 있겠다는 두려움이 되어 우뚝 멈추게 되고 마는 것이다.
패닉이 오지 않게 당장의 저 벽까지만 가보자고 가볍게 마음먹을 것. 불필요한 힘과 생각은 떨쳐내고 그저 팔 한 번, 발차기 한 번씩 쌓아갈 것. 고요한 물속에서 무엇에게도 방해받지 않고 오롯이 나를 마주하는 시간이 될 거야. 앞서 헤엄치는 예비 가오리 오 형제를 바라보며 투명 헤드셋을 끼고 조용히 마인드 컨트롤을 했다. 삑- 호루라기가 울리고 첫 주자들의 레이스가 시작되었다. 서로의 올림픽을 응원하는 마음으로 너도나도 파이팅을 외쳐댔다.
한 시간쯤 흘렀을까, 드디어 내 차례가 되었다. 수경이 뒤집어지지 않게 다이빙은 않기로 했다. 물에 들어가 호루라기 소리를 기다리는데 마인드 컨트롤이고 뭐고 벌써부터 잡생각이 떠올랐다. 혼란한 다짐과 동시에 호루라기가 울렸고 기운차게 벽을 차고 나섰다.
에라이,
명상이고 나발이고 그냥 출발하자.
30바퀴를 도는 마음은 종일 오르락내리락거렸다. 처음 2바퀴까지는 아니나 다를까 ‘잘하고’ 싶은 마음이 나댔다. 발차기는 강력한지 하이 엘보(High-Elbow)는 높은지 리커버리 동작은 깔끔한지를 생각하며 멋진 포즈에 공을 들였다. 몸이 잔뜩 상기된 게 느껴졌다.
잔뜩 힘을 들여 수영을 하니 5바퀴부터 벌써 곤욕스러웠다. 머리는 이미 남은 바퀴 수만 헤아렸다. 지금까지 돈 바퀴의 5배를 더 돌아야 한다. 까마득함이 물밀듯이 밀려왔다. 조용히 하고 일단 저기 벽까지만 가자, 나를 어르고 달래던 그때였다.
벽까지만, 저기, 벽, 까지만.. 가,, 가자아,. 암,, 욜맨~ 그대여~ 따라다따 오늘도~ 나는 오늘도 그대만 생각해 암~욜~맨. 머릿속에 익숙한 멜로디가 울려 퍼지며 양옆 레인에서 가오리와 박태환이 다라닥닥오늘도 춤을 췄다. 망했다. 수능 아니 수영 금지곡의 덫에 걸려버린 것이다.
“누가 내 귀에 암욜맨 헤드셋 씌웠냐. 그만!!”
그렇게 1500m 금지 송으로 점철된 결코 고요하지 않은 물속에서 나는 나를 마주하기는커녕 암욜맨과 함께 따라다따 헤엄치다 보니 5바퀴가 10바퀴가 되고, 10바퀴가 20바퀴가 되어 1500m을 돌아버린다. 욕만하며 헤엄쳤을 뿐인데 덕분에 패닉 하지 않을 줄이야. 더블에스 오빠들 고마워..
그날 인생극장 대서사시를 쓴 건 산하였다. 정말로 수영을 못 하는데 수영 동아리에 지원한 도발적인 친구. 산하는 초급 레인에서 기초부터 착실히 배웠다. 레인이 달라 어떻게 지내는지 안부를 물을 기회도 많지 않았는데, 새로 걸음마 배우듯 열심히라는 소문은 익히 들었다.
나보다 일찍 출발했는데 내가 1500m를 돌고 나올 때까지 산하는 여전히 헤엄을 치고 있었다. 한 바퀴, 세 바퀴, 일곱 바퀴. 그의 레이스는 보는 사람들까지 조마조마했다. 열 바퀴쯤 돌았을까, 산하가 벽을 잡고 우뚝 멈춰 섰다. 모두들 숨을 멈추고 산하를 바라보았다.
모두의 염원이 전해진 걸까, 다행히 2초 컷을 넘기지 않고 그는 다시 출발했고 그렇게 천천히, 61분 36초 만에 30바퀴째 벽을 탭 했다. 그제야 벽에 매달려 가쁜 숨을 내쉬는 산하를 두고 모두가 기립박수를 치며 환호했다.
인류가 처음 육지에 발을 딛고 섰을 때 세상이 이토록 환호했을까. 산하가 레인을 빠져나오자 호모 아쿠아티쿠스의 탄생을 축하하는 박수갈채가 터져 나왔다. 와, 저게 진짜 가능하구나. 1시간 동안 헤엄칠 수 있구나. 수영을 못하는 사람도 가오리에서 훈련하면 정말 30바퀴를 도는구나. 직립보행을 넘어 물에서의 사족헤엄을 시작한 호모사피엔스의 새로운 가능성이 엿보였다. 갓 태어난 수생 신인류를 바라보는 수영인들의 마음에 뭉클함이 차올랐다. 고개를 돌려 회장을 바라보니 으레 그 태연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근성의 산하도 나도 무사히 가오리 신입부원이 되었다. 신입생 환영회에서 산하에게 1500m 돌 때 어떤 기분이었냐 물어보았다. 눈물의 인간승리 대감동 서사시를 들으려고 휴지까지 손에 쥐려던 찰나,
이걸 진짜 다 돌리네.. 미친..
"시발, 이 정도 했으면 중간에 꺼내 주고 노력이 가상하다, 넌 합격-”이라고 꺼내줄 줄 알았단다.
인생은 멀리서 보면 희극이지만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라더니 건져 주기는커녕 박수만 쳐대는 이들 덕분에 끝까지 돌 수밖에 없었던 진실. 역시 1500m는 보는 이들에게나 뭉클하지 도는 이들에게는 그저 뺑뺑이 었다.. 그렇게 박수갈채와 환호성으로 훈훈하게 끝난 그날의 기록회는 Break your limit의 낭만과 1시간 뺑뺑이라는 현실로 다채롭게 기억된다.
모집 설명회 이후로 파란만장했던 3주를 겪고 보니 회장의 근자감의 비결을 알게 되었다. 친절한 강습 노하우란 결국 함께 수영하는 것이었다. 매일 5시 30분에 일어날 수 있을까 싶었던 염려는 서로의 기숙사 문을 두드려주는 손길들로 지워졌고, 첫 차가움을 이겨내고 함께 물에 뛰어드는 사람들이 있기에 내일의 훈련이 기다려졌다. 내가 1500m를 돌 수 있을까 의심하던 마음은, 넌 잘할 수 있을 거라 대신 믿어주고 제 일처럼 응원해 준 이들에게 보답하고 싶은 마음에 끌려 레이스를 끝까지 완주할 수 있었다. 그저 수영을 하고 싶다는 마음은 이제 '이 좋은 사람들과 함께' 수영하고 싶다는 마음으로 커져갔다.
그나저나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라더니 물에서 쉬는 것도 정말 가능하겠는데? 잘하면 물에서 먹고 자고 싸는 것도 가능하겠어. 출석 도장과 의지의 1500m는 어느새 내 삶을 비집고 흘러 들어와 나를 늠름한 수영인으로 바꿔 놓았으니. 육지의 물성과는 전혀 다른 새벽의 수영장. 15인의 호모 아쿠아티쿠스들과의 수중 라이프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