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 좀 적당히 합시다.
노래로 기억되는 계절이 있다. 내내 흥얼거리며 계절을 보내고 나니 언제 어디서든 이어폰을 끼는 순간 그때 그 거리로 나를 훌쩍 데려가 버리는 그런 노래. 고막에서 시작된 전율이 온몸을 훑고 난 뒤에도 이 순간이 이대로 조금만 더 머물러 주길 바라보는 그런 노래. 내게는 히사이시 조의 <Summer>가 꼭 그런 곡이다. 그 해 여름은 노래 제목처럼 온통, 온통 여름이었다.
그 해 여름은
“오빠, 다음 분기 훈련은 안 해요?”
“쉿! 그런 소리 함부로 하지 마.”
소문만 무성했던 가오리 여름 분기가 시작되었다. 무시무시한 여름 훈련에 대해선 선배들에게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선배들에게 농담 삼아 묻곤 하던 질문도 이번에는 어쩐지 다들 정색을 하고 말했다. 장난으로라도 누가 듣고는 여름 분기에 코가 꿰일 새라 잔뜩 목소리를 낮췄다.
“작년 여름도 지긋지긋했는데 그걸 또 왜 해? 올여름은 수영 말고 다른 거 해야지.”
꼬박 1년간 모든 훈련에 필참해야 하는 신입생들과 달리 선배들은 분기별 훈련에 선택적으로 참여할 수 있다. 학기 중엔 학교에 있는 김에, 힘들었던 훈련은 벌써 잊고 재밌었던 기억만 남은 김에, 신입생들이 꼬시는 김에 얼렁뚱땅 또 훈련에 참여하곤 했지만 여름 훈련은 그렇게 스리슬쩍 넘어가기엔 그 대가가 큰일이었다.
여름 1, 2분기에는 훈련 강도로 보나 절대적인 시간으로 보나 출전하는 대회들로 보나 아주 밀도 깊은 훈련이 펼쳐진다. 우선 새벽 6시 20분이었던 훈련이 6시로 앞당겨진다. 훈련이 끝나는 시간은 동일했으니 꼬박 1시간 30분간 물에서 구르게 된 셈인데 그 새벽은 체감상 아주 이중적이었다. 5시 50분에서 5시 30분으로 기상 알람을 다시 맞추게 됐다는 점에서 1분 1초가 짧은 새벽인 와중에, 막상 훈련 중에는 슬슬 끝날 때가 된 것 같은데 시계를 쳐다보면 아직 사이클 두 세트는 더 하고도 남을 긴 새벽이었다. 게다가 여름 분기엔 저녁 훈련까지 추가된다. 아침저녁으로 거의 매일 훈련이 있다 보니 캠퍼스를 떠나 당최 다른 뭔가를 할 수가 없었다. 게다가 주말이면 수영 대회니 여름 엠티니 몰려다니다 보면 방학이 끝날 즈음엔 “아, 내가 방학 동안 한 거라곤 온통 수영밖에 없구나…” 하는 현타가 오리란 걸 선배들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선배들과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는 나는 훈련 일정에 맞춰 일상을 재배치했다. 재배치라고 해봤자 계절학기를 듣는 처지에 수영과 수업, 그 외에는 학교에서 놀기. 이렇게 학기 중과 크게 다를 것도 없는 일상이었다. 17학점이었던 로드가 3학점이 되었고 날씨가 조금 더 더워졌다는 게 그나마 큰 변화이지 않을까 싶었는데 그 외에도 소소한 변화라면 룸메이트가 바뀐 것이었다.
룸메이트가 랜덤으로 배정되던 첫 학기가 끝나고 여름 학기부턴 룸메이트와 기숙사를 직접 선택할 수 있었다. 선배들은 보통 함께 훈련하는 가오리 사람들끼리 방을 쓰곤 했다. 수영을 하다 부쩍 친해진 것도 있지만 가오리 사람들과 방을 쓰면 새벽 훈련도 같이 나가고 야행성 룸메를 만나 눈치 보거나 피곤할 걱정도 없었다. 나도 첫여름 방학을 기점으로 가오리 사람들과 방을 쓰게 되었는데 내 첫 가오리 룸메는 어쩌다 보니 서정이었다. 신환회에서 알코올 분해 효소가 없다고 한사코 스노클 샷을 거절하다 결국 기절하듯 쓰러졌던 그녀. 통통한 볼살이 꼭 해바라기씨를 가득 넣은 햄스터를 닮은 서정이는 나와 동갑내기 친구였다. 나이도 성별도, 이제는 같은 방까지 쓰게 된 사이였지만 서정이는 나와 여러모로 다른 사람이었다.
여름 방학이 시작되고 얼마 되지 않은 어느 날이었다. 새벽 훈련이 끝나고 그대로 기숙사 침대에 드러누워 선잠에 빠지려던 참이었다.
아, 똥 마려-
책상에 앉아 있던 서정이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반 수면 상태로 그 독백을 듣고 나는 “응 그렇구나.. 너는 똥이 마렵구나..” 하고 그녀가 곧 화장실에 가겠지 상상하고 있는데 웬걸, 서정은 여전히 그대로 앉아 인터넷 서핑을 했다. 이상했다.
‘똥 마려운 거 맞나? 왜 화장실에 안 가지?’
내가 잘못 들었나 의아해하며 다시 똥 꿈에 빠지려는데 그녀의 담담한 고백이 이어졌다. 가만히 앉은 채로 또 한 번 똥이 마렵다는 말을 듣고 눈을 빼꼼 떠 그녀를 바라보니, 아니나 다를까 이번엔 어쩐지 낯빛이 조금 창백해진 것 같았다.
내 룸메이트를 소개합니다.
인터넷 창을 클릭하는 그녀의 손이 불안하게 떨렸다.
“서정아, 화장실 안 가?”
덩달아 묵직해진 마음으로 서정에게 물었더니 “아직. 아직 아니야.” 하는 식의 답이 돌아왔다. 또 한 번 의아했지만 ‘아, 아직 급하지 않은가 보다.’하고 다시 잠에 들려는데 급하지 않다기엔 다소 경박하게 달각거리는 마우스 소리와 미세하게 부들거리는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아, 혹시 변비인가?’하고 안쓰러워지려는 찰나 서정이 “지금이야!”를 외치고는 의자를 박차고 일어나 방을 뛰쳐나갔다. 변비가 갑자기 설사병으로 도진 건가 싶어 그녀가 떠난 방에 혼자 남아 어리둥절해하고 있는데 정확히 30초 뒤 서정이 평온한 얼굴로 기숙사 방문을 열고 들어왔다.
내가 기억하는 룸메이트 서정은 그런 아이였다. 그것이 세상 끝에 나오는 순간까지 제 할 일을 하다 정확히 그때가 되면 빠르게 달려가 해치우는. 마침 공용 화장실이 먼 방에 배정된 처지를 슬퍼하기보단 그 거리에 맞춰 생리현상마저 체계적으로 계획하고 누구보다 빠르게 남들과는 다르게 효율적으로 볼 일을 보는. 그녀는 볼 일이라는 범사에도 시간과 에너지를 허투루 하지 않았으니, 뿌듯한 얼굴로 방문을 닫으며 “이렇게 하면 30초 만에 볼 일 볼 수 있어. 30초 컷이면 대변인지 소변인지 사람들도 모른다구 하하하” 하고 웃는 그녀를 보고 그 주도면밀함에 나는 또 한 번 감탄했다. 어쩜, 설명까지 똑 부러졌다.
나라면 어땠겠느냐고? 대장이 움찔거림과 동시에 이 기회다 싶어 한 손엔 신문을 쥐고 화장실로 달려가 늑장을 부리다, 뒷사람의 노크 소리가 들리면 그제야 깜짝 놀라 우왕좌왕 물도 제대로 못 내리고 나와 “죄송해요.. 이게 그,, 변기가 고장 났나…”라는 딱히 내가 죄송할 것까진 없는 변명을 늘어놓으며 얼굴이 빨개져 도망치지나 않을지. 행동이 느리고 마음은 유약한데 말 주변까지 없는 내가 보기에 서정은 (볼) 일 처리도 똑 부러지고 말도 잘하는 똘똘한 친구였다.
마침 서정이는 그 미쳤다고 소문난 ‘산디과 가오리’기도했다. 고등학교를 조기 졸업해 나이는 나와 같지만 올해 2학년이 된 그녀는 산업디자인 학과에 입학했다. 카이스트에서 산디과는 과제와 조모임이 빡세기로 유명한 학과이다. 학기 중에 하도 자주 밤을 새우다 보니 사실 산디과 전공과 가오리 훈련을 병행한다는 건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다. 굳이 굳이 둘을 병행하려면 과제를 하다 기왕 밤을 새운 거 그대로 쭉 깨어 있는 채로 새벽 훈련에 나가 아침까지 먹고는 다시 수업에 들어가는, 야행성과 주행성이 혼재되어 중간중간에 쪽잠을 자는 생활을 해야 한다.
30년 전통을 자랑하는 가오리에서 300명 남짓한 학생들 중 산디과는 그녀가 최초였다는 사실만으로 그 존재 자체가 신기한 인물이었다. 아직 전공이 없는 나로서는 아무리 수영이 좋기로서니 밥 먹듯이 밤을 새워가면서까지 새벽훈련에 나오지는 못할 것 같은데 그 점에서 나는 서정이 참 신기했다. 지독스럽게 수영을 좋아하는 친구인가 보다, 하는 생각으로 다른 듯 비슷한 우리가 함께 보낼 그 여름이 나는 잔뜩 기대되었다.
미션: 어제의 나를 뛰어넘을 것
5시 30분. 알람이 울리면 먼저 일어난 누군가 불을 켠다. 눈을 감은 채로 대충 손에 잡히는 옷을 꺼내 입고 전날 밤 미리 챙겨 둔 수영 용품과 샤워도구가 담긴 빨간색 수영 가방을 메고 방을 나선다. 기숙사 계단을 내려가다 보면 아래층의 혜승, 소은을 만난다. 수영장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아름관에서 출발해 그 옆의 남자 기숙사 사랑관에서 상조와 의렬이, 그 옆의 소망관에서 산하, 형섭, 영우, 재현이 합류한다. 한참 더 가다 보면 서측 기숙사에서 출발한 이들은 자전거로, 동측 기숙사의 샛길로는 한울, 혜림, 은희 언니까지 모인다. 어디선가 조직원이 한 명씩 등장해 일렬횡대로 행진하는 모습은 마치 영화 <범죄와의 전쟁>의 한 장면과도 같았다. 학생들이 떠나간 캠퍼스에는 양복 대신 빨간 에나멜 가방을 맞춰 맨 가오리파가 있었다. 가오리파가 접수한 여름의 캠퍼스엔 짙은 피비린내 대신 옅은 염소 냄새가 풍겼다.
정말이지 몸에 염소 냄새 빠질 새 없이 밤낮으로 수영장으로 향했다. 새벽 훈련이 끝나면 쪽잠을 자고 수업을 듣다 근로를 하러 수영장에 간다. 매표소 아주머니와 관리실의 염 선생님께 인사를 드리고 탈의실 청소를 간단히 하고는 수영장에 앉는다. 한가로이 수영하는 이들에게 무슨 문제는 없나 멍하니 앉아 바라보는데 대게 나른한 오후에 꾸벅꾸벅 졸다가 졸음을 참으려 <Summer>를 듣다가 들으며 또 졸다가를 반복한다. 그렇게 한두 시간 물멍을 때리다 근로가 끝나면 동방에 가서 조금 뒹굴뒹굴하다 8시 저녁 훈련에 맞춰 또 수영장으로 향한다. 하루는 다 같이 헬스장에서 근력 운동을 하다가, 하루는 동측 운동장 트랙에서 달리기 훈련을 하다가 물에 뛰어든다.
수영장 가까이 맴돌며 아침저녁으로 부지런히 몸을 움직이는 날들. 수모 자국과 수경 자국이 채 사라지기 전에 수영복을 덧입는 일상이었다. 그러고 보면 고등학생 시절 그토록 바라던 삶이었다. 늘 본캐였던 학생 신분을 잠시 내려두고 부캐였던 수영인으로 오롯이 사는 날들. 바라던 대로 그렇게 살아 보니 삶도 생각도 아주 간결해졌다. 몸은 무척 고되지만 내게는 하루하루가 단순한 기쁨으로 충만한 날들이었다. 하지만 몸의 피로와 정신의 고요 사이에 적절한 균형을 맞추는 일이 늘 관건이었는데 어떤 날은 몸이 너무 힘들어 휘청거렸다.
신입부원이라면 꼭 거쳐야 할 데뷔전이라고 할 수 있는 첫 대회를 앞둔 어느 저녁 훈련 날이었다. 오늘도 산뜻한 하의 실종 차림으로 의자에 앉은 훈련부장이 데스노트를 펼쳐 들고 말했다.
올라오세요.
스프린트(Sprint) 합니다.
스프린트는 단거리를 전력으로 헤엄치는 훈련이다. 자신의 최고 스피드로 전력 질주해야 하니 한 바퀴 도는 것만으로도 넋이 나가는데, 그렇게 여러 번 돌고 나면 팔다리의 힘이 쏙 빠지고 정신이 혼미해진다. 이미 물에 잔뜩 절어 지친 사람들이 하나 둘 물 밖으로 올라왔다.
“1분기 신입생 훈련 때 쟀던 기록 기억하죠? 그때 자기 기록보다 늦게 나온 사람은 계속 돌 거예요.”
사람들이 웅성거렸다. 생각도 안 나는 언제 적 기록을… 과거의 내가 첫 기록회라고 분명 과도하게 열심히 했었을 텐데. 열심히 헤엄친 나머지 기록이 과하게 좋았던 건 아닐까 순간 두려웠다. 훈련 일지에 빼곡히 적힌 개인별 기록에 따라, 그야말로 나 자신과의 싸움이 시작되었다.
“초장에 최선을 다하자.”
자신과의 싸움에서 작전은 다들 비슷했다. 스프린트 훈련은 뒤로 갈수록 힘이 빠지게 마련이니 갈수록 승산이 줄어들 터였다. 힘이 빠지기 전에, 여러 바퀴 돌기 전에 이 쳇바퀴를 빠져나가야 한다.
실력이 비슷한 사람들끼리 5개 레인에 맞춰 줄을 섰다. 호루라기가 울리면 5명이 동시에 다이빙을 하여 50m를 전속력으로 헤엄쳐 돌아오는 식이다. 어떻게든 힘이 빠지기 전에 이 뺑뺑이의 구렁텅이에서 빠져나가고야 말리라. 다 같은 생각인지 스타트 자세로 웅크린 이들의 뒷모습에서 긴장감이 감돌았다. 호루라기가 울리고, 언제 지쳤냐는 듯 다섯 개의 몸이 활처럼 팽팽하게 공중으로 튀어 올랐다. 팟팟팟팟팟- 우리의 기량을 반짝 키우기 위한 큰 그림이었다면 훈련부장은 가히 천재가 아닐까? 전력질주 무한반복이라는 배수의 진을 치고 어제의 내가 세운 기록을 깨기 위한 오늘의 나의 열정은 필사적이었다. 한 바퀴씩 돌 때마다 누군가는 성공하고 누군가는 실패했다. 과거의 자신을 뛰어넘은 사람들은 물 밖으로 건져졌다.
수영, 거 좀 적당히 합시다
그렇게 하나 둘 뺑뺑이의 구렁텅이에서 빠져나가고 남은 게 한 선배와 서정이었다. 갈수록 몸에 힘은 빠지고 앞뒤로 다른 사람도 없으니 쉴 시간도 없이 출발하고. 기록이 줄기는커녕 5초, 10초 턱턱 늘지나 않는 게 신기할 따름이었다. 벽을 탭하자마자 아니나 다를까 “늦었어요. 올라오세요.”를 연발하는 훈련부장에 둘의 표정이 굳어졌다. 뒤에서 그걸 지켜보는 우리들의 마음도 가시방석에 앉은 듯했는데 칠흑같이 어두워진 바깥처럼 수영장 분위기도 찬물을 끼얹은 듯 숙연해졌다.
서정이 다시 레인 밖으로 나와 스타트대에 섰다. 거칠게 숨을 고르는 소리가 고요한 수영장에 나지막이 울려 퍼졌다. 그녀가 문득 고개를 들어 훈련부장을 바라보았다. 수경을 쓰고 있는데도 눈으로, 온몸으로 욕을 하는 게 느껴졌다. 나라면 눈을 잔뜩 내리깔고 어쩌면 힘들다며 엉엉 울어버리지나 않았을까 싶은 걸 서정은 똑바로 고개를 들고 훈련부장을 한동안 쳐다보았다. 이러다 서정이 물 대신 훈련부장에게 달려들기라도 하는 게 아닌가 싶어 어쩐지 내가 다 조마조마한 기분이었다. 그리고 그 와중에 대쪽같이 다음 호루라기를 불어대는 우리의 훈련부장. 삑- 두 사람이 또 한 번 물속으로 뛰어들었다.
그렇게 두어 번 더 돌았을까, 서정이 이전 바퀴보다 0.1초 정도 더 빨라졌다며 드디어 물에서 나올 수 있었다. 둘 사이에 몸싸움이 나기 전에 그 스프린트가 끝나 그저 다행스러운 마음이었다. 도무지 끝나지 않을 것 같던 조마조마한 저녁 훈련이 끝나고 우리는 또 긴 길을 터덜터덜 걸어 기숙사로 돌아왔다.
몸이 너무 고된 밤이면 불을 끄고 방에 가만히 누워 서정이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아니나 다를까 너무 빡친 나머지 눈물도 나오지 않았던 분노의 순간을 이야기하다 보면 또 하루가 그럭저럭 지나갔다. 깔깔 대다가도 또 바로 몇 시간 뒤에 일어나 수영장으로 향할 생각에 말을 아끼고 일찍 잠을 청하던 여름 밤들. 그 밤의 대화에서 서정이 실은 고등학교 친구였던 혜승의 꼬임에 넘어가 친구 따라 강남 가듯 수영장에 와 이렇게 훈련까지 하고 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전설의 산디과 가오리였지만 그녀는 수영에 큰 욕심도 과한 미련도 없었다.
“물에 빠졌을 때 안 죽고 살아서 육지까지만 헤엄쳐올 수 있게 수영하면 되지. 0.1초 더 줄이는 게 뭐 그리 대단하다고 그 난리야? 40초에서 38초 되는 게 인생에서 뭐가 그렇게 중요하다고! 나는 기록 줄이고 싶다고 한 적도 없는데 맨날 뺑뺑이나 돌리고, 미친 동아리야 진짜! 어우, 내가 신입생 선발 때 탈락했어야 하는데!”
수영이 내 자신감의 원천이자 존재의 이유마저 넘보며 기록을 줄이려고 애를 쓰던 나와 달라도 너무 달랐던 서정. 열심히 안 한다고 머리 위로 킥 판이 날아오면 그대로 맞고 스스로를 더 채찍질했을 나이지만 서정은 재빠르게 킥 판을 피하고 그거 왜 던지냐고 쫑알거리며 오히려 레인 맨 뒤로 향할 아이였다. 우리 적당히 좀 하자는 말을 아무렇지 않게 던지는 서정을 보고 있자면 나까지 조금은 통쾌해지는 기분이었다. 수영마저 꼭 그렇게 잘할 필요는 없구나. 내가 원하지 않는다면 0.1초도 나에게 하나도 중요하지 않구나 하고 말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서정이 하면 야무지게 똥을 참던 그 첫인상이 가장 강렬하게 남은 터라 이 일화를 실명으로 이야기해도 괜찮을지 오랜만에 서정에게 카톡을 보냈다. 똥참의 추억을 실명과 함께 오픈하는 대신 좀 더 정상적이고 멋진 이야기 10개도 함께 써주면 된다고 역시나 명쾌하고 똘똘하게 제안하는 그녀. 서정이의 매력 10개에 준하게 열심히 글을 써보았는데 만족할는지 모르겠다. 모두가 기록 경신에 집착할 때 “거 참, 다들 정신 차리고 적당히들 합시다~”라고 기분 좋게 딴죽을 거는 사람. 자신이 정한 이유대로 결정하고 판단하는 사람. 그리고 사실은 그게 뭐든지 간에 우선 누구보다도 열심히 한번 뛰어들어 보는 사람.
개인적인 성향도 수영에 대한 열정마저도 모든 게 달랐던 우리였지만 달빛이 살짝 내려앉은 어두운 기숙사에서 너와 이야기 나누던 밤들 덕분에 무시무시했던 그 여름의 광기도 조금은 우습게 느껴지곤 했다. 그럼에도 다음 날이면 또 같은 에나멜 가방을 둘러메고 함께 수영장으로 향하던 우리. <Summer>의 피아노 연주처럼 너와 나 우리 모두 찬란하게 물속으로 뛰어들던 계절이었다.
그렇게 우리의 헤엄은 조금씩 바다 대회를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