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수영의 묘, 미
거제도에 도착해 가장 먼저 한 일은 바다를 보는 것이었다. 숙소 옥상에 올라가니 바다가 한눈에 보였다. 축축한 바람에 실린 소금기가 코 끝을 파고들었다. 한낮의 바다는 햇살을 받아 윤슬이 부드럽게 반짝였다. 해변에는 파랗고 뾰족한 부스들이 줄지어 빼곡히 놓여 있다. 그 옆으로 똑같은 수모를 맞춰 쓴 이들이 점점이 모여 몸을 푼다. 뜨거운 태양 아래 금방이라도 바닷속으로 첨벙 뛰어들 듯하다. 다행히 파도는 잔잔하다. 내일 대회 때 파도로 고생할 일은 없겠군. 구름만 조금 끼면 수영하기 딱 좋겠다. 내일은 헤엄치기 더 완벽한 날씨를 기도하며 금세 삐질삐질 흐르는 땀을 닦고 계단으로 몸을 돌렸다.
수영을 처음 시작할 때까지만 해도 상상하지 못한 일 중 하나는 수영선수가 되어 각종 대회에 출전하는 것이었다. 비록 동아리 모집 설명회를 겸한 오픈 동방에 다녀와서 그날 일기장엔 “카이스트 최고의 핀 수영 선수가 될 것이다!”라고 다부진 진로 설정을 하긴 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공부만큼 수영도 곧잘 하는 사람이 되겠다는 일종의 메타포였지 내가 진짜 핀 수영 선수가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협회에 선수 등록을 하게 된 건 올여름 바다 대회에 나가게 되면서였다.
가만히 앉아 숨만 쉬어도 땀이 줄줄 흐르는 무더위가 시작되었다. 훈련과 여름학기로 캠퍼스를 떠나지 못하는 지박령이 된 나는 수영복 마를 새 없이 뻔질나게 물속을 드나드는 여름을 보내고 있었다. 새벽훈련과 저녁 훈련이 정신없이 이어졌고, 어제가 오늘인지 오늘이 내일인지 크게 다를 바 없는 나날이었다. 고요한 캠퍼스에서 뭐 재밌는 거 없나 어슬렁거리다 선배들을 따라 수영 대회에도 몇 번 나가 보았다. 수영 대회는 얼핏 보면 기록회와 크게 다를 바 없었는데 25m였던 풀이 50m가 됐다는 것과 훈련부장이 육성으로 알려주던 기록이 전광판에 대문짝만 하게 찍힌다는 것, 반팔 티셔츠에 예의 그 하의 실종 차림을 하고선 남의 경기를 구경하는 동료 관객들이 좀 더 많아졌다는 정도가 차이점이었다. 몇 번의 대회를 뛰고 나니 기념품 반팔 티셔츠와 약간의 메달이 남긴 했지만 긴장과 부산스러움, 환호 또는 실망으로 이어지는 레퍼토리에 진폭의 차이만 있을 뿐 평소의 훈련과 크게 다를 바 없는 경험에 대회 출전마저 슬슬 시시해지려던 참이었다. 무더위를 날려버릴 짜릿한 무언가 없나.. 재미를 찾아 캠퍼스를 어슬렁거리는 하이에나에겐 더 새롭고 신나는 일이 필요했다.
그리고 며칠 후 내 인생을 뒤흔들 일생일대의 사건이 일어난다.
가오리는 연례행사로 해마다 바다수영 대회에 참가한다. 보통 거제도에서 열리는 ‘바다로 세계로 국제 장거리 핀수영대회’에 참가하는데 이름부터 어마어마한 이 대회를 기점으로 신입생들은 드디어 오픈 워터 경기를 뛰어본 핀수영 선수가 된다. 부산에서 나고 자라며 바다에서 물놀이하던 짬밥은 많았지만 공식적인 대회에 참가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회장은 신입부원들에게 대회 신청을 위해 이번 주말까지 대한수중협회 동호인부로 선수 등록을 하라고 했다. 협회 소속 선수라니, 어쩐지 간지가 나..! 그동안 무엇을 위한 것인지도 모르고 갈고닦았던 모노핀 실력을 뽐낼 시간이었다. 모노핀과 함께 내 인생 첫 오픈워터 대회를 치르는군! 대회가 끝나면 여름 바다에서 신나게 놀고 마셔야지. 올여름이 가기 전에 드디어 피서란 걸 떠나게 된 지박령은 잔뜩 신이 났다.
거제 대회는 해마다 나가는 대회라 그런지 선배들의 매뉴얼에 따라 일사천리로 준비되었다. 대회 필참인 열다섯 명의 신입부원과 선배들을 포함해 참가 인원만 스무 명이 넘어 관광버스까지 대절했다. 동아리방에 있던 슈트와 모노핀, 미리 사둔 간식거리가 담긴 아이스박스를 버스에 바리바리 실었다. 대회를 치르러 간다기보다는 그저 여행을 떠나는 기분이었다. 바다로! 세계로! 어젯밤 특별히 선곡한 신나는 여름 노래 메들리를 들으며 나는 거제로 향했다.
오픈워터의 묘, 미
옥상에서 내려와 동방에서 챙겨 온 슈트를 꺼내 입었다. 가슴팍과 허벅지가 분홍색으로 장식된 오래된 아레나 슈트였다. 170cm에 이르는 큰 키에도 슈트는 한 치수 작게 입어야 한다기에 S 사이즈를 챙겨 왔는데 작은 슈트에 몸을 구겨 넣으려니 얼굴까지 같이 구겨졌다. 10년은 더 됐음직한 슈트는 군데군데가 해져 있었지만 지퍼까지 제대로 갖춰 입고 거울을 보니 미묘한 각이 살아있었다. 이야, 나 진짜 수영 선수 같은데? 거기에 새로 장만한, 알이 큰 오픈워터용 물안경까지 갖춰 입고 나니 내적 자신감이 흘러넘쳤다. 분홍 슈트를 갖춰 입은 킹스맨은 서류가방 대신 빨간색 에나멜 가방을 걸쳐 메고 위풍당당하게 바닷가를 향해 걸어 나갔다.
내일 있을 핀 대회뿐 아니라 이미 나흘간 각종 해양 스포츠 행사가 진행되느라 해수욕장은 이미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우선 대회 운영 부스로 가 출전 선수 참가 확인을 했다. 그리고 우리의 아지트를 찾았다. 옥상에서 봤던 파란색 천막들은 내일 있을 대회 때 선수들이 대기하고 경기를 준비할 팀(동호회) 부스였다. 우리 부스를 찾아가 챙겨 온 돗자리를 깔고 짐을 풀었다. 주위를 둘러보니 이미 자주빛깔 바다로 세계로 기념품 티를 입고 으레 그 하의실종 패션으로 어슬렁거리거나 돗자리에 누워있거나, 혹은 술잔을 든 이들이 보였다. 단체 출전한 동호회마다 부스도 각양각색이었다. 옷을 갈아입을 간이 텐트까지 전문적으로 설치해 놓은 팀이 있는가 하면, 경기는 뒷전이고 구석에서 각종 보쌈과 쌈채소를 펼쳐두고 먹자 판을 벌인 팀도 있었고, 수모를 맞춰 쓰고 파이팅 현수막까지 프린트해 단체사진을 찍는 이들도 있었다. 대게가 아주머니, 아저씨들로 구성된 동호회였는데 그 사이에서 우리 나이대의 청년들은 많지가 않았다. 어쨌거나 모두에게 대회이자 여름 소풍이자 야유회와 같은 분위기가 정겨웠다. 초콜릿, 바나나를 헤집어 놓고 숙소에 있던 나머지 사람들이 오기를 기다렸다. 내일 있을 경기를 위해 간단히 웜업을 하기로 했다. 시작은 모래사장에 동그랗게 모여 평소와 같이 몸을 푸는 것이었다.
오픈워터는 수영장에서 치르는 경영 경기와는 분명 다르다. 보통 수영 대회는 영법 실력만을 비교하고자 헤엄에 방해가 될 모든 장애물을 철저히 제거한다. 물과 내 몸, 오로지 그 둘만 두고 누가 누가 더 헤엄을 잘 치나 기록을 비교하다 보니 자세도 훈련도 천편일률적일 수밖에 없다. 그에 반해 오픈워터는 훨씬 다이내믹하고 예측불허하다. 기본적으로 아웃도어 활동이다 보니 바다수영의 경우를 예로 들었을 때 파도나 조류, 햇빛, 바람, 염분, 수온 등 자연적인 요소들이 변수가 되어 경기에 생생한 영향을 끼친다.
단순히 수영 실력뿐 아니라 멘털 관리나 예상치 못한 상황에 대처하는 순발력과 판단력, 다른 선수와의 기싸움이나(혹은 직접적인 몸싸움도), 운빨 등 다양한 역량이 발휘되는 복잡 미묘한 매력이 있다. 실내 수영 대회가 하얗게 표백된 와이셔츠 같은 깔끔한 매력이 있다면 바다 대회는 거칠고 투박한 가죽 재킷 같달까. 무엇을 대비한들 대회 때 어떤 돌발상황이 펼쳐질지 아무도 모를 일이고 아무리 조신하게 헤엄만 치고자 한들 파도와 소금과 몸싸움에 범벅이 되면 당신의 야성은 깨어날 수밖에. 생각보다 바다는 거칠고 그 바다를 맨몸으로 헤엄치려면 우리도 덩달아 거칠어질 필요가 있다. 어쨌거나 늘 정제된 수영장에서 와이셔츠만 입고 훈련하던 꼬꼬마 신입생들에겐 당장 가죽 재킷을 입고 저 거친 바다를 누빌 오픈워터 속성 웜업이 필요했다. 인생 첫 오픈워터 D-1에 처한 신입부원들에게 훈련부장의 속성 훈련이 이어졌다.
우선 맨몸 웜업으로 200m쯤 멀리 보이는 막대 부표까지 헤엄쳐 갔다 오기로 했다. 얼굴을 정면으로 가로질러 덮는 철제 스노클을 이마에 야무지게 끼고 우리는 바다에 뛰어들었다. 염분이 있는 바닷물에다 슈트까지 입으니 확실히 몸이 더 잘 떴다. 한 세 번쯤 팔을 돌리고 빼꼼, 또 세 번쯤 팔을 휘젓고 다시 빼꼼, 주기적으로 고개를 들어 방향을 확인했다. 수영장과 다르게 바다는 조류가 있고 파도까지 치다 보니 애초에 목표한 방향과는 자연스럽게 멀어진다. 그래서 이 헤드업(Head-Up)을 간간이 해가며 내가 가려는 방향으로 맞게 가고 있는지 수시로 체크하는 것이 중요한데 약간 틀어진 방향도 멋모르고 계속 헤엄치다 보면 나중엔 가려던 곳과 거리가 훌쩍 멀어져 아주 당황스러운 지경이 처한다.
그러다 반대 방향의 조류라도 만나게 되면 힘은 힘대로 빠진 상태에서 정말 패닉 하는 수가 있다. 라이프가드가 있거나 위험시 비교적 대처가 쉬운 수영장과는 달리 바다에서는 나아간 만큼 돌아올 힘도 스스로 비축해 두어야 한다.
맨 마지막 주자까지 돌아오고 이번엔 핀을 차 보기로 했다. 오리발(바이핀)도 뒤뚱뒤뚱 거동이 힘들지만 핀 두 짝이 하나로 붙어있는 모노핀(Mono Fin)은 콩콩 걸음을 하지 않는 이상 걷기는 여간 힘들다. 그래서 아싸리 바다에 들어가 핀을 끼는 것부터 연습했다. 얕은 물속에 들어가 앉아한 발 한 발 핀을 꼈다. 슈트처럼 한 사이즈 작거나 발에 꼭 맞게 신는 모노핀이라 늘 신고 벗기가 아주 지랄 맞다. 물속에서 바셀린을 발라 겨우겨우 모노핀을 끼고 그대로 몸을 뒤집어 누웠다. 왼쪽 대각선으로 300m 정도 떨어져 있는 배를 짚고 돌아오기로 했다. 컨트롤하기 힘들기만 그만큼 엄청난 추진력을 가진 모노핀을 끼고 바다를 헤엄치니 순간 인어가 된 듯한 속도감에 취했다. 이 맛에 모노핀 차지!
마지막 주자까지 배를 터치하고 돌아오자 우리는 바다 한가운데 또 둥글게 모였다. 참 가오리스러웠다. 그리고 핀에 익숙해지기 위해서라며 바다 한가운데서 3, 6, 9 게임을 했다. 훈련부장은 내일 경기 때 다리에 쥐가 나거나 여차하면 이렇게 가만히 서서 쉬라고 했다. 안전이 최우선이다 보니 대회 안전요원들이 보트를 타고 선수들의 상태를 수시로 체크하고 기권을 원하면 그 즉시 바다에서 건져줄 테지만, 1500m를 돌 때처럼 바다에서도 물에 떠서 쉬고 숨을 고를 최소한의 스킬은 알고 있어야 했다. 나는 사실 핀 없이 바다에 던져지는 것보다 모노핀을 끼고 물에 들어가는 게 더 무섭다. 모노핀을 끼면 두 발이 묶인 데다 무거운 무게추가 발에 달린 것 같다. 흔히 영화에서 바다에 사람을 던져 죽일 때 두 발을 묶고 무거운 모래주머니를 매달아 가라앉게 하지 않는가. 혹시나 내가 정신을 잃거나 핀을 컨트롤하지 못하면 무거운 모노핀을 찬 상태로 그대로 바다 아래로 가라앉지나 않을까 하는 상상을 하며 두려워했다. 나의 그런 망상을 알았던 건지 모노핀을 차고 가만히 바다에 떠서 3, 6, 9 게임을 했는데도 몸이 가라앉거나 하는 일은 없었고 그러자 조금 안심이 됐다. 이 순간을 기억하며 “내일 GG를 외치고 싶을 때 둥둥 떠서 조금만 더 참아봐야지.” 다짐했다.
바다수영을 위한 갖가지 팁들을 속성으로 익히고 숙소로 돌아와 씻고 저녁을 만들었다. 참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지만 결국 눈물이 줄줄 흘렀다. 냉큼 방으로 달려가 새로 산 오픈워터용 수경을 끼고 나와 양파를 마저 썰었다. 수경을 끼고 칼을 쥔 서로를 마주 보며 깔깔댔다. 긴장 같은 건 없었다. 오므라이스를 나눠 먹고 대충 상을 정리했다. 식사 후에 간단하게 총회가 있었다. 숙소 거실에 온 부원들이 또 동그랗게 둘러앉아 내일 있을 대회의 각오를 이야기했다. 이렇게 각오까지 이야기하라니 그제야 별생각 없던 첫 오픈워터 대회가 실감이 났다. 뭐, 별 일이야 있을까? 발뒤꿈치와 발가락, 그리고 목덜미까지 핀과 슈트에 피부가 쓸리지 않게 테이핑 한 것을 만지작거렸다. 다치지 않고 3km, 무사히 완주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