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1월 발행 글
서울로 이사를 오고 난 후부터 그렇게도 눈 오는 날이 싫었다. 부산에서 아주 가끔 맞던 눈이나 반가웠지, 겨울만 되면 단골손님처럼 찾아오는 눈은 참 그 어린 나이와 어울리지 않게 나에겐 그저 '쌓이면 귀찮은 흰 결정체'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다. 이런 생각을 하기 시작했던 때가 고등학교 1학년에 올라가던 해 겨울이었다. 한창 첫눈이 어쩌고 하면서 첫눈 오는 날에 의미를 부여할 나이에 난 참 일찍이도 낭만을 버렸구나 싶었다. 작년에 만난 친구 하나가 나에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넌 참 사람이 낭만이 없다. 어떻게 그래?" 나는 내가 낭만을 즐기는 사람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없는 사람도 아니라고 생각해왔는데 그런 말을 들으니 순간 '정말 그런가?' 싶은 각성이 들었다.
'낭만'이란 것은 그동안 나에게 사치였다. 낭만은 행복한 사람들만의 특권이라고 생각했었다. 인생이 살만 하니 그런 여유를 부리기도 하는구나, 딱 그 정도로 얄팍한 개념이라고 생각했었다. 내가 그렇게 열일곱이란 이른 나이에 낭만을 저버렸던 이유도 안락한 울타리가 필요한 청소년기에 집이 더 이상 나를 위한 안전지대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아버렸기 때문이었다.
제대로 된 보호자의 부재는 청소년을 불행하게 만든다. 미성년자는 보호자의 동의 없이 생활에 필요한 어떠한 경제적, 사회적 활동도 할 수 없다. 그러니 보호자는 청소년의 소속감과 안정감을 책임질 의무가 있다. 나에겐 날 위해주는 가족이 있지만 그들이 미성년자였던 열일곱의 나에게 소속감과 안정감을 책임져주지는 않았다. 가족들 사이에서도 나는 언제나 겉도는 돌연변이 골칫덩어리였다. 또래가 하나도 없는 집에서 그 어린아이에게 온갖 죄책감을 심어주던 어른들 사이에서 나는 자꾸만 작아졌다. 그 어른들은 자신들이 이 어린아이에게 무슨 영향을 끼치고 있는지도 모른 채 그렇게 아이를 자꾸만 어둡고 깊은 지하실로 데려갔다. 성인이 된 후로도 어른들의 그늘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기어이 마음의 병까지 얻은 후에야 어른들은 아주 조금 물러날 뿐이었다.
이렇다 할 성과가 없으면 나라는 사람을 인정해주지 않는 사람들 사이에서 지내다 보니 낭만은 정말로 나에게 있어서 불필요한 개념이 되어버렸다. 최근까지만 해도 '그까짓 것 없어도 살 수 있는 거 아냐?'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누군가를 마음에 담고, 예뻐하고, 아끼는 마음이 생기다 보니 사람들이 왜 그렇게도 낭만을 외쳐댔는지 조금은 알 것도 같았다. 낭만은 행복한 사람들만의 특권이 아니다. 사람들은 행복해지려고 자꾸만 낭만을 찾는 것이다. 낭만을 찾아다니는 것은 현실적이고 이성적인 판단을 방해한다고 비판할 수도 있다. 나 또한 얼마 전까지 그렇게 신랄하게 비판하던 사람이었다. 허황되고 무의미하다며, 허상을 쫓는 것만큼 더 한 시간낭비는 없다며. 하지만 그 비판이 우습다는 듯 지금의 나는 누구보다도 열정적이게 낭만을 찾아다닌다.
얼마 전에 서울에 큰 눈이 내렸다. 날리듯 쏟아져 내리는 눈을 보면서도, 바닥이며 나무에 쌓여서 동화 같은 풍경을 만들어내는 것을 보면서도 나는 그저 '아, 올해는 왜 큰 눈이 안 내리나 했다.' 하며 커튼을 쳐버렸었다. 올해도 지겹게 내리는 눈이구나 하면서. 눈이 그친 다음날, 온 세상이 하얗게 눈으로 뒤덮인 절경을 보면서도 나는 왜 이 풍경을 절경이라 이르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우연히 밖에 나가 아무도 밟지 않은 새하얀 눈밭에 첫 발을 디디기 전까지만 해도 나는 그렇게 눈에 대해 냉소적인 태도를 일관했다. 깨끗한 눈을 손가락 사이로 흘려보내고, 뽀드득 소리를 내며 신발 두께만큼이나 쌓인 백지 같은 눈밭을 걸어보고 나서야 나는 깨달았다. 아, 나는 이런 낭만을 그리워하던 사람이었구나. 냉소적이고, 건조한 척하며 어른이 된 척하고 싶었던 것뿐이지 사실은 눈 밭에 홀로 서 있으면 강아지처럼 뛰어놀고 싶은 어린아이에 지나지 않았구나. 어른인 척하지 않으면 순진하다며 어디서 내 뒤통수를 노릴지 모르는 사람들 사이에서 지내다 보니 자꾸만 차가운 어른의 껍데기를 나도 모르게 뒤집어쓰고 있었구나. 그 껍데기가 알맹이까지 잡아먹으려고 하는 줄도 모르고 어설프게 늘 뒤집어쓰고 있었다. 올해의 폭설은 진정한 어른은 그런 껍데기 따위는 없어도 어른이라는 것을 가르쳐주려는 듯 그렇게 나를 눈밭으로 이끌었다.
포슬포슬한 눈은 장갑을 낀 손으로는 잘 뭉쳐지지 않는다. 때문에 작은 눈사람 조차도 한참을 끙끙대며 만들어야 했다. 그런데, 눈을 보면 왜 꼭 눈사람을 만들어야 할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뭉쳐지지 않으면 날리면 된다, 날리다 보면 어느 한 곳에 조용히 쌓인다. 그렇게 쌓인 눈은 새벽을 보내고 나면 얼음이 되어 그 자리에 완전히 자리 잡게 된다. 억지로 뭉치려고 하지 않아도 된다. 눈도, 감정도 내 의지대로 원하는 모양으로 뭉쳐지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그럴 수 없다. 그러면 우리는 눈사람 만드는 것을, 감정을 내 입맛에 맞게 새롭게 정의하는 것을 포기해야 할까? 다른 자리에 쌓으면 된다. 쌓다 보면 반드시 뭉쳐진다. 물론 내가 구상했던 모양 그대로 쌓이진 않겠지, 그렇지만 일상의 모든 것들이 내 계획을 뒤엎고 예상을 벗어나기 때문에 인생이 재밌는 것이 아닐까. 그동안 내 마음의 지하실에 눈처럼 쌓였던 감정들은 너무 건조해서 원하는 모양으로 뭉쳐지지 않는다. 그러니 이제부터라도 내가 원하는 모양과 최대한 비슷하게 쌓으면 된다. 눈사람도, 어두운 감정도 모두 그렇게 쌓으면 된다. 쌓는 것조차도 싫은 감정들은 바람에 날려 보내면 그만이다. '네가 있을 자리는 여기가 아니야' 하면서 바람이 불기까지 기다렸다가 손가락 사이로 날려 보내면 된다.
낭만이란 것은 이렇게 의외의 것들로부터 발견하게 된다. 7년을 잃어버렸던 나의 낭만을 2021년의 시작점에서 찾았으니 나는 올해 더 멋진 어른이 될 수 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