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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영이 Mar 17. 2023

회사 덕에 강남살이



여러 중소기업의 채용공고를 탐방하다 보면 제일 눈길을 끄는 것은 역시 복지다. 허먼밀러 의자를 제공한다, 주 1회 재택을 허용한다, 생일날 반차를 준다 등등 취준의 마음을 흔드는 달달한 문장들을 보며 마치 내가 심사위원인 것 마냥 재곤 했다. 그중에서도 1인 가구인 나에게  가장 흥미로웠던 조건은 '무이자 전세자금대출'이었다. 세상에, 자취러에게 전세자금을 빌려준다니. 너무나 아름다운 복지다. 물론 지금의 내 회사는 지금까지 언급한 조건 중 무엇 하나에도 해당되진 않는다. 내 맘에 쏙 드는 회사가 나를 마음에 쏙 들어하는 일은 드물게 일어나는 일이었기에...


전세자금 대출 좀 안 해주면 어떠랴. 이미 대출 잘 받아서 전셋집 잘 살고 있는데. 대신에 사내 카페가 있고 간식 팬트리가 가득 차 있는 걸. 가진 것에 충분히 만족하며 잘 다니고 있는데 갑자기 상상치도 못한 파격적인 제안을 받았다. 회사에서 숙소를 마련해 주면 들어가서 살 의향이 있냐는 것.


시작은 이랬다. 옆자리 자윤 피디님이 갑자기 메신저를 보내왔다.


[고영 작가님, 대표님이 곧 부르실 건데요]

[네? 저를요? 왜요?]

[회사에서 집 구해주면 살 의향 있냐고 물어보실 거예요.]

[헐 전 완전 좋아요!!]

[미리 생각해 보고 가시라고 말해드렸어욤]

[호고곡...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당]


5분쯤 지났을까, 자윤 피디님이 언질 준 대로 대표님의 호출이 왔다. 나는 예상치 못한 제안에 깜짝 놀랐다는 척 연기를 조금 했고 얼마든지 들어가 살겠다는 적극적인 의사를 표시했다. 대신 조건이 하나 있었는데 회사 직원 한 명과 함께 살아야 한다는 것. 그렇게 나는 자윤님과 룸메이트가 되었다. 그것도 이제껏 꿈도 꾸지 못했던 지역, 강남에서.


회사에서 제공해 준 숙소는 신사역 부근의 월세 70, 관리비 10만 원인 조금 큰 원룸이었다. 그러나 적당히 큰 화장실과 별도로 딸려있는 다용도실, 그리고 베란다가 있었기 때문에 공간을 반으로 갈라서 쓰니 여자 둘이서 적당히 살만 했다. 기본적인 가전은 미리 구비가 되어있었고 이케아에서 200만 원어치의 가구를 마음껏 고르라고 하니 나란히 서랍장 둘, 침대 둘, 행거 둘, 책상과 화장대, 공동 식탁까지 맞췄다. 끝내주는 위치에 끝내주는 제안은 구성원 모두에게 제공되는 것이 아니었기에 숙소는 회사와 자윤님, 나 사이의 비밀이었다.


신사에 산다고 이야기하면 동료 피디들이든, 현장에서 만난 배우든 다들 한결같은 반응이었다. '이야, 이게 좀 있으신가 보다~' 하면서 돈 세는 제스처를 보인다던지, '혹시 저 작가가 금수저인가' 하고 재보는 눈빛을 쏜다던지, 여러 가지 호기심이 뒤섞인 표정을 마주하게 되었는데 그 기분이 썩 괜찮았다. 회사 덕으로 얹혀살고 있는 것이지만 이건 (어쩔 수 없는) 비밀이니 나는 그저 여유로운 미소로 화답할 수밖에. 그렇게 본의 아니게 있는 체하며 나의 주거지에 대해 감탄하는 시선들을 즐겼다.


실제 주거 생활 또한 매우 즐거웠다. 매일 가로수길을 산책할 수 있는 삶, 맛있는 식당과 핫플이 5분 거리에 있는 삶, 퇴근길에 랜디스 도넛을 사 먹을 수 있는 삶! 회사까지 걸어서 출퇴근할 수 있는 것도 좋았고 자기 전에 천장을 바라보며 자윤 피디님과 도란도란 나누는 대화도 좋았다. 일적으로도, 동료들로도 회사 생활이 충분히 만족스러웠지만 '주거생활안정'이라는 최고의 복지까지 받고 나니 내가 느끼는 지금 이 감정은 그래,  사랑이었다. 나는 회사를 사랑하게 되었다.


내 삶을 전세사기의 불안으로부터 구원해 주시고 부유한 동네에 사는 아가씨로 만들어준 회사의 안녕과 발전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하고 싶었다. 이때부터였다. 야근을 해도 스트레스를 받지 않고 업무에 대한 스스로의 만족도가 생기기 시작한 게. 대본이 내 씅에 차지 않으면 주말에도, 공휴일에도 달려 나가 고치면서 말 그대로 맡은 일에 최선을 다했다. 역시 직장인에게 기름을 붓는 최고의 원동력은 최선의 복지인게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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