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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영이 Oct 16. 2023

자발적인 내향인은 없다




자신의 성향을 스스로 선택할 수 있다면 과연 내향인이 되기를 자처할 사람이 있을까? 세상엔 다양한 개성이 있고 그걸 조금이라도 폄하한다면 비난의 눈초리를 피할 수 없는 사회 분위기가 되었지만 한편으로는 우성과 열성이 존재한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다. 막상 사회에 나가면 쉽게 호감을 사는 것도, 아무렇지 않게 문제를 해결하는 것도 외향인이다.


나는 내가 내향인이 되었던 순간을 기억하고 있다.


1.

초등학교 1학년, 담임선생님이 국·영·수·음악·미술·체육의 구분 없이 전 과목을 올인원으로 가르치는 학년이었다. 음악 선생님이자 담임선생님이 두 갈래의 꼬리가 달린 것 같이 생긴 음표를 칠판에 그린 날이었다.


“여러분, 이게 무슨 음표일까요?”


그 당시의 나는 방에 커다란 검정색 피아노가 있었고 매주 피아노 과외를 받았다. 기본적인 악보 보는 것쯤에는 쬐끔 자신이 있었고 음악선생님이자 담임선생님께 관심을 받고 싶었다. 그래서 오른손을 번쩍 치켜들며 작은 주먹으로 허공을 쉬지 않고 찌르며 외쳤다.


“6분 음표! 6분 음표! 6-분-음-표-!”


6분 음표라는 건 없는데 배운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잠시 헷갈렸던 것 같다. 정답은 16분 음표였지만 나는 확신에 차서 6분 음표를 거듭 외쳐댔다. 누구보다 먼저 내가 정답을 맞혀야 했기에 가장 큰 목소리로, 가장 많이 외쳤다.


선생님이 ‘맞아요, 16분 음표죠?’라고 하는 순간 나는 내가 16분 음표를 6분 음표로 잘못 말했다는 사실에 머쓱해졌는데 순간 맞은편에 나를 향한 어떤 여자아이의 시선이 눈에 꽂혔다. 여자아이의 눈빛은 말보다 훨씬 빠르게 ‘뭐야, 왜 이렇게 나대.’라는 뜻을 전하고 있었다. 가장 효율적인 의사소통 수단은 언어가 아니라 눈빛일지도 몰라.


그제서야 흥분한 내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무안함을 느꼈다. 그러게, 나 왜 이렇게 나댔지. 나의 나댐을 후회하는 동안 마치 유체 이탈을 한 것처럼 꼴불견이었던 내 모습이 보였는데 다시 생각해 보니 그 친구의 눈을 통해 내 모습을 들여다봤던 것 같다. 그 후로 나는 수업 시간에 함부로 손을 들지 않았다. 자신감에는 책임이 뒤따랐다. 나는 더 이상 수업 시간에 주목받고 싶지 않았다.  


2.

그렇게 나는 수업 시간 내내 조용한 아이가 되었다.

말수가 많이 적었지만 그래도 눈치를 보는 편은 아니었던 것 같다. 눈치를 보는 아이가 되는 계기가 생겼으니까.


저학년 아이들에게는 학급마다 급식차가 배당되었다. 8살에서 10살까지의 아이들은 복도에 있는 급식차에서 반찬과 밥을 퍼 각자 자리에서 식판을 잡고 점심을 먹었다. 익숙한 공간에서 익숙한 친구들과 함께.


그러나 고학년이 되고 나서부터는 급식실을 써야 했다. 점심시간이 되면 모두 커다란 급식실에 모였고 알아서 자리를 잡고 밥을 먹었다. 그것도 학교가 어린이들에게 경험시켜 줄 수 있는 나름의 사회생활이었던 것 같다. 내가 밥을 어떻게 먹고 있었는지는 모르겠다. 먹는 데 바빴을 뿐인데 어떤 남자아이의 목소리가 귀에 꽂혔다.


“하하하, 쟤 먹는 것 좀 봐!”


고개를 들었다가 남자아이와 눈을 마주쳤다. 나를 보고 있었으니까 눈을 마주칠 수밖에 없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입맛이 없다는 게 어떤 기분인지 알게 되었다. 식탐은 부끄러운 것이구나. 늘 먹을 걸 좋아했지만 티를 내지는 않았다. 눈앞의 음식에 군침이 돌고 욕심이 날수록 더욱 과하게 양보했다. 난 여전히 집에서 혼자 밥을 먹는 게 가장 편하다.


3.

엄마 손을 잡고 슈퍼에 갔다. 슈퍼 가는 길에 마주친 동네 아줌마와 엄마가 반갑게 인사를 했다. 오랜만에 본 것인지 엄마와 아줌마는 길가에 서서 한참 동안 이야기를 나누었다. 나는 엄마와 친한 동네 아줌마를 그날 처음 봤다. 누군지 잘 몰랐기 때문에 엄마 옆에 서서 이야기가 끝나기를 가만히 기다렸다. 이야기가 서서히 잦아들고 정적이 조금씩 길어질 때쯤, 할 말을 찾아 이리저리 방황하던 아줌마의 눈동자가 내 앞에서 멈춰 섰다.


"너는 내성적인 아이구나?"

 

그날의 나는 너무 어려서 '내성적'이 무슨 뜻인지 몰랐다. 아줌마를 통해서 '내성적'이라는 단어를 처음 들어봤을 뿐이다. 다른 사람들 눈에는 내가 '내성적'으로 보이는구나. 기분이 썩 괜찮았다. 이해하기 힘든 어려운 단어로 나를 표현할 수 있다는 것이 좋았다.


"엄마, 내성적이 무슨 뜻이야?"


엄마는 내가 이해할 수 있게 제대로 설명하지 못했다. 그래도 상관없었다.


내성적.

내성적인 아이.

'내성적'이 무슨 의미인지 이해하게 되기 전까지, '내성적'의 반대에 '외향적'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깨닫기 전까지 나는 그날의 기억을 꽤 좋아했던 것 같다.


4.

외할머니네 집에 온갖 친척이 모인 어느 날의 명절이었다. 화가가 꿈이라고 말하는 초등학생이었던 나는 그림 그리는 걸 굉장히 좋아했다. 특히 아기자기한 소품들-조각 케이크나 카세트테이프, 화장대, 공중전화가 취향이었고 그날은 빵집 케이크 진열대를 그렸다. 그림의 생명은 디테일이었다. 케익마다 크림의 맛을, 토핑의 종류를 달리했다. 각각의 케이크 앞에 가격표도 그리고 싶었다.


그런데 만 원, 만 오천 원 등 현실적인 케이크 가격을 적었다간 왠지 호들갑을 잘 떠는 친척 할머니가 ‘옜다, 케익 한 판 다오!’라며 용돈을 주실 것 같았다. 그런 일이 일어날 것이라는 근거는 없었지만 나는 진성 내향인이었다. 설령 그것이 그림을 향한 칭찬일지라도 부끄럽고 민망해 피하고 싶은 상황일 뿐이었다. 용돈 따위는 별로 중요하지 않을 정도로.


그래서 대충 터무니없다고 생각되는 가격을 적었다. 케이크 가격표에는 5만이라는 숫자가 적혔다. 그 당시 물가로 5만 원은 꽤 큰돈이었기에 5만 원이 적힌 케이크 그림이라면 다들 그냥 지나칠 것 같았다. 완성된 그림을 본 오빠와 아빠가 입을 모아 내게 말했다.


“너 이거 진짜 달라고 일부러 이렇게 써놓은 거지?”


가격 책정 과정에 대해 논리적으로 설명하며 반박하고 싶었지만 그러기에 나는 이미 너무나도 진성 내향인이었다. 그저 오빠와 아빠의 복잡 미묘한 표정이 아직도 생각날 뿐이다. 이런 걸 마음의 상처라고 부른다.


5.

그들에게 고소장을 날려야겠다.

내향인이 되기를 선택할 사람은 없다. 앞서 말한 순간들이 ‘외향적’과 ‘내향적’ 두 가지 표지판이 있는 갈림길에서 ‘내향적’ 쪽으로 나의 등을 밀었을 것이다. 한 번에 한 걸음, 다음번에는 두 걸음, 그렇게 내 길이 정해졌다. 내향적인 우엉.

 

어느 날 지나가는 대화 중에 누군가 ‘눈치 안 보고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게 어린이들의 특권이지.’라고 말했다. 나는 전혀 공감할 수 없었다. 나에게는 그런 시절이 없었다. 나는 먼 훗날, 아마도 언젠가 만나게 될 내 아이가 내향인이 될까 봐 두렵다. 벌써부터 대신 마음이 아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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