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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쓰는 수다쟁이 May 23. 2020

아빠의 포트폴리오(2)

아빠의 포트폴리오는 나의 역사다

눈물의 고물상 뒤지기

그랬던 포트폴리오가 나에게도 역시 소중한 것이었다는 걸 깨달은 건 고3, 수능이 끝난 날이었다. 수능이 끝나자마자 기숙사 짐을 정리하며 공부했던 책을 버리는 것이 우리 학교 나름의 전통(?)이었다. 지긋지긋한 공부가 이제 끝났다는 생각에(더 어려운 공부가 평생 남은 줄 모르고...) 너무 흥분을 하며 기숙사 책장에 있는 책을 다 내다 버렸다. 너무나 과격하게 책을 버려서 옆에서 지켜보던 엄마는 무슨 공부를 뼈 빠지게 열심히 한 학생이었냐는 의문의 눈빛으로 쳐다봤다. 그렇게 모든 책을 내 다 버리고 외식을 하러 갔는데, 문득 수시 준비를 위해 기숙사에 가져왔던 포트폴리오까지 버렸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말 책과 함께 수십 장의 포트폴리오를 버렸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조금은 허탈해하던 아빠의 눈빛이 아직도 생생하다. 하지만 아빠는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내일 학교에 가서 잘 찾아보라며 놀란 나를 다독였다. 다음날 학교에 가 교실과 기숙사를 뒤졌지만 그 포트폴리오는 나오지 않았다. 전날 버린 문제집들은 근처 고물상으로 보내졌다는 말을 선생님께 들었다. 그때 정말 벌렁벌렁 거리는 심장을 부여잡고 엄마와 고물상에 찾아갔다. ‘빵빵한 분홍색 파일철’을 보았냐고 사장님께 열심히 설명하던 것이 기억이 난다. 고물상 사장님 말씀으로는 재활용 가능한 것과 아닌 것을 구분하기 위해 살펴보는데 그 ‘빵빵한 분홍색 파일철’은 보지 못했다고 했다. 그때 그 얘기를 들으면서 얼마나 소리 내어 울었는지 모른다. 사실 포트폴리오는 그동안 내 것이 아니었는데... 12년 넘게 소중히 모아 온 아빠 것을 잃어버린 것이라 미안했다. 그날은 빈손으로 집에 돌아가던 길 위에서 아이처럼 엉엉 소리 내어 울었다.


그리고 집에 돌아왔을 때, 그 ‘빵빵한 분홍색 파일철’을 찾았다는 학교 선생님의 전화를 받았다.(어떤 선생님이었는지는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 기숙사 고3 열람실을 정리하면서 나왔다고 했다. 선생님은 소중한 것은 잘 챙겨야 하지 않냐는 타박과 함께 '빵빵한 분홍색 파일철'을 돌려주셨다.


아빠의 포트폴리오는 나의 역사다

고물상 사건 이후 아빠의 포트폴리오는 내 것이 되었다. 내 포트폴리오가 될 정도로 애정이 생겼다는 게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가끔 본가에 내려가 과거의 나와 마주할 수 있는 건, 아빠의 포트폴리오 덕분이다. 그곳에 가끔은 실소가 나오는 어린 시절 패기 넘치던 나의 기록이 빼곡하게 담겨있다. 아빠의 은밀한 특별 활동인 줄만 알았는데, 결국은 나의 역사가 되었다.


아빠는 포트폴리오를 채우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자신의 딸아이가 자랑스러웠을까. 딸아이의 훗날이 기대가 되었을까. 아빠는 포트폴리오를 만들어 갈 수 있게 자꾸 무언갈 가져오는 딸을 사랑했을까 아니면, 딸을 사랑했기에 그 포트폴리오를 만들었을까. 내 포트폴리오가 되어버린 지금 아빠는 무슨 기분일까.


궁금한 것은 많지만 나는 여전히 물어보지 않는 딸이다. 다만 마음으로 느낄 수 있는 것은, 다정한 표현 한 마디 제대로 못하는 무던한 아버지의 은근한 애정이었을까 하는 것. 아빠는 그렇게 내게 하고 싶은 말을 '육아일기'를 쓰듯 포트폴리오를 모으며 하고 있었는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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