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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토이 Nov 03. 2020

꽃이 폈다

꽃이 지는 것의 아름다움을 배우는 방법

어렸을 때 나는 할머니 집에서 살았다. 잠은 꼬박꼬박 부모님과 함께 잤지만 그 외의 모든 유년시절이 전개되었던 공간이 그곳이었다. 아주 애기 때는 몇 개 없던 화분이 초등학생 무렵에는 발코니 한켠을 가득 채울 만큼 늘었다. 어린 나는 누가 그렇게 화분을 사모으는지 어떻게 두 노인네가 무거운 화분을 옮겨왔는지 그런 건 잘 몰랐다. 내가 아는 건 매해 봄에 피는 주황색 꽃송이들 그게 다였다. 화분 두어 개에 흐드러지게 피던 주황 꽃은 그렇게 십 년을 더 폈다.

나는 아주 어릴 때부터 꽃이 지는 게 싫었다. 시드는 꽃을 보며 젊음과 아름다움 같은 것들을 떠올리지도 못했는데 그래도 꽃이 지는 모습을 못 봤다. 여름인지 가을 인지도 정확히 생각나지 않는 그 계절이 오면 발코니에 나가지 않았다. 꽃이 지는 모습을, 버티고 버티다 흙 위로 떨어지는 모습이 싫어서 그랬다.

조금 크고 나서는 ‘꽃이 진다’는 비유를 이해하게 됐다. 선물 받은 꽃다발을 물에 담아놓고 이파리가 시들기 시작하면 거들떠도 안 보거나. 그래도 아직은 생생한 꽃을 모두 잘라 쓰레기통에 쑤셔 넣고는 했다.

꽃이 지는 게 싫은 것처럼 많은 게 싫어졌다. 더 이상 크는 게 아니라 늙는다는 걸 받아들이는 것도. 죽음이라는 것은 생명뿐 아니라 모든 것에 적용될 수 있는 개념이라는 것도 알았다. 관계가, 기회가, 마음이 하나하나 죽어갈 때마다 많이 슬펐고 조금 무뎌졌다.

내가 스무 살 때 할아버지가 큰 수술을 하셨다. 할아버지가 우는 모습을 그때 처음 봤다. 병문안을 온 나를 데려다주는 할머니의 뒷모습이 유독 든든했다. 태연한 표정으로 조심히 가라던 할머니는 그렇게 조금씩 아팠나 보다.

할아버지랑 할머니는 서로 아팠고 나는 여전히 두 분의 어린 손녀딸이었다. 할아버지가 나를 불러 마지막 남은 멘토스를 쥐어줬을 때. 할머니가 다 잃어가는 정신에도 너만은 내가 키운 자식이라며 반지를 끼워줬을 때. 목구멍이 뜨겁고 숨이 먹먹해도 울지 않았다. 내가 우는 건 두 분에 대한 불효라고 생각했다. 아픈 할머니 할아버지 앞에서는 무조건 밝게. 절대 울지 말고 절대 화내지도 말고.

그저께는 할머니도 그러고 있다는 걸 알았다. 우리 아빠에게 감사합니다,라고 연신 인사하는 할머니는 불안한 내내 내 손을 꽉 잡고 있었다. 정신이 사라져 가는 할머니는 내가 갓난아기였던 1살을, 분홍반이었던 5살을, 할며니 곁을 떠났던 14살을, 할머니가 꿈꾸던 대학에 입학했던 20살을. 그 모든 날들의 나를 돌아가며 맞이했다. 그 오랜 세월 동안 한 번도 보지 못했던 모습을 요즘 들어 가끔 봤다.

가족들을 키우기 위해 악착같이 돈을 모았던 할머니는 그리고 할아버지의 무관심과 무책임함에 괴로워하던 할머니는 내가 모르던 사람이었다. 내가 할머니의 가장 가까운 친구이자 딸이자 손녀이던 24년간 할머니는 나에게 한 번도 기댄 적이 없었다. 내 탓을 하고 싶지는 않지만 내가 걱정 없이 행복했던 이유는 그리고 할아버지를 더 사랑했던 이유는 다 할머니의 괴로움 덕분이었던 거다.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아프기 시작한 이후로 식물들은 여전히 생생했지만 꽃은 더 이상 피지 않았다. 다른 가족들은 할머니 집의 사계절을 모르지만 나만은 알았고 나만 알아야 했다. 어떤 그림자가 드리운 건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번 주 화요일에 할머니 댁에 갔다. 할아버지가 수술을 하게 되셔서 그 집에는 할머니와 보호사님 두 분이 계셨다. 할머니는 불과 얼마 전까지도 꼬박꼬박 식물에 물을 주셨다고 했다. 보호사님의 ‘할머니 할아버지한테 이렇게 잘하는 손녀들이 없다’는 말이 가슴 한편에 비수로 다가왔다.

정말 오랜만에 발코니에 나갔다. 꽃이 지는 게 무서웠던 나는 꽃이 피지 않는다는 걸 알게 된 그날 이후 발코니를 나간 적이 없었다. 나가지를 못했다. 그래도 이제는 그 삭막하고 또 싱싱한 식물들이 익숙해지기도 했고 다른 많은 죽음에. 그걸 견디는 방법에도 익숙해졌으니까.

그 많은 화분 사이에서 꽃이 폈던 게 어떤 화분이었는지 한눈에 알았다. 잎이 길고 진한 초록색. 그 사이로 주황색이 비쳤다. 이야기를 나누는 보호사 분과 사촌에게 아무렇지 않게 꽃이 폈다고 했다. 힘이 넘치는 풀잎 사이로 비록 작고 구겨져 있다 해도 분명 꽃이 피었다. 매일 죽음을 관찰하고 돌보는 보호사님은 내 마음을 알았는지 이런 말을 해주셨다. 집주인이 아프면 꽃이 피지 않는다고.

아마 나는 그 작은 꽃이 지는 것도 여전히 무서울 것 같다. 갈날이 몇 번 남지 않은 할머니 집에 갈 때마다 주저하며 확인하고 어느 날은 결국 슬퍼질지도 모른다. 그래도, 꽃을 피워준 할머니를 위해 할아버지를 위해. 마지막까지 마주하고 살피며 공감해야지. 꽃이 지는것를 그저 바라볼 수밖에 없지만 자꾸 들여다보고 생각하면서 이제는 꽃이 지는 것의 아름다움을 배워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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