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아빠가 술을 끊었다.
엄마의 뜬금없는 첫마디였다.
아빠가?
진짜요? 왜요?
왜긴. 세월에 장사 없다고, 이젠 몸이 술을 못 이기는 게지.
믿을 수 없었다. 내가 기억하는 한, 아빠의 저녁엔 늘 소주 반 병이 곁들여졌다. 기분이 좀 좋으시면 한 병을 드시는 날도 있으나 언제나 딱 반 병의 반주였다.
네 아빠 먹은 소주 줄 세우면 지구 몇 바퀴는 돌았을게다. 소주 회사에서 표창장 하나 안 주나 몰라.
항상 같은 멘트의 엄마 잔소리이나, 또 그렇게 열심히 아빠가 좋아하시는 안주를 늘 대령한다. 부부란 저렇게 투닥거리며 미운 정 고운 정이 쌓이는 걸 어릴 때부터 봐 왔다.
엄마 손끝에서 장만된, 어느 식당도 부럽지 않은 각종 안주들은 소주 반 병과 함께 아빠의 하루 고된 노동의 보상이자 위안이었다.
안도현 시인의 "삼겹살에 소주 한 잔 없다면 , 아, 이것마저 없다면." <퇴근길>이란 두 줄 짧은 시는 아빠를 위한 시였다. 가장의 무게를 이렇게 짧아도 폭풍 공감하게 쓸 수도 있음에 감탄했었다.
어린 시절 저녁 끼니 때가 지나도 오지 않는 아빠는 동네 친구분들과 대폿집에 계실 때가 가끔 있었다. 아빠를 모셔 오는 심부름을 종종 갔었다. 엄마는 친척이 왔다는 핑계를 대라며 꼭 모셔오라는 특명을 내렸다. 연기 뿌연 가게 안에 친구분과 둘러싸인 자리에 쭈삣거리며 다가간다.
어이~~딸.
이미 붉어진 얼굴로 까슬한 수염과 함께 내 뺨을 부비며 안아주신다.
아빠, 고모 오셨어요. 아빠 찾으세요.
진짜로?
하며 내 얼굴 두 눈을 지긋이 보신다.
이미 내 얼굴은 아빠보다 더 붉어진 걸 보셨다.
허허, 거짓말도 못하는 널 보냈구나.
그래, 가자~!
하며 두 손 잡고 집으로 오는 길, 아빠는 나의 하루 일과가 어떠했는지, 친구랑 잘 지냈는지 물으셨다.
집 근처 구멍가게에 들러 빙그레 아이스크림 한 통을 사주시곤 했다. 얼른 형제들과 먹고싶은 맘에 설레어서 잡은 아빠 손을 흔들거리며 돌아오곤 했다.
평소 엄하신 아빠도 이 날은 다정하여 뭣도 모르지만, 술은 아빠를 기분 좋게 하는구나 그랬다.
건강 전도사인 아빠는 드시는 모든 믐식이 제각각 몸에 최고였다. 이건 어디에 좋고, 저건 어디에 좋다는 척척박사 같은 소리에 우리는 고개를 끄덕이며 듣는다. 좀 커서는 그러려니 하고, 한 귀로 듣기도 했으나 지나고 보니 집밥이 최고인 건 진리였다. 생선살만 딸들 먹기 좋게 발라 주시고, 대가리며 지느러미부터 드시면서 이게 진짜 맛있는 거거든 하셨다. 커서야 아빠의 지극한 사랑임을 알았다.
아빠의 금주 소식이, 뵐 때마다 느는 흰머리만큼 가슴이 아린다. 막대 잡고 막아도 지름길로 오더라는 세월 속에 아빠의 기력이 날로 쇠할 일만 남았다 여기니 불안과 조바심도 난다.
아빠, 술 말고도 맛있는 거 많아요.
이제는 술로 위안 받지 말고, 우리 같이 건강 챙기며 행복하게 삽시다. 세월 이기는 장사는 못되더라도 세월과 함께 멋지게 여물어 가는 아빠가 자랑스럽습니다.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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