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절의 시작인 봄보다는 여름을 이겨낸 후, 소멸의 겨울 문턱에서 마지막 온몸을 불사르고 쇠락후 겸허히 낙하하는 계절에 더욱 마음이 동하는 건 내 인생시간과 맞아서일까. 겨우 한 생을 살아가는 짧은 우리네 삶과 닮은 사계절 중 내 삶도 가을을 향해간다는 아쉬움일 것이다. 풍성한 수확은 못할지언정 뜨거운 여름을 이겨낸 기특함도 있을 것이다. 그리하여 갸을은 차분해진다. 여름의 열기를 식혀야 한다.
그리하여 우리의 가을 주말은 쉴 틈이 없다.
가까운 곳은 당일로, 조금 먼거리는 일박을 하면 우리나라에서 못 갈 곳이 없다.
지인이 아직 가보지 못했고, 꼭 가보고 싶다는 소망을 적극 받아들여 일박 일정으로 <순천행>을 떠났다. 우리에게는 익숙한 곳이나, 이 계절감을 느끼기에 더 없이 좋은 곳이기에 기꺼이 동행했다. 우선 <순천만국가정원>을 들러 가을 정취부터 먼저 만끽하기로 했다. 7천만이 방문했다는 곳에 아직 가보지 못한 친구의 바빴던 삶에 위로도 할 겸 오랜만에 방문한 국가정원은 역시나 잘 가꾼 귀한 곳이었다. 너른 부지 어느 한 곳 버릴 떼 없이 잘 손질한 곳은 손님맞이로 북적였다.
다음은 바로 주목적지인 <선암사>로 이동했다. 유네스코에 등재된, 아름다운 천년고찰 <선암사(仙巖寺)>이다. 전라남도 순천시의 조계산에 위치한 사찰로, 한국불교 태고종의 총본산이다. 2018년, '산사,한국의 산지승원'이라는 명칭으로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되었다.
엄청난 보물과 기념물, 문화재 자료를 보유한 고찰임에도 태고종과 조계종 간 소유권 분쟁 탓에 관리가 잘 안 돼서인지 선암사는 전국에서 문화재를 가장 많이 도난당한 절이기도 하단다. 선암사는 현재 총 8건 33점의 문화재를 도난 당한 상태인데 그림(불화)이 5건 27점으로 대부분을 차지하지만 부도(승탑) 2건 5점, 동종 1점도 포함돼 있다. 2023년에 그림 3점을 찾아 회수해 오는 등 조금씩 되찾고 있기는 한데 매우 더딘 상태라 하니 안타까울 뿐이다.
승보사찰 순천 <송광사>와는 조계산 등산로로 이어져 있다.
사찰 들어서기 전 입구 산책로를 더 좋아하는 이들도 많다 할 정도로 걸으며 자연을 만끽하기에 더 없이 좋은 곳이다. 옆으로 흐르는 시원한 계곡 소리에 취할 때쯤 보물 다리를 만난다.
<선암사승선교(仙岩寺 昇仙橋)>는 보물 제400호로, 길이 14m, 높이 4.7m, 폭 4m로 숙종 39년(1713) 호암화상이 6년 만에 완공한 다리이다. 기저부에 별다른 가설이 없고 홍예(虹預) 전체의 문양은 반원형을 이루고 한 개의 아치로 이루어졌다. 다리 중심석 아래에 석재가 조그맣게 돌출되어 있다. 고통의 세계에서 부처의 세계로 건너는 중생들을 보호 수용하겠다는 의지가 담겨 있다.
선암사의 핫플, 포토존인 <승선교> 아치형의 돌다리가 주위 계곡과 어울려 아름답다. 진정 여기를 지나면 신선의 세계로 갈 법한 풍경이다. 바로 옆에 서 있는 <강선루>를 보더라도 신선이 내려왔을 법한, 신선조차 좋아 했을 곳이구나 싶다.
조금 더 걷다보면, <조계산 선암사> 현판을 단 일주문을 만난다.
문을 지나 마당에 들어서면 바로 보이는 <대웅전> 앞에 좌우로 서 있는 2기의 <삼층석탑>이 있다. 이 역시 보물 제395호이다. 2단으로 이루어진 기단(基壇) 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올린 형태이다. 규모와 수법이 서로 같아서 같은 사람의 솜씨로 동시에 세워진 것임을 알 수 있다. 아주 단정한, 딱 삼층석탑의 전형을 보여준다.
<팔상전> : 여기도 부처님의 일대기를 8폭 그림으로 모신 팔상전이 있다.
<무우전>과 <각황전> : 진정 여기서는 근심 걱정을 잊을 것 같은 무우의 마음이 들었다. 전각 뒷편으로 이어지는 좁은 통로에 각황전 입구라는 안내가 보인다. 놓칠 수 없다. 쇠락한 단청 그대로를 간직하여 더 옛스럽고 우아한 전각이다 때마침 내리는 부슬비와 어울려 더욱 차분해진다.
다시 돌아나오면, 거창한 종교적 의미를 떠나 마음이 정화된 듯한 깨끗함이, 아직 푸른 잎을 달고 있는 키 큰 은행나무와 돌담과 마당의 파릇한 잔디와 어울려 더욱 무우의 상태가 된다.
경내 여기저기에 꽃나무가 꽤나 많이 보이는데, 특히 매화가 유명해 이른 봄에 상춘객들이 많이 찾는 절이다. 심지어 이 절에서 가장 오래된 매화 두 그루는 <선암매>라 불리는 수령 600년의 매화로 구례 화엄사, 장성 백양사, 강릉 오죽헌의 매화들과 함께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어 있다.
이른 봄에 매화꽃들을 한가득 품고 있을 나무를 상상하며, 반드시 상춘하러 와야겠다 싶었다.
경내를 완보하시던 스님께서 은근히 부르시며, 어디서 왔느냐 등 질문을 하시더니 따라오라며, 좋은 구경시켜 주겠다신다. 의아해하며 따라나섰더니, 조그마한 부엌을 지나 뒷마당에 위치한 약숫물 받이를 만나게 해 주셨다. 네모, 동그라미 바위로 이어지며 졸졸졸 흐르도록 만든 모습에 지혜로움도 재미도 느껴져 한참을 구경했다. 여기서 찍은 사진이 작년 사진전에 우승을 했다며, 꼭 보여주고 싶은데 외진 곳에 있어 사람들이 놓치고 간단다. 그 마음이 감사했다.
소설가 조정래의 아버지가 이 절의 스님이었다는데 딱 그 분 같은 느낌이었다.
오늘의 행운을 오래 기억해야겠다.
휘어져 처진 소나무 앞에서 소원을 빈 후, 마련된 작은 종을 동전으로 맞춰 소리를 내게 해 놓았다. 시주의 또다른 방법일지나, 역시 바라는 게 많은 중생들 제법 시도를 하고 있다. 못 맞춘다고 자비로운 부처님이 소원을 취소할 리 없으나, 기분에 여러 번 시도하는 이를 보며 그 간절함이 느껴져 웃음지었다.
선암사에서 가장 특이한 건물 중 하나로 해우소(뒷간)가 있다. 1920년대 지어진 것으로 추정되며, 간판을 ㅅ계합용병서를 넣어 우횡서(오른쪽에서 왼쪽을 읽어가는 방식)로 써서 'ㅅ간뒤(발음은 뒤깐)'로 쓰여져 있다. 누구나 이용할 수 있었지만 오래전에 지어진 역사가 있는 건물이라서 내부는 푸세식이다. 그로 인해 관광객들이 이용을 꺼렸는지 근처에 현대식 화장실을 새로 만들었다.
이를 소재로 다룬 정호승 시인의 시도 있다.
선암사 -정호승
눈물이 나면 기차를 타고 선암사로 가라.
선암사 해우소로 가서 실컷 울어라.
해우소에 쭈그리고 앉아 울고 있으면
죽은 소나무 뿌리가 기어 다니고
목어가 푸른 하늘을 날아다닌다.
풀잎들이 손수건을 꺼내 눈물을 닦아주고
새들이 가슴 속으로 날아와 종소리를 울린다.
눈물이 나면 걸어서라도 선암사로 가라.
선암사 해우소 앞
등 굽은 소나무에 기대어 통곡하라.
어느 새 다가오신 스님께서 가리키는 곳을 보니, 범상치 않은 글귀가 보인다. 추사 김정희의 서체 그대로 보존된 현판이 눈에 들어온다. 그 앞에 서니, 붓끝에 그의 힘이 느껴진다.
시간의 흐름이 멈춘 듯, 천년의 시간을 보존한 고찰이 주는 위안은 직접 가보지 않고서는 알 수 없다. 계절마다 입는 색깔과 품는 향이 다른 고차은 종요를 떠나 우리의 소중한 문화재이다. 그 가치를 알고서야 더욱 지켜지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