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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주리 Apr 11. 2021

남자라서 못하는 게 아닙니다

역할을 바꾸고 서로의 마음을 이해했다


아빠의 육아 휴직 두 달 차. ‘남편이 아이를 잘 돌볼 수 있을까?’ ‘나만큼 꼼꼼하게 집안일을 할 수 있을까?’ 마음속에 간직하고 있던 의심들을 하나씩 꺼내 따져보기로 했다. 아침, 저녁으로 남편의 뒷모습과 집을 관찰했다.




* 주방일

일요일 오후라 비어있음

남편은 육아 휴직을 시작하며 냉장고에 붙일 적당한 크기의 화이트보드를 구입했다. ‘서로의 일정을 적는 건가? 냉장고 속에 뭐 있는지 적어두는 건가?’ 나의 예상은 빗나갔다. 남편은 일주일 단위로 매일 저녁 식사 메뉴를 결정하고 미리 적어두었다. 월요일은 볶음밥, 화요일은 생선구이, 수요일은 돈가스..! 게다가 화이트보드 옆에는 아이의 어린이집 식단표도 붙여두었다. 점심 식사와 저녁 식사 메뉴가 혹시라도 겹치지 않도록, 아직 말을 못 하는 아이가 하루 두 끼를 같은 음식으로 먹지 않게 하기 위함이라고 말했다. 놀라웠다. 원래도 요리를 좋아하는 남편이었지만 이렇게까지 세심하게 매일의 메뉴를 정하고 실제로 행할 줄은 몰랐다. 덕분에 엄마 휴직을 하며 다이어트를 하겠다는 나의 야심 찬 계획은 물 건너갔다(맞다, 변명이다)



* 청소

이틀에 한 번 청소기 돌리기를 해 줬으면 했지만 입 밖으로 내지는 않았다. 알아서 잘하겠지 라는 믿음을 가지려 노력했다. 그 결과 우리 집은 어떻게 변했을까? 놀라울 정도로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다. 남편이 며칠에 한 번씩 청소기를 돌리는지는 모르겠지만(물어보지 않았다) 아이가 하원하고 집에서 한 시간만 놀면 결국 똑같이 더러워졌다. 내가 그렇게 기를 쓰며 청소했던 바닥이나 남편이 대충 청소하는 바닥이나 별 차이가 없었다. 그래, 이제야 알았다. 남편이 나의 집안일에 대한 노고를 몰라줬던 이유를 이제야 알았다. 아무리 열심히 해도 아이 키우는 집은 다 거기서 거기였던 것이다. 남편이 일부러 나를 무시하거나 내려다보기 위해서가 아니라, 정말 몰라서 몰라준 것이었다. 내 노고가 눈에 보이지 않았을 뿐이었다. 역할을 바꾸니 이제야 남편의 마음이 이해됐다.



사실 남편은 화장실 거울 닦기라던가 육아 퇴근 후 놀이 매트 위 정리 같은 자잘하고 티 안나는 일들은 하지 않았다. 내 눈에는 거울 위의 얼룩이 나 좀 지워달라고 절규하고 있는데 남편 눈에는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이 좀 놀라웠지만, 그렇다고 해서 남편에게 그걸 요구할 수는 없었다. 내가 놓친 집안일에 대해 남편이 불평불만을 가지지 않는 것처럼 나도 조용히 입을 닫았다. 그리고 손을 움직여 얼룩을 닦았다. 불편한 사람이 해도 될 정도의 일이었기에.



* 빨래

1.5일에 한 번씩 했던 빨래에 대해 남편은 짐짓 놀라는 듯했다. 우리 집은 3인 가족인데 왜 이렇게 빨래가 많냐며, 오늘 아침에도 돌렸는데 왜 벌써 빨래가 이렇게 쌓였냐며 입을 다물지 못했다. 아이 목욕을 시킨 뒤 빨래를 돌리면 육아 퇴근 후에는 건조기에서 빨래를 꺼내 개고 각자의 옷장에 넣어야 한다. 분명 퇴근을 했는데도 집안일이 끊이지 않는 이 미스터리를 드디어 남편이 이해하기 시작했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히 만족스러운 엄마 휴직이었다. 산더미 같은 빨래를 개고 있는 남편의 옆에 슬쩍 앉아 말을 걸었다. “도와줄까?”

남편이 독수리 눈으로 답했다. “도와주다니? 당연히 같이 해야지.” 그래, 그게 바로 내 마음이었어!



* 양육

아이의 주양육자로 지내는 동안 남편은 나에게 종종 물었다. “왜 이렇게 화가 나 있어?” 

그럼 나는 이렇게 답했다. “엄마(주양육자이자 주부)는 원래 화가 나!! 왜 그런지 모르겠는데 그냥 매일 화가 나!!”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내 눈치를 보던 남편. 그런데 상황이 180도 바뀌었다. 퇴근을 하고 집에 돌아오면 남편은 소파에 기대앉아 멍한 표정으로 핸드폰을 바라본다. 아이는 tv를 보며 즐거워하고 있다. “왔어? tv는 방금 틀어준 거야.” 묻지도 않았는데 미디어 시청에 대한 변명 아닌 변명을 하며 나를 무표정하게 바라보는 남편. 이내 핸드폰으로 고개를 돌린다.


육아를 하며 이상하게 화가 많이 났었다. 아이를 내 뜻대로 키우겠다는 마음은 애초에 없었는데도 어쨌든 아이와 1:1로 많은 시간을 보내는 것은 나 자신의 밑바닥까지 들여다봐야 할 정도로 힘든 일이었다. 아이가 어린이집에 가야 엄마가 청소도 하고 일도 할 텐데, 아이는 어린이집에 가기 싫단다. 여기서 화 게이지 10 올라간다. 겨우 등원을 시키고 카오스 같은 집을 정리하고 나면 어느새 하원 시간. 오늘만큼은 웃으면서 아이와 지내고 싶었는데 아이는 어린이집 문을 열고 나오면서부터 나에게 온갖 짜증과 떼를 부린다. 선생님께 웃으며 인사를 하고 난 뒤 어금니를 꽉 깨물며 다시 화 게이지 30 증가. 두 시간을 놀이터에서 뛰어놀고 집에 돌아와서 손을 씻자고 하니 싫다며 도망간다. 깨끗이 청소해놓은 집에 모래가 날리는 광경에 화 게이지 20 증가. 퇴근한 남편이 ‘오늘 청소했어?’라고 묻는 순간 화 게이지 40 증가. 애써 차려놓은 밥상을 장난치다가 엎어버리는 아이를 보며 화 게이지 폭발!!! 수습불가.


아빠 어금니 꽉 깨물었다..? 이제 그만 집에 가지?


이런 나를 보고 왜 이렇게 화가 나 있냐고 묻던 남편. 주양육자 아빠가 된 뒤 말하지 않아도 예전의 이런 나의 감정을 그대로 느끼고 있는 듯 보였다. “괜찮아? 오늘 설이가 말 안 들었어? 당신 많이 힘들게 했어?” 물을 필요도 없다. 핸드폰을 바라보는 그 눈빛만 봐도 느껴진다. 동지여. 드디어 너도 육아하며 화가 나는구나!!




그동안 아무리 설명하고, 읍소해도 나의 감정을 이해하기 힘들어했던 남편. 완벽한 아빠이자 좋은 배우자였음에도 주양육자+주부인 나의 마음을 온전히 이해하는 것을 힘들어했다. 전업주부라는 자리는 그 정도로 이해받기 어려운 자리였다. 그런데 겨우 두 달이라는 시간 동안 역할 하나 바꿨을 뿐인데 이 정도로 나의 감정을 완벽히 이해하다니. 진작 했어야 했다. 엄마 휴직!! 남자라서 육아와 집안일을 못 하는 게 아니었다. 내가 여자라서 잘하는 게 아닌 것처럼! 그저 열심히 했기 때문에 하게 되는 것이었다.




2021년 3월부터 8월까지 예정된 나의 엄마 휴직. 실시간으로 달라지는 상황과 감정을 있는 그대로 정리해보려 한다. 과연 엄마 휴직이 모두 끝난 뒤, 다시 예전의 나의 자리로 돌아가면 어떤 변화가 있을까. 긍정적인 변화든 부정적인 변화든 모두 가치로울 것이라 믿는다. 시작했으니 이미 가치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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