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정그라미 Jun 26. 2024

니 이름이 뭐니?

꿈과 책과 힘과 벽이라고… 할까?

나는 똥구멍이 찢어지게 가난하게 자랐다.  그런 우리 집에 책이라곤 어린이 명작동화 100권, 세계 위인전 전집이 다였다. 술 취한 아버지가 책을 파는 친구의 부탁을 못 이겨 장기 할부로 구입한 것들이다.  국민학교 시절 내내 내가 읽은 책은 그것들이 전부다. 중고등 시절에는 입시 위주의 교육을 핑계로 책에서 멀어졌다. 대학생이 되어 고전, 김훈과 밀란쿤데라, 하루키, 박경리까지 닥치는 대로 읽어댔지만 내실 없는 활자 읽기에 불과했다.


내가 책이라는 것을 진정성 있게 읽기 시작한 것은 대학원에서 철학을 전공하고부터다. 윤리교육과라 알고 진학했지만 수업은 모두 철학이었다. 맨땅에 헤딩하는 것이 얼마나 처참한지 깨지고 부서지면서 알게 되었다. 힘든 과정이었지만 내가 배운 게 있다면 생각하는 책 읽기가 가능해졌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대단한 철학이나 사색의 힘이 생긴 것은 아니다. 그냥 생각이라는 것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이후 나름 책 읽기가 즐거워졌고 많은 시간을 책을 읽으며 보냈다. 어떤 책에서 책 읽는 여자는 위험하다고 했다. 동의한다. 책 읽기에 빠지면 살림도 육아도 내팽개치고 어디론가 사라지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육아와 직장일에 지쳐있을 때 내 소원은 다음과 같았다.


캐리어 가득, 읽고 싶은 책을 꾹꾹 눌러 담아 에쿠니 가오리 소설에 나오는 여주인공처럼 온천이 딸린 호텔에 머무르고 싶다.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아무도 만나지 않고 방에 틀어박혀 목욕과 와인, 책 읽기만 하고 싶다. 딱 일주일만.


죽을힘을 다해 하루를 살아내는 우리는 다 소박한 꿈 하나쯤은 가지고 살 것이다. 그것이 독서가 아니라 여행일 수도 쇼핑일 수도 운동일 수도… 자신의 취향이 담긴 소소한 소원하나. 그 작은 소원하나를 제대로 이루지 못하고 우울에 갇혔던 쪼끔 모자란 인생 선배로 그들에게 말해주고 싶다. 내가 며칠 사라진다고 크게 달라지는 것은 없다. 단지 우리에게 주어진 이름 때문에 용기를 내지 못할 뿐이다.


그런데 말이다.

나의 이름은 엄마도 마누라도 선생님도 아닌 정그라미다.

어쩌다 한 번은 내 이름에 충실하게 나로 살아도 된다. 김과장, 아빠, 사모님 다 버리고 내 이름으로 살아야 한다. 그래야 오래도록 그대들이 지키기를 원하는 아름다운 것들을 지켜낼 수 있다. 내 이름이 무엇인지 잊어버린 탓에 인생의 아름다운 한 시절을 암흑 속에서 보냈다.


책이야기를 하려고 쓴 글이 또 산으로 가버렸다.

산이면 어떤가. 산속에 있는 배는 특별하다.

나는 핑계를 참 잘 만드는 재주가 있다는 걸 방금 알았다.

환장한다.


이전 04화 지랄도 풍년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