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정그라미 Jun 24. 2024

지랄도 풍년

샤넬을 입은 책

책장을 펼치자 향기가 코를 찌른다.

은은해야 하는데...


얼마 전 글쓰기 모임의 지인이 향수를 소재로 정말 멋진 글을 썼다. 의학과 관련된 분야의 직업을 가진 분이라 글에서 전문성과 서정성이 함께 묻어났다. 


나도  향수를 좋아한다. 그 작가님 글의 소재가 된 향수를 궁금해하자 친히 샘플을 보내주었다. 샘플 향수가 꽤나 여러 병에, 향수브랜드의 비누까지. 감동이었다

"시향지에 향수를 뿌려 책갈피로 써 보세요."

책이 향기를 품을 수 있겠구나. 굿.


한동안은 책 읽기에 매몰되어 있었다. 서평단을 신청해 받은 책들로 책탑이 만들어졌고 사유를 위한 책 읽기가 아닌 서평 쓰는 AI가 되어가는 기분이었다. 의무감에 빠진 유희는 즐거움이 상실된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끼고 조용히 항복을 선언했다. 고백하자면 아직 나는 서평 부채 자다. 꼭 책을 소개하겠다는 약속은 지킬 것이다. 다만 시간이 걸림에 죄송할 따름이다.

3개월 남짓의 서평 작성에서 해방되자 한동안은 책꽂이 에도 가지 않았다.


중간 없는 지랄 맞은 성격 탓에 지금은 글쓰기에

빠져있다. 다른 점이 있다면 꼭 해야 한다는 외부적인 압력이 없고 정해진 기한이 없다. 내가 정해놓은 나와의 약속에 충실하면 그뿐이다.


제주 여행을 포기하고 그날 차사고까지 났다.

정말 대환장 파티.

마음을 진정시키기 위해 책을 펼쳤다. 책에서 은은한 향기가 난다. 지인의 조언대로 시향지를 꽂아 두었더니 책에 향이 배었다. 기분이 좋았다. 막 책이 읽고 싶어 지는 기분.


이 기분을 즐기고 싶어 책 여러 권을 가져다 향기를 채워주기로 했다. 문제는 시향지가 없다.

그래? 그럼 직접 느끼게 해 주마.

내가 가장 사랑하는 향수 샤넬 코코 마드모아젤 오 드 빠르펭. 대중적이면서도 은은하다.

지난번 제주도 여행에서 돌아오던 날 사랑하는 동생이 선물해 줘서 더 애착이 가는 향수였다.


무언가를 사용할 때 그 사람이 생각나게 하는 것은 참 좋은 일이다. 그런 생각으로 사람들은 향수를 선물하지 않을까? 좋은 냄새로 기억되길 바라며.


책장에 향수를 뿌렸다.

오래오래 가라고 듬뿍 적셔주기로 했다.

이런 미친...

분무 방향을 거꾸로 해 향수가 내 손을 따라 질질 흘렀다. 그게 아까워 책장에 문질렀다.

냄새가 진동을 한다.

아휴 모지란 인간아. 적당히 좀 하자.


뭐든 과하면 모자람만 못하다. 알면서도 어찌 이리 미련스럽게 실천이란 게 안 되는 걸까?

열심히 사고를 처리 중인데 존경씨가 퇴근해서 들어온다.


"마눌. 사고 났다더니 파스 붙였나? 냄새가 데"

환장한다.










이전 03화 19금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