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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와이에이치 Aug 13. 2020

페도라여, 안녕

  우물 안에서 가끔씩 내리쬐는 해를 받아가며 겨우겨우 연명하듯이 보낸 나의 어느 한 때.

십 대 때도 없었던 사춘기를 이십 대에 겪으며 객기 충만한 질풍노도의 순간들을 온몸으로 겪어내었다. 그 무렵의 어느 때부터는 눈썹 언저리에 했던 피어싱도 모자라 귓불에다가는 새로운 피어싱을 하는 일이 잦아졌다.


우울감이 깊어질수록 더 크고 멋진 피어싱을 하고 싶었다. 어느 날 다시 찾은 단골 가게에서는 더 이상의 큰 피어싱은 안 된다고 하셨다. 여자애 귀가 너무 흉측해지면 안된다고 나를 만류하는 과정에서 사장님이 내 귓불에 박힌 피어싱을 빼어 내며 거울을 들어 올리셨다.


휑하게 뚫린 채 구멍 안으로 보이던 거리의 풍경이, 약하게 불어온 바람 탓에 나를 비추던 거울 속에서 볼품없이 왜곡되어 팔락거리고 있었다.


그날의 모습은 가히 충격적이었고 그제서야 중독된 피어싱을 멈출 수 있었다.


  귓불의 구멍이 작아지기만을 기다리며 이제는 모자를 쓰기 시작했다.

옷은 대충 입어도 모자는 예쁘고 특이하고 멋진 걸 써야만 했다.

옷보다 모자가 더 많아서 가족들의 잔소리도 종종 들어야 했다.

참새가 방앗간을 못 지나치듯이 모자가게가 보이면 그곳은 이내 단골집이 되기 일쑤였다.

재료나 패턴 색상 등등 일반적이지 않은 것들에 눈이 갔고 점점 특이한 것들을 사 모으게 되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이 가진 예쁜 헤어스타일이나 컬러를 뽐내고 싶어 한다. 그 옛날 나처럼 머리카락을 다 가리고 무턱대고 모자만 고집하던 여자애는 조금 드물었을 테지만, 그럼에도 사람들이 종종 그런 모자는 어디서 사면 되느냐고 나에게로 다가와 묻곤 했다.  사실 사계절 내내 모자를 너무 쓰고 다녀서 머리에 탈모가 올 지경이었지만 사람들의 물음에 나는 의기양양해졌고 모자가 더 좋아질 뿐이었다.



  어느 날 길을 걷다가 한 잡화점에 들어갔다. 그냥 구경만 하러 간 곳이었는데 보랏빛 페도라가 눈에 띄었다. 그것을 보자 심장이 두근거렸고 입이 귀에 걸렸다. 그때부터 나는 다른 모자들은 다 제쳐두고 몇 년 동안 오로지 그 보라색 페도라만을 주야장천 쓰고 다녔다.  페도라는 좀 특이했다. 평범한 내가 그 모자를 살포시 눌러쓰는 순간 없던 자신감도 같이 장착이 되어 나에게서 밝은 기운이 뿜어져 나오게 했고 우물에 갇혀있다가도 그 모자를 쓰면 스위치가 켜지듯 양지로 걸어 나와 당당히 걷고 있는 나 자신을 만날 수 있게 해 주었다. 어릴 때 좋아했던 요술공주 밍키처럼 나에게는 마술봉 대신에 마술을 부리는 모자가 있었다. 보라색 페도라를 쓰고 있는 한 나는, 편안하고 좋았다. 어딜 가든 페도라는 나와 늘 혼연일체가 되었다.

많은 이들이 우스갯소리로 패션의 완성은 얼굴이라 했던가.

하지만 나에게 패션의 완성은 역시 이 페도라였다.


  그렇게 애지중지 했던 마법 같던 나의 페도라는 시나브로 사라졌다.

어느 날 보니 그렇게 되어 있었다. 어디에서 사라진 것인지 도대체 알 길이 없지만, 촛불처럼 흔들리던 나에게 마술을 부려 언제까지고 나로 돌아올 수 있을 때까지 기다려 주었던 고마운 페도라였다. 나다움을 가져다주었던, 나를 나답게 만들어 주었던 보라색 페도라.

더 이상은 마술을 부리지 않아도 될 만큼 나는 그때에 비해 온전해졌다. 마치 한 여름밤의 꿈처럼 나와 혼연일체가 되어 주었던 페도라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말았지만.

나를 보듬어 주느라 고생이 많았던 페도라여, 안녕



  나는 요즘 바다에서 떠밀려온 유목이나 깨져서 날카롭게 서있던 뾰족한 날이 몽돌처럼 될 때까지 오랜 시간 파도에 휩쓸려서 깎이고 동글동글해진 각양각색의 유리조각들, 매년 쏟아지는 재활용이 안 되는 해녀복을 미술로 재활용해 재해석하는 '쓰레기 up 씀'이라는 리싸이클링 미술수업을 받고 있다. 그곳에서 환경에 관심을 가진 열명남짓의 평범한 사람들이 모여 각자의 속도대로 자신이 구상한 이런저런 작업을 해 나가고 있다. 그런데 오늘 어느 한 분이 내 모자에 대해서 물어보신다. 이제 더 이상 예전처럼 모자를 특별히 고집하진 않지만 어느 날 그런대로 맘에 드는 모자를 하나 발견했다. 어찌 보면 할머니들이 쓰고 다닐 것만 같은 모자 같기도 하고 또 어찌 보면 평범하기 짝이 없어 보이는 그냥 동그란 모양의 시장표 검정색 모자이다.


"어머, 모자가 참 잘 어울리시네요~, 그런 모자 좋아하시나 봐요? 화가 모자!"

화가 모자라고 하니 괜스레 민망해서 웃음이 나온다.

"그런 모자는 왜 쓰는 거예요?"

나는 그냥 이 모자가 좋아서 쓰는 건데 진짜 궁금해하시는 것 같은 커다란 눈망울에 뭔가 답을 하고 싶어 진다.

"모자를 쓰면 내가 완성이 돼요, 나답게"


나는 웃어 보이며 피어싱에 혹은 모자 속에 숨어 지내던 지난날의 나를 잠시 생각해본다. 그런 가시적인 오브제 뒤에 의존해서 살아야 했던 몸만 컸던 어른 아이. 지금의 나는 그때와는 달리 모자가 없어도 충분하다. 다만 뭔가 허전할 때 써주면 역시 편안하고 좋긴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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