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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땡그리 Nov 29. 2020

할까 말까, 일단 고!

나에게로 떠나는 여행 - 산티아고 순례길

스물다섯 살의 배낭여행, 2019년도 산티아고 순례길 여정을 정리한 글입니다.

저만의 여행기가 차곡차곡 쌓여 한 권의 책이 되는 그 날을 꿈꾸며, 오늘도 씁니다.


산티아고 21일 차 : Leon - Hospital de Órbigo (31.76km)


 거뭇했던 하늘이 서서히 맑아지기 시작했다. 도시를 떠나기 전, 레온 성당을 다시 한번 들렸다가 떠나기로 했고 눈으로 사진으로 담기 시작했다. "우리도 하나 찍어줘." 성당을 배경으로 쑥 언니와 썬 오빠를 찍기 위해 카메라를 들었다. 서로를 바라보며 동시에 미소 짓는 모습을 보니 재밌기도 하고 한편으로 너무 예뻐서 덩달아 웃음이 났다. 


 조금씩 파랗게 변해 가는 하늘색도 좋고, 발걸음도 가벼워 신이 난 상태로 걸었다.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걷다가 한 가게 앞에 멈췄다. 작은 팻말에 추로스를 판다고 적혀있는 걸 보고 차마 그냥 지나칠 수가 없어 일단 멈추긴 했는데 들어갈지 말지 망설여졌다. 들어가? 말아? 하필 잘 걷고 있는 이 타이밍에 마주치다니. 먹고 가자니 걷던 흐름을 깰 거 같고, 안 먹자니 함께 못 먹어본 게 아쉽고. 하지만 찰나의 고민이었을 뿐, 코 끝에서 끊임없이 맴도는 달달한 향을 뿌리치고 갈 만큼의 의지는 없었다. 

다시 한 번 레온 성당, 갓 나온 추러스와 핫초코

 기계에서 반죽을 쭉쭉 뽑아내는 아저씨의 모습을 보니 추로스가 정말 맛있을 거 같아서 더 기대가 되었다. 다행스럽게도 선택은 옳았고 기다림은 가치 있었다. 갓 나온 추로스에 달달한 핫초코를 찍어서 먹으니 순식간에 입 안에 행복감이 가득 퍼졌다. 뒤이어 오는 일행들이 맛있게 먹는 모습을 보니 기분이 좋았다. 그냥 지나갔으면 지금 이 순간의 행복을 느끼지 못했을 텐데 멈추길 참 잘했다고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잠깐의 활력을 불어넣고 다시 각자의 속도로 출발. 제법 괜찮게 걸어지는걸 보아하니 30km 떨어진 마을까지 충분히 갈 수 있을 것 같다. 한참을 서로 떨어져서 따로 걷다가 잠시 쉴 겸 늦은 점심도 함께 먹기 위해 다시 모였다. 그러다 경로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아무래도 오늘부터 가는 길이 달라질 것 같다.  


 원래는 함께 30km 지점의 마을까지 가려고 했는데 각자의 사정으로 인해 따로 걷게 되었다. 떨어진다는 사실이 못내 아쉬웠지만 애초에 계획했던 일정이 짧은 편이었기에, 무리하지 않는 선에서 다 걷고 들리고 싶은 곳도 가기 위해서는 최선이었다. 그래서 아쉬움을 뒤로한 채 계속 함께 했던 언니 오빠들과 떨어지게 되었다. 얼떨결에 각자의 길을 걷게 되었지만 모두의 목적지인 산티아고에서 꼭 만나자며 웃으며 헤어졌다.

양 떼와 양치기 아저씨, 생애 첫 1인 1닭

 마을에 도착할 즈음에 오른쪽 발등이 아프긴 했지만 잘 도착해서 다행이었다. 무거운 몸을 이끌고 얼른 씻어야지 싶어서 샤워실로 갔는데 와,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동안 많은 알베르게에 묵으면서 도네이션 알베르게도 갔었지만 항상 따뜻한 물로 샤워를 했는데 오늘만큼은 철저하게 예외였다. 옆에서 짜증이 섞인 목소리가 들리는 걸 보아하니 깜짝 놀란 게 나뿐만은 아니구나 싶어 잠시 위안이 되긴 했지만, 이걸 어쩐다. 빨리 끝내느냐, 아니면 과감히 안 하느냐 인데 답은 거의 정해져 있었지만 그럼에도 잠시 고민이 되었다. 너무너무 씻기 싫었지만 별 수 없었다. 에라 모르겠다, 짧고 굵게 끝내는 걸로.  


 치열했던 샤워가 끝나고 오들오들 떨고 있는데 좋은 소식이 들려왔다. 근처에 큰 마켓이 있다는 반가운 소식. 저녁은 대충 간단하게 해결하겠거니 싶었는데 웬걸 근처에 큰 마켓이 있다면 얘기가 달라진다. 생각지도 않았는데 치킨 2마리에 밥과 계란까지 정말 푸짐한 저녁을 먹을 수 있게 되었다. 짭조름한 치킨을 먹으며 남은 날과 거리를 다시 계산해보니 하루를 더 단축할 수 있을 것 같아서 기분이 더 좋아졌다. 


 언제 벌써 21일이라는 시간이 지났을까. 그동안 지나온 거리와 마을을 떠올려보니 막연히 많아 보이던 21일이 조금 실감이 났다. 이러다가 금방 산티아고에 닿는 거 아니냐는 농담에 그러면 너무 좋을 것 같다고 이야기가 오고 갔지만 한편으로는 이 길 위에 조금 더 머무를 수 있길 바라는 마음도 있었다. 


비로소 오겠지만 조금만 천천히 다가오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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