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영아, 나는 이제 퇴근을 20분가량 남겨두고 있어. 오늘은 생각보다 일이 빨리 끝났지만 타자 소리를 계속 내고 싶어서 너한테 메일을 보낸다. 사실 예전부터 답장하고 싶었는데 무언가 다른 이야기를 담아야 할 것 같아 망설이다 이제야 보내. 그때 막봤을 때 적어냈으면 훨씬 나았을 텐데.
오늘은 여권도 복사하고 돈도 준비해서 새로 이사 가는 집 계약을 하러 가. 집 렌트비가 1만 1,500페소인데 여기 현금 인출기는 하루 9,600페소가 최대라 이틀에 걸쳐 뽑았어. 한국 돈으로는 약 70만원정도야.
지금 사는 집 보다 가격이 나가긴 하지만 현재가 이사하기에 적기라는 생각이 들었어. 나는 생각보다 미신을 믿는 편인데 여기가 도깨비 터 같더라구. 사는 동안 행복하고 좋은 일도 많았지만 어쨌든 기운이 다 되었으니 나가야 되는.
마약 룸메는 8월 초에 나갔어. 그날이 걔 생일이었거든. 마약에 엄청 취해서 들어와서 걔 친구들이 거의 던지다시피 하고 갔어. 걔는 마스크는 안 쓰고 돌아다녀도 돌아오면 꼭 샤워는 하더라. 그날도 샤워를 했는데 생각보다 시간이 오래 걸렸어. 그러다 도와달라 소리치길래 내가 먼저 문을 두드렸어. 마이떼는 마약에 취한 호세임을 정말 무서워하거든.
그런데 걔는 내 목소리를 듣자마자 중국 여자애 죽여버리겠다더라. 사실 발음이 꼬부라져서 별로 무섭진 않았지만 마이떼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서 지금 당장 도망쳐야 할 것 같다고 하길래 나도 슬슬 무서워졌어.
걔가 욕실 안에서 계속 욕하며 소리치는 모습을 녹음하고 집주인에게 보냈어. 집주인에게는 그동안 많은 걸 얘기했거든. 새벽에 취하고 들어와서 냄비에 물을 올린 채 잠들어 불이 날 뻔한 일 같은 것들을. 근데 못 내쫓는다고 하더니 그날은 어쩐 일 인지경찰까지 불러서 온다더라.
그날 플로르는 집에서 방망이를 들고 우리 집으로 왔어. 사실 마이떼와 나 둘 다 너 나 할 것 없이 엄청 겁에 질렸었어. 호세임은 그날 경찰을 보자마자 이성을 잃고 소리 지르며 건물 전체를 뛰어다녔어. 우리는 호세임이 뛰어내려오는 소리를 듣고 길에 세워져 있는 차 뒤로 숨거나 했어. 그래도 호세임은 어떻게 찾아냈는지 플로르 어깨를 밀치며 욕을 했고 나한테는 망할 중국년, 여기서 뭐 하는 거야? 너네 나라로 가버려. 그러더라구.
사실 정말 별것 아닌 일인데 나는 그게 왜 그렇게 비수로 꽂혔는지 몰라. 정말 아무것도 아닌 사람인데 그런 사람이 한 몇 마디로 잠을 설쳤어. 아무래도 이런 일을 겪어도 엄마한테 말 못 한다는 사실이 서글퍼서 그랬나 봐. 그날은 플로르 집으로 가서 잤어. 근데 사실 그 집 소파가 정말 편해서 푹 쉬었어. 아 그리고 마이떼는 그날 내 뒤에 숨어있었는데 호세임은 그런 애한테까지 가운뎃손가락을 흔들면서, 마이떼, 너도 똑같아. 넌 이거나 먹어. 했어. 아 정말 지금 와서 생각하면 웃기다.
그리고 또 하루는 집에 쥐가 나왔어. 갈색 동그라미가 움직이길래 봤더니 그게 쥐였어. 다행히 작아서 패닉 상태에 빠지진 않았지만 그래도 어떻게 거기서 자. 마이떼가 집에 돌아오기까지 기다렸다가 바로 근처 에어비앤비로 옮겼어. 근데 너무 넓고 쾌적해서 마이떼랑 나랑 호캉스 온 기분으로 즐겼어. 그 다음날엔 우리가 좋아하는 브런치 집에서 배달시켜 아침도 든든히 먹었어.
아무튼 그래. 집을 옮기는 가장 큰 이유는 아무래도 집주인이 시도 때도 없이 우리 집에 온다는 것, 그래서 내 물건을 하나하나다 들춰보며 간섭한다는 것. 그래서 결국엔 나가기로 결심했어.
처음엔 나 혼자 나가려고 했는데 집주인 할머니가 방 하나에 무리하게 커플을 받은 데다 방세를 10% 넘게 무리하게 올리려 하면서 마이떼도 나랑 같이 옮기기로 했어. 사실 나는 혼자 살려고 방 하나 짜리를 구해서 마이떼, 거실에서 자도 괜찮아? 나는 너랑 지내는 게 정말 좋은데라고 말했는데 마이떼는 괜찮다고 하더라고. 그래서 우리는 새 집에서도 같이 지내게 됐어.
음 그리고 사흘 전 너한테 주저앉아 울 거 같다고 한 이유는 그날 한국인이랑 저녁에 술을 마셨기 때문이야. 가끔 보면 아 맞다, 이렇게 아등바등 남초 회사에서 살아남으려고 버텼지 하는 감정이 올라와.
술 마시다가 갑자기 아, 뭐 요즘은 이런 질문하면 범죄라며? 하면서 불쾌하게 선을 넘는 질문들, 나이 차이가 말도 안 되게 나면서 노골적으로 여자로 보는 시선 같은 게 너무 더럽더라고. 그러고 보면 나는 내 일을 정말 좋아해서 더 철저히 혼자서 감내했어. 그런 사람들 있잖아. 아 이래서 회사에 여자 있으면 안 돼. 아 너가 무슨 여지를 준 게 아니고? 아 너가 좀 나이 든 남자한테 먹히나? 아 정말 최악이고 최악의 폭력이었다. 그런 일들이 조금이나마 나에 대한 선입견으로 작용할까 봐 혼자서 처리했어. 그래서 독이 오른 거 같아. 아니면 스스로 지워냈거나.
어느 날 세바시 강연을 보다가 나는 괜찮은 줄 알았는데, 어느 순간 엉엉 울었다는 그 여성 강연자를 보고 순간 감정이 동요돼 눈물이 났어.
그래 내가 겪은 것은 명백한 폭력이었기 때문에 그 근방에 미치는 사람들을 보면 기분이 가라앉는 거였어.
가끔 멕시코에 온 이유를 묻는 사람들을 만나는데 이틀 전엔가 근사한 답이 생각났어. 그전까지는 얼버무렸거든. 난 여기서 꼭 방학을 보내는 거 같아. 인생에서 한 템포 쉬면서 앞으로 나아갈 힘을 얻는 그런 방학을 보내는 느낌이야. 그래서 멕시코가 좋아. 모든 사람, 생각이 새롭고 그동안 내가 나고 자란 국가를 다른 각도로 바라볼 수 있는 것도 좋아.
가영아. 벌써 시간이 다 되어서 이제 나도 나가야겠다. 편지 보내줘서 고마워. 이사 가면 그곳 주소 보낼게. 저번엔 술 조심하라 보냈는데 이번 신년인사는 뭐라 쓰여있을지 벌써 궁금하다. 건강 조심하고 좋은 아침 보내, 안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