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아웃이 나에게 말했다.
번아웃에도 종류가 있다.
소위 프로 번아웃러로 살아오며 나는 번아웃의 원인을 항상 일에서 찾았다. 하지만 나름 번아웃에 관련된 기사도 찾아보고 논문까지 읽어 보며 번아웃에 대해 몰랐던 많은 것을 배웠다. 그중 하나는 번아웃에도 다양한 원인이 있다는 사실이다. 그중 대표적인 것들은 일에서 오는 번아웃, 관계에서 오는 번아웃, 신체에서 오는 번아웃, 육아에서 오는 번아웃 등이 있다.
번아웃에 대한 정의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간단히 말하면 번아웃은 장기적으로 지속되는 과도한 스트레스로 감정적, 신체적 탈진에 이른 상태다. 만성적으로 슬픈 감정을 느끼는 우울증과는 다르게 번아웃은 의욕이 사라지고 즐거운 일이 줄어드는 감정 상태를 의미한다.
즐겁지가 않다.
그래, 바로 이 감정이었다. 나를 활활 태우며 열정으로 들어선 '꿈'을 찾는 그 여정이 더 이상 즐겁지가 않았다. 언제부터 이 감정을 느낀 건지 천천히 거슬러 올라가 보자.
대학원 학비를 벌기 위해 살인적인 스케줄로 레스토랑에서 일했던 1년 반의 시절이 있었다. 오전과 오후의 두 스케줄이 있었고, 보통은 많이 하는 친구들도 8번에서 10번 이상은 하지 않던 걸로 기억한다. 하루 12-14시간이 되는 중노동에 가까운 서빙일을 매일 하는 무식한 짓을 하는 사람은 많이 없으니 말이다.
그러나 앞서 말한 듯이 그때의 나는 무모함 그 자체였다. 이미 합격한 대학원을 미뤄두고 학교를 다니는 동안 필요한 학비와 생활비를 계산해 보니 이 돈을 내가 1년 반 사이에 벌 수 있을지, 앞이 깜깜했다.
그래, 나는 한계가 없는 열정 그 자체 아니겠어!?
이쯤 되면 예상했겠지만, 나는 말 그대로 미친 듯이 일했다. 13번, 또는 많게는 14번의 쉬프트를 소화하며 또다시 경주마처럼 달렸다. 그 결과는 다행히도 학비와 생활비를 충분히 벌 수 있었고, 여유 있는 돈으로 급하게 수술해야 하는 부모님까지 도와주는 참 오지랖 넓은 삶을 살았다. 다들 적당히 하루정도는 쉬라고 얘기했지만, 남들보다 늦은 내가 할 수 있는 건 달리는 일뿐.
이렇게 번돈으로 들어간 대학원에서도 나의 경주는 끝나지 않았다. 워낙 잠잘 시간도 없이 꾸려진 학교 스케줄이었지만 그게 내가 이 대학원을 선택한 가장 큰 이유였다. 15개월이란 짧은 시간에 5학기를 끝낼 수 있다니. 조금이라도 빨리 학교를 마치고 디자이너로 일하고 싶었던 나에게는 딱 맞는 맞춤 프로그램으로 보였다.
몸아, 일단 가만히 있어봐.
나는 그 당시 지독한 만성 피로감을 느끼며 살았다. 가끔 프로젝트가 끝나서 잠을 충분히 자도 계속 피로감이 사라지지 않았다. 아마 이때가 나의 신체적 번아웃을 심하게 느낀 처음이 아닐까 싶다. 그래도 나는 즐거웠다. 전시 공간 디자인이라는 새로운 공부를 하면서 드디어 내가 찾던 열정을 발견한 기분이었다. 몸이 피곤한 것쯤은 열정 있는 삶을 산다는 표창장 같은 것이라고 생각했다.
아직도 생생히 기억한다. 대학원을 다니며 프로젝트를 완성해 가는 과정이 얼마나 즐거웠는지. 다양한 전공의 사람들과 창의적인 작품을 공유하고 무언가 새로운 것을 끊임없이 창조해 낸다는 것은 참으로 가슴 뛰고 신나는 일이었다.
이렇게 나는 몸의 번아웃은 잠시 지나가는 것이라 믿고 계속 앞으로 나아갔다. 학교를 졸업하고 취업을 해서도 나의 강박은 쉬이 사라지지 않았다. 그놈의 '남들보다 늦었어'병을 인지할 새도 없이 회사를 다니면서도 나는 언제나 투잡, 쓰리잡을 뛰었다. 한동안은 디자인 회사에 다니면서도 레스토랑 매니저로 주말에 일했으며, 디자인 경력이 조금 쌓인 뒤로는 각종 다양한 프리랜서 디자인 프로젝트를 병행했다.
아무 의미 없어.
이렇게 어렵게 찾은 꿈이 소중한 만큼 나의 디자인 프로젝트 하나하나를 내 자식처럼 아꼈다. 일의 특성상 매번 다른 클라이언트와 새로운 콘셉트로 아이디어를 짜고 사람들이 와서 즐기고 경험하는 공간을 디자인하는 일은 언제나 흥미로운 작업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새로운 프로젝트를 시작해도 그 작업이 즐거운 게 아니라 새로운 아이디어를 내는 것에 스트레스를 받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그리고 마음 한편에서 '이게 무슨 의미가 있지?'라는 회의감이 들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몸이,
그다음에는 마음이 나에게 신호를 보냈다.
나 힘들어.
이제 지쳤어.
잠시만 쉬어가자.
제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