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 번아웃러
'프로'라는 말을 붙일 정도면 그 분야에 어느 정도 전문가는 되어야 하지 않을까? 그럼 나는 어쩌다 하필 이 지독한 프로 번아웃러의 인생을 살게 되었을까.
너의 한계를 넘어서봐.
때는 '꿈' '열정' 이런 단어들에 꽂혀 있던 대학생 시절인 듯하다. 어느 날 우연히 본 다큐멘터리의 제목이 '너의 한계를 넘어서봐' 대충 이런 제목이었던 것 같다. 그날은 꿈을 찾아 뉴욕에 와서 패션 디자인을 공부하며 취업을 하기 위해 열정을 다해 살고 있는 어느 청춘의 도전 이야기가 나오고 있었다. 포트폴리오가 담긴 커다란 가방을 어깨에 메고 이리뛰고 저리 뛰는 그 모습에서 살아있는 생동감이 느껴졌다. 그 반짝반짝하던 그 사람의 눈을 보는데, 나는 갑자기 눈물이 핑 돌았다. 그리고 생각했다. "나도 더 잘할 수 있는데.. 그 꿈이라는 것만 찾으면!"
그당시 나는 여느 청춘들이 그렇듯 안개가 자욱한 어딘가에서 길을 잃고 끝없이 방황하는 기분이었다. 삶에 대한 열정이 가득하던 22살의 나는 아마도 무언가를 붙잡고 싶었나보다. 나도 멋있게 한번 살아보고 싶었고 그때 내가 붙잡은 것은 바로 '꿈'이라는 것이었다. 나는 믿었다. 열정을 쏟을 수 있는 그 무언가만 찾으면 내 인생도 저렇게 반짝반짝 빛날 거라고.
맨땅에 헤딩.
나는 대학교 졸업을 앞둔 4학년 예비 졸업생이었다. 열심히 취업준비만 해도 될까말까한 상황에서 나는 지독히도 마음을 붙잡지 못했다. 아직 나에게 당당히 말할수 있는 꿈은 없지만 지금 현재 영혼 없이 자소서를 쓰고 있는 이 현실은 내가 원하는 길이 아님은 알수 있었다. 대체 어디 가면 찾을 수 있을까. 그놈의 꿈!
일단 가방을 싸고, 나는 아무 계획도 없이 미국으로 날아왔다. 모든 이들의 도전 이야기가 그러하듯 그 과정에서는 책이 몇 권을 나올법한 우여곡절이 가득하다. 일단 그 이야기들은 접어두고 그때를 떠올려보자. 그 당시 나는 오페라의 유령이라는 공연을 보고 그 배우들의 열정, 그 뜨거운 온도에 '그래, 이거다! 나도 여기에 동참해 봐야겠어!' 하고 다짐했다. 사람들 앞에 서는 걸 좋아하지 않는 성향상 배우는 안되고..
'그래, 무대 디자이너가 되어보자!'
지금도 잘 모르겠다. 다른 사람들은 어떤 방식으로 꿈을 찾아 가는지. 나의 방식은 실로 체계가 없었으며, 어떤 구체적인 계획도 없었다. 그 당시에 누군가에게 조언을 얻었다면, 흔히 요즘 사람들이 하는 인터넷에 검색해서 다양한 경험담을 들었다면 나는 아마 시작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
무식해서 가능했고, 무언가에 홀린 듯이 살아서 가능했을까. 나는 이때로부터 16년을 쉼 없이 달려왔다. 그림도 한번 제대로 그려본 적 없는 경제학과 출신의 내가 미국 디자인 대학원의 교수가 되기까지, 아마도 정말 나에게는 한계가 없어!라는 착각을 종종 했었던 것 같다.
나는 남들보다 늦었어.
지금 생각해 보면 어떻게 이렇게 까지 무모했을까 싶지만, 나는 미국 디자인학교에 입학하려면 포트폴리오라는 게 필요한지도 몰랐다. 물어물어 찾아간 아트 스쿨 같은 곳에서 포트폴리오 준비를 했다. 그때가 22살, 23살 이런 어린 나이였는데, 나는 매일, 아니 매 순간 생각했다.
와, 나 정말 늦었다.
같이 준비하던 유학생 친구들이 전부 16살, 17살이었으니 뭐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다 싶다. 근데 이놈의 늦었다는 강박감을 왜 이렇게도 오래 가지고 살았는지. 나는 대학원을 다니면서도, 취업을 해서도 남들보다 두배는 열심히 해야 보통은 따라간다는 강박에 사로 잡혀 살았다.
Life is not about speed but direction
인생은 속도가 아닌 방향이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이란 작품으로 잘 알려진 괴테의 명언이다. 이 말을 수도 없이 많이 들었지만 정말 가슴으로 이해한 건 최근 몇 년 사이 일 것이다. 경주마처럼 달리던 뜨거운 가슴을 가진 나에게 이 말이 가슴 깊이 와닿을 때까지 나는 그 대가를 온몸과 마음으로 치러냈던 것 같다.
뜨겁고 열정적으로 보낸 그 시절을 후회한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하지만 그동안 혹사시켰던 나의 몸과 마음에게 나는 진심 어린 사과를 전한다. 그리고 아직도 현재진행형 중인 나의 번아웃과 함께 살아가고 치유해 가는 이야기를 공유해보려 한다.
이 또한 치유의 과정이길 바라며, 그리고 나처럼 빠르게만 달리며 자신을 혹사하고 있는 많은 이들에게 나의 경험담이 작은 울림이 되기를 바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