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운 날씨에 따뜻한 온천에 몸을 담그고 싶은 맘이 남편이랑 통했다. 놀러 나가는 거 좋아하고, 물은 더 좋아하는 두 아이에게 말하면 당연히 너무 좋아할 거라고 예상했다.
"우리 오늘 뭐 할까?"라고 정해놓은 답을 가지고 남편이 아이들에게 물어봤다.
"음, 난 다이소에 가서 저번에 못 샀던 나비머리띠를 사고 싶어."라고 둘째 아이가 얘기했다.
"난 집에서 시크릿쥬쥬 춤추고 싶어."라는 첫째의 대답에 나는 당황했다.
"그래? 그럼 다이소 갔다가 뭐 할까? 가고 싶은데 없어?"
"응 없어. 집에 와서 춤추고 싶어."
아이들의 머릿속에 온천에 대한 후보지가 없어 대답하지 않은 것 같아, 엄마 아빠는 온천에 가고 싶다고 슬쩍 말해보았다.
"온천은 다음에 가고 다이소 갔다가 집에서 놀고 싶어."
어딘가 떠나고 싶었던 마음은 어른인 우리의 욕구였다. 아이들은 다이소에서 갖고 싶었던 것들을 하나씩 사고, 집에서 놀고 싶었던 것이다.
'너희들의 놀이는 거창하지 않아도 되는구나!'
결국 두 아이와 다이소에 갔다가 집으로 돌아왔다. 나비머리띠와 말랑한 공을 사고 무척 흐뭇해하는 두 아이의 표정을 보니 아이들의 의견을 들어주길 잘했다 싶었다.
돌이켜보니 예전에도 이런 기억이 있었다.
아이들이 더 어릴 때, 유명한 체험전을 검색해서 다녀왔다. 가루야가루야나 종이나라 등의 체험전이 멀리 있어도 아이들을 위해 기꺼이 갔었다. 아이들이 좋아할 만한 곳을 열심히 검색해서, 멀리까지 다녀온 나의 수고로움을 보상받고 싶어 잠들기 전 아이들에게 물어보았다.
"오늘 뭐가 제일 재밌었어?"
"음, 끝말잇기 한 게 제일 재밌었어!"
아니, 차 안에서 한 끝말잇기가 제일 재밌었다니. 믿을 수가 없었다. 밤새 검색해 본 나의 노력과, 멀리까지 운전한 나의 수고로움은 어디로 간 것일까. 게다가 비용도 지불하고 다녀온 체험전들이었는데! 집에서도 할 수 있는 끝말잇기가 제일 재밌었다니 나는 아이들의 놀이를 이해하고 있지 못했다.
또 한 번은 멀리 여행을 떠났을 때 일이다. 둘째 아이의 생일을 맞아 한 번도 가보지 않았던 거제도로 떠났다. 첫째의 초등학교 입학 전이기도 해서, 여행 갈 구실이 좋았다. 리조트에서도 지내고, 바다가 잘 보이는 숙소에서도 지냈다. 또 차박도 하고, 아이들이 좋아할 만한 관광지도 잔뜩 다녀왔다.
엄마 아빠가 좋은 곳을 데려와 재미있게 놀았다는 이야기를 듣고 싶어 아이들에게 물어보았다.
"이번 여행에서 뭐가 제일 재밌었어?"
"음, 킥보드 탄게 제일 재밌었지!"
응? 킥보드라니. 킥보드는 집 앞에서도 탈 수 있는 건데. 거제도까지 가서 한 것들 중에 킥보드 탄게 제일 재밌었다니 아이의 말이 믿기지가 않았다.
나는 아이의 놀이를 모르고 있었다. 내가 생각하는 아이가 좋아하는 놀이와 아이가 정말 좋아하는 놀이는 다른 것임을 재차 확인 중이다.
이번 주말에도 온천에 가면 아이들이 엄청 좋아할 거라고 내 마음대로 짐작해서, 아이들을 끌고 갔더라면 또 후회했겠지.
아이들의 놀이를 관찰하고, 이에 대한 이야기를 나눠보면서 나는 아이들의 놀이를 점점 알아차릴 수 있게 된다. 부모인 나와 아이의 다름, 고유성을 이해하고 인정해줘야 함을 매번 깨닫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