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보리 Apr 29. 2020

길에서 만난 사람



  피피(가명)이야기를 조금 써보려고 한다.


  피피가 사는 마을은 흙색으로, 스쿠터를 타고 달리면 비포장도로의 흙먼지가 마을을 더욱 흙 빛깔로 물들이는 곳이었다. 스쿠터를 대여할 때 ‘몇 시까지 반납하면 되나요?’ 라는 나의 도시적인 물음을 외려 미개하게 만들어 버리는 곳으로, 스쿠터 사장님의 꾸밈 없는 대답은 마을의 흙색만큼 순박하고 낭만적이었다.


“Sunrise to sunset." (해 뜰 때부터 해질 때까지.)      


  피피와 나는 길에서 만난 사이였다. 내가 피피를 만난 건 해 뜨기 전의 어느 겨울 아침 동남아의 시골길에서였다. 피피는 좋은 일출 장소를 안내하는 대가로 수고비를 챙기는 일을 하고 있었고, 나는 피피의 호객 상대였다. 삐끼와 호구 사이. 해 뜨기 전 비즈니스로 만난 우리는 해질 무렵엔 선물을 나누는 친구가 되었고 피피가 살아온 이야기를 피피와 피피의 친구를 통해 조금씩 듣게 되었다.


  피피는 나에게 어린 딸의 사진을 보이며 딸 자랑을 했다. 나보다 대여섯 살이나 어린 피피가 예닐곱 살은 족히 되어 보이는 딸을 가졌다니 나보다 10년은 더 앞선 셈인가. 피피가 대단하고 기특했다. 가족사진에 남편은 없었다. 남편은 죽었다고 말하는 피피의 표정은 피피의 검은 얼굴을 더 검게 물들였다.


피피 남편 죽은 것 같지 않은데, 옆에 있던 내 친구가 말했다.

-왜 그렇게 생각해?

그냥 그래 보여.


  친구의 추측이 맞았다는 걸 잠시 후 피피의 친구 주주를 통해 듣게 되었다.


  피피가 없는 사이 주주는 피피가 참 착하고 아름다운 여성이라고 했다. 저리도 좋은 사람이 나쁜 남자를 만나서 참 안 됐다며. 둘은 동네를 들썩일 만큼 극심한 갈등을 겪었고 끝내 헤어졌다고 한다.     


“그래서 그 남자는 지금 어디에 있어?”

“이웃집에 살아”

“뭐?”     


  피피의 헤어진 남편은 피피의 이웃집에서 다른 여자와 새 살림을 차렸다고 했다. 피피는 왜 다른 마을로 이사하지 않는 걸까. 대화 중에 피피가 ‘나는 내 나라를 모른다. 이 도시도 모른다. 내 마을만 안다.’고 했던 말이 떠올랐다. 피피를 한국에 초대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 ‘피피, 혹시 넌 여권이 있어?’라는 나의 질문에 꼬리의 꼬리를 물게된 대답이었다.   


  환경을 바꿀 만한 능력 따위를 운운하고 싶은 건 아니다. 다만, 피피는 스스로 환경을 바꿀 의지를 전혀 보이지 않았는데, 바꿀 수 없다고 굳게 믿는 듯했다. 여기서 나고 자랐기 때문에 여기서 죽어야만 하는 사람 같아 보였다. 그 어떤 불쾌 자극도 그녀를 그 마을에서 밀어내지 못했다. 둘 사이에 낳은 아이까지 있는 전남편과 이웃하며 살아가더라도 그냥 여기에 머물러야만 했다. 원래 그런 인생이었기 때문일까. 그때 쯤 ‘그냥 원래 그런 것’은 참 위험하다는 생각을 한 것 같다. 변화는 고통을 수반하지만 꼭 그만큼의 발전 또한 가져다준 적이 많았다. 변화해야할 시점에 고통을 외면하면 고통은 사라지기보단 배가 되었다. 나 자신을 현실에 박제시킨 채 옴짝달싹 못하게 내버려 둔다면 궁극적으로 더 오랜 고통을 감수해야 하는 것이다.


  가끔 예전에 다리 수술을 했을 때를 떠올린다. 잘 걷기 위해 수술을 한 것임에도 걸을 날이 다가오니 두려웠다. 수술한 다리로 한 발 내딛는 것이 살얼음판 딛는 양 겁이 났지만 그것은 내가 반드시 감내해야할 몫의 고통이었다. 그냥 원래 그런 것은 없다. 나는 타고난 절름발이가 아니었고, 내 다리도 원래 아픈 것이 기본 값은 아니었으므로 변화 가능한 지점에서 성장과 발전이 있었다. 내버려 두었다면 나는 여태 다리를 절고 있었을 것이다. 그냥 원래 그런 것은 그렇게 생각하는 나 자신 뿐이었다.


  그러나 피피에게 내가 무슨 말을 어떻게 더 해줄 수 있었을까. 내 안에도 이미 여러 명의 피피가 살고 있는데 말이다. 피피는 그런 삶을 살지 않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모두가 자기 수준의 삶을 사는 법이므로 피피 또한 피피 수준의 삶을 영위하게 된 것이다. 나는 피피에게 변화에 대해 일갈할 자격이 없다. 다만 나의 이 작은 삶의 테두리에서, 사소한 일상에서 안주하고자 하는 ‘내 안의 피피’를 불러 세워 다시 걸어 나가도록 독려해야할 뿐이다.


작가의 이전글 인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