챗 지피티의 시대다. 많은 사람이 AI가 인간을 대체할 것이라 말한다. 인간의 오류와 불완전성이 완전무결한 기계로 극복되리라 상상한다. 정말 그럴까? 가능성을 인정하면서도 아직은 내가 대체 가능한 존재라는 무언의 압박이 반갑지만은 않다. 기계가 대체할 수 없는 인간의 고유한 의미가 무엇인지를 계속해서 고민하게 된다.
나는 그 의미를 질문에서 찾는다. 챗 지피티는 인간의 질문에 세심하게 반응한다. 질문의 명확성과 구체성에 따라 챗 지피티의 답변은 확연히 달라진다. 질문의 수준과 깊이를 고려해 정보를 제시한다. 마치 나를 잘 쓰려면 당신이 무궁무진한 궁금증을 간직하며 살아야 한다고 말하는 것 같기도 하다. 바야흐로 정보를 검색하는 시대를 넘어 질문하는 시대가 도래했다. 미래엔 질문하는 능력이 더더욱 중요해질 게 분명하다.
나는 질문 없는 사회를 살아왔다. 눈치와 부끄러움 때문에 선생님에게, 교수님에게조차 잘 질문하지 못했다. 이해가 되지 않으면 내가 부족해서라고 생각했다. 아는 것을 더 깊이 파고 들어갈 이유도 없었다. 들은 것을 외워서 있는 그대로 풀어내면 좋은 점수를 받았기 때문이다. 질문을 받아들이는 윗사람들의 태도도 부담이었다. 서열과 권력관계에서 아랫사람의 질문은 거부와 항의로 받아들여지곤 했다. 어렸을 때부터 질문하는 버릇을 기르지 않았는데, 인공지능이라고 해서 질문을 잘 할 수 있을까? 아이들은 질문하는 연습을 해야만 한다. 나는 아이들의 질문 연습 상대로 책을 선택했다.
질문은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을 구분하는 데서 시작한다. 아는 것을 더 깊이 있게 알고 싶은 마음, 모르는 것에 대해 부끄러워하지 않고 손을 드는 용기에서 시작한다. 그런데 학생들은 이 과정을 잘 거치지 않는다. 알면 안다고 넘어가고, 모르는 것을 부끄러워하거나, 이것쯤은 몰라도 된다고 생각한다. 결국 좋은 질문을 만들려면 이 두 가지를 정확히 구분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자신과 멀리 떨어진 세계를 질문으로 해석해 자신의 삶에 오롯이 담아낼 수 있다.
학생들이 질문으로 책을 읽어 나가기를 바랐다. 책을 읽으며 다양한 질문을 만들고, 질문을 선별하고, 고른 질문으로 대화하고, 발표하기를 원했다. 그러려면 질문하는 법을 알려줘야 했다. 시중에 나온 질문 관련 책으로 방법을 이리저리 알려준다 한들 실제 해보지 않으면 능숙해지기가 어렵다. 개방형 질문과 폐쇄형 질문, 추가 질문의 유형, 핵심 질문에 대한 이론적인 설명을 하더라도 직접 질문을 만드는 일은 만만치 않은 작업이다. 본능적으로 질문이 튀어나올 수밖에 없는 글로 연습을 시켜야 한다고 생각했다. 다양성이라는 삶의 결에 맞으면서도, 학생들에게 질문 욕구를, 말하고 싶은 욕구를 불러일으키는 글 말이다.
그래서 연습용 글로 페미니즘 관련 글을 선택했다. 정희진의 <페미니즘의 도전>에 나오는 ‘말과 성차별’의 한 부분이다. 한 연수에서 해당 글을 접하고 질문을 만드는 연습용 글로 쓰기에 제격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남학교에서 페미니즘을 이야기하는 건 참 조심스럽다. 그 조심스러움은 학생들이 지니는 본능적인 거부감에서 기인한다.
해당 글은 말에 깃든 오래된 성차별의 흔적을 낱낱이 밝히고 있었다. 언어는 기본적으로 권력 관계에서 정의되고 유통된다는 점을 합리적으로 논증하고 있었다. 그런데 글이 좀 오래되기는 했다. 2005년도에 나온 글이라 지금의 현실과는 맞지 않는 부분도 있었다. 하지만 오히려 그 지점이 좋았다. 아이들에게 적당한 의문과 궁금증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던 것이다. 최근 화두가 되는 정치적 올바름(Political Correctness) 측면에서 많은 단어를 바꿔 사용하는 해외 사례와 연결지어 설명할 거리도 있었다. 글을 읽기 전에 policeman, fireman, salesman, chairman과 같은 단어들이 poiceperson, fire fighter, sales person, chair person으로 바꿔서 사용되는 현상을 설명했다.
글을 읽고 하고 싶은 질문을 마음껏 하라고 한다. 그러면 가만히 있던 학생들이 너나 할 것 없이 손을 든다. 정제되지 않은 날것의 질문에는 생생함이 있다. 이 글은 너무 오래된 것 아닐까요? 이 예시는 현재에는 다 바뀌지 않았나요? 글쓴이가 너무 편파적인 것 아닌가요? 오히려 남성을 차별하는 단어들도 많지 않아요? 논리 전개가 너무 급작스러운 것 아니에요? 매춘에서 성매매로의 변화가 왜 여성 인권의 변화와 맞물려 있는 거죠? 와 같은 질문들이 쏟아지기 시작한다.
우리가 수업 시간에 읽는 책은 어떤 이들에게는 ‘잘못된 삶’이다. 작가 김원영은 <실격당한 자들을 위한 변론>에서 잘못된 삶은 나쁜 짓을 저지르는 삶이 아니라, ‘존중받지 못하는 삶’이라고 이야기한다. 절대 다수와 다른 선택, 즉 다른 삶의 방식, 태도, 성적 지향, 신체적 특징을 지닌 사람은 누군가의 편견으로 ‘잘못된 삶’을 살아갈 가능성이 클 수밖에 없다. 아이들이 이런 글을 읽었을 때 본능적인 거부감을 느끼리라 생각했다. 그리고 날카로운 질문만 쏟아내지 않을까 걱정됐다. 그 뾰족한 모서리를 둥글둥글하게 매만져야 했다.
모든 질문에는 이유와 근거가 있다. 애써 그 질문에 반박하려 하지 않는다. 당연히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다고 인정한다. 이 글은 좀 오래되었고, 날선 표현으로 가득하며, 누군가의 공감을 얻기에는 부족할 수도 있겠다고 이야기한다. 중요한 지점은 이 지점이다. 나도 너희의 견해를 충분히 이해하고 듣고 있다는 점을 차분하게 설명한다. 경험은 다양하며, 생각은 다를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 조금 가라앉혔으니 아이들을 조금 더 자극해 본다. 혹시 ‘남성은 잠재적 가해자다.’라는 말은 어떻게 생각해? 아이들은 대놓고 거부감을 표현한다. 말도 안되는 소리라고 반발하기 시작한다.
그 순간 예를 들기 시작한다. “엄마, 여동생, 누나, 여자친구와 함께 밤늦은 시간까지 밖에 있다가 상대방을 집에 데려다줘야겠다고 생각한 적은 없니? 왜 데려다줘야겠다고 생각했어? 혼자 야심한 밤, 어둑한 골목길을 걸어갈 때 왜 엄마, 여동생, 누나, 여자친구가 위험하다고 생각하는 거야? 그 이유가 뭐지? 여성이 처할 수 있는 위험을 생각할 때 떠올리는 가해자의 모습은 똑같은 여성이니 아니면 남성이니? 만약 너희가 여성이라면 혼자 밤늦은 거리를 걸어갈 때 본능적으로 남성에 대한 두려움을 가질 수도 있지 않을까? 아주 살짝만, 잠시만 입장을 바꿔서 생각하면 어때?”
아이들은 골똘히 생각에 잠긴다. 구체적인 경험 안에서 누군가가 겪은 고통을 이야기할 때 날선 비판을 하기란 쉽지 않다. 모든 사람은 타인의 고통을 쉽사리 지나치지 않는다. 아이들은 더욱더 그렇다.
“어떤 글이나 말을 접했을 때 비판하고 반박하고 싶은 생각이 들 거야. 그런데 그 마음을 조금만 내려놓아 줘. 누군가의 말에 거부감이 들 수도 있겠지만, 제일 먼저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상대방이 무슨 말을 하는지를 찬찬히 듣고 이해해 보려고 노력하는 거야. 앞으로 우리가 읽을 책의 주제가 만만치 않아. 어쩌면 읽기 싫을지도 몰라. 그래도 한번 시도해 보자. 나와는 다른 사람의 세계 안으로 성큼 걸어 들어가 보자. 그러면 너희에게 또 다른 세상이, 더 넓은 세상이 찾아올지도 몰라.”
아이들이 몽돌 같은 마음으로 책을 읽으면 좋겠다. 다른 세계와 충돌하고 부딪혀서 날선 마음이 조금씩 무뎌졌으면 좋겠다. 동글동글하고 부드러운 삶의 표면들이 맞닿아 이루는 세계는 얼마나 아름다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