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칠게 보면 세상은 부드럽다.
찰리 채플린이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삶은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요, 멀리서 보면 희극이다."
찰리 채플린이 의도한 바는 아니겠지만 내게는 이 말이 거친 기하학(coarse geometry)의 핵심을 잘 요약한 말이라고 느껴진다. 가까이서 봤을 때만 드러나는 작은 흠집은 멀리 떨어져서 보면 보이지 않는다. 충분히 멀리서 본다면 말 그대로 없는 것이나 다름없다. 우리 눈으로는 구분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렇게 충분한 거리에서 봤을 때 느낄 수 없는 작은 차이들은 무시하고 큰 스케일에서 봤을 때만 구분되는 구조의 차이를 보자는 것이 바로 거친 기하학이다. 그래서 혹자는 큰 스케일의 기하학 (large scale geometry)라고 부르기도 한다.
거친 기하학에서는 유한한 크기를 가진 물체는 사실 의미를 가지지 않는다. 크기가 유한하다면 충분히 멀리 떨어져서 봤을 때 한 점과 다름 없기 때문이다. 크기가 유한한 그 어떤 것도 그저 하나의 점으로 취급된다. 거친 관점에서 보아도 의미가 있으려면 일단은 무한히 큰 몸집을 가지는 것은 필수 조건이다.
크기가 무한한 두 개의 대상이 거칠게 보아 같다라는 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2차원의 무한하고 평평한 평면을 떠올려 보자. 이 평면 상에 일정한 간격으로 떨어진 수평선들의 모임과, 일정한 간격으로 떨어진 수직선들의 모임을 함께 그려보자. 무한한 평면을 가득채운 격자 무니를 얻게 될 것이다. 나무로 된 긴 막대들을 이용해서 이 격자를 직접 만든다고 해보자. 간격을 매번 일정하게 하려면 많은 노력이 들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자존심이 있는 목수이다. 간격이 터무니없이 큰 구간은 허용치 않을 것이다. 예를들어, 30cm 정도의 간격으로 막대를 세운다고 하자. 그런데 어느 부분에선가 간격이 두 배나 된다면 보기 좋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간격이 50cm 이상 벌어지는 곳은 없게 신경을 쓴다고 하자. 이 정도면 충분하다. 무한히 많은 막대로 이와 같이 만들어진 격자를 떠올려 보자.
격자는 평면 전체를 채우지는 못한다. 중간 중간 네모난 구멍이 숭숭 뚫려있다. 누구에게 물어봐도 이 격자와 평면 자체는 같은 대상이 아니라고 말할 것이다. 그런데, 정말 그럴까? 각각의 네모난 구멍은 크기가 유한하다. (우리가 성실하게 규칙을 따른 목수라는 가정 하에) 네모난 구멍의 각 변의 길이는 50cm를 넘지 않는다. 거친 기하학의 관점을 다시 한번 떠올려보자. 이러한 유한한 크기의 구멍은 충분히 멀리서 보면 점과 다름없다. 구멍의 크기가 들쭉 날쭉하겠지만, 50cm라는 길이가 점으로 느껴질만큼만 멀어지면 모든 구멍이 동시에 전부 점으로 보이기 시작한다. 즉 충분히 멀리 떨어진 관찰자에게는 이 격자와 평면을 구분하는 것이 더이상 가능하지 않다. 구멍이 숭숭 뚫린, 부드러운 곡면과는 거리가 멀어도 한참 멀다고 느껴졌던 격자 모양의 공간은 이제 완전히 매끄럽고 평평한 평면과 같아졌다. 멀찍이 떨어져서 보기만 했을 뿐인데 말이다.
거친 기하학은 연구하는 내게는 이 철학이 참 매력적인 것 같다. 일상에서 겪는 사소한 트러블에 너무 스트레스 받지 말자. 멀찍이 떨어져서 볼 수 있는 여유를 가진다면, 우리의 인생은 항상 부드럽고 아름다울테니.
덧. 거친 기하학에 관해서 이 글보다 살짝 더 자세하게 썼던 글이 하나있다. 고등과학원 웹진 Horizon에 썼던 예전의 글은 아래 링크에서 볼 수 있다.
https://horizon.kias.re.kr/85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