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집에 살 것인가.
스무 살 때 한국을 떠나고 십 년 동안, 참 많은 집에 머물렀다. 그전까지 나는 한국에 있는 단독주택에 살았다. 마당과 잔디밭이 있고, 고양이와 강아지를 기르는 시골집이었다. 그때는 몰랐지만 내가 살던 곳은 어마어마한 시골이었다. 주변에 이웃이라고는 없었고, 집 뒤에는 오를 수 있는 산이 있었다. 십 오분 정도 걸어 내려가면 마을버스를 탈 수 있는 정류장이 있었는데, 배차 간격이 길어 오들오들 떨며 버스를 기다렸던 기억이 있다.
시골의 단독주택은 벌레가 많았다. 뒤에 산이 있는 탓인지 개미나 돈벌레뿐만 아니라, 지네와 거미도 나왔다. 가끔 마당에 깔려 죽은 뱀의 사체가 있었다. 겨울에는 가끔 수도가 얼었고, 비가 심하게 오는 날에는 정전이 됐다. 내가 스무 살이 넘어 해외를 전전하는 사이 그 집은 허물어졌지만 부모님은 여전히 주택을 고수했다.
호주에서 첫 집은 도클랜드에 있는 아파트였다. 시골에서 살던 것과는 비교도 안되게 작은 집이었다. 화장실이며 방이며 모든 공간을 반토막 해놓은 것 마냥 비좁았다. 화장실에는 욕조 대신 한 칸짜리 샤워부스가 있었다. 그래도 좋았다. 층수가 높아 강과 도시의 전망이 한눈에 보였고, 집에서 보는 일도 없었다. 그라운드 층에는 경비실과 도서실도 있었고, 건물에 들어설 때는 전자키가, 집에 들어갈 때는 열쇠가 필요했다. 리프트와 복도에는 보안카메라가 있었다. 안심이 되었다.
그곳에서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삼 년을 살았고, 큰 집과 소파가 그리워진 나는 글랜 아이리스에 있는 빌라(호주에서는 구분 없이 아파트라고 불렀지만)로 이사했다. 리프트가 없어 불편했지만 조용한 주택가에는 산책할 수 있는 공원과 강이 있었다. 예쁜 카페도 많았다. 그때 한참 펜팔을 했는데, 퇴근하고 돌아오는 길이면 빨간 우체통을 확인하고는 했다. 예쁜 우표와 도장이 찍힌 봉투가 들어있을 때는 뛸 듯이 기뻤다. 마음 한편이 환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마지막 일 년은 마르비뇽에 있는 타운 하우스에 살았다. 가장 이상적이라고 생각했던 구조였다. 일 층에는 차고와 거실, 부엌이 있고, 이 층에 방과 화장실이 있었다. 밑에서 음식을 해 먹어도 냄새가 올라오지 않았고, 아주 가끔 벌레나 개미가 꼬여도 이 층까지 기어 올라오는 일은 거의 없었다. 사람들과 웃고 떠들며 놀다 졸리면 이층으로 올라와 침대에 누웠다. 그곳에서는 삶이 활기를 띄었다. 어디를 가지 않아도 거실에 앉아있으면 하루가 시작되는 느낌이 들었다.
한국에서 잠깐 지냈던 오피스텔은 공간이 너무 협소해 답답했다. 살아본 그 어느 곳보다 인프라가 넘치는 도시 한복판이었지만(청담동, 역삼동, 해운대에 잠깐씩 머물렀다), 공간이 주는 만족감을 대신하지는 못했다. 무엇보다 부엌과 거실이 너무나 협소했다. 집에 있으면 갇혀 있는 느낌이 들었다.
유럽에 나올 때쯤에는 나름대로 집에 고집하는 부분이 생겼다. 첫 번째로 방과 거실이 구분되어 존재할 것 - 반드시 소파가 있어야 한다. 나의 모든 걸 소파와 침대에서 했다. 공부도, 독서도, 이력서를 고치는 것 까지도 말이다. 나의 모든 생산성은 소파와 침대에서 나왔다. 두 번째는 부엌이 충분히 클 것 - 적어도 삼구 짜리 인덕션을 원했고, 조리를 할 공간이 필요했다. 세 번째는 샤워부스가 있을 것 - 욕조가 있어도 잘 쓰지 않는 데다, 욕조는 관리가 어렵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유럽에서는 딱히 조건으로 걸 필요도 없었지만, 창이 크고 그게 몇 시가 되었든 해가 들어올 것. 집에 들어 아른거리는 햇살을 바라보는 게 좋았다.
유럽에 도착하고 처음 한 달 동은 호텔에 머무르며 집을 탐색했다. 호텔은 회사에서 예약해 주었는데, 감사하게도 올드 타운에 위치한 전통 있는 호텔의 스위트 룸을 잡아주셨다. 부엌과 거실이 아주 넓고, 건식 화장실과 욕실이 있는 아주 좋은 방이었다. 영수증을 함께 보내주셨을 때는 적잖이 놀랐던 기억이 있다. 일개 사원인 나를 위해 이렇게 많은 돈을 쓰다니.
받은 오퍼를 기준으로 낼 수 있는 방값의 상한선을 정했다. 라트비아는 집값이 싼 편이라 상한선을 월 칠십만 원 선으로 잡았다. 이왕 해외에 돈 벌러 온 거, 월에 삼백 만원씩 저금하겠다는 대찬 계획을 가지고 있던 터라, 고정비를 20% 이하로 맞추기로 했다.
그 후 인터넷으로 여러 매물을 탐색했다. 라트비아에서는 SSG.COM이라는 사이트가 대표적이라고 했다. 실제로 본 매물은 세 곳 정도였는데, 첫 번째는 방이 분리된 고즈넉한 아파트였다. 주택가에 회사와 쪼금 거리가 있는 것까지는 괜찮았지만, 부엌이 너무 작았다. 두 번째는 아일랜드 키친 형식의 부엌을 가진 무척 예쁜 오피스텔이었다. 신축인지 디자인도 깔끔했다. 다만 방이 분리되어있지 않았다. 간이벽으로 구분해 놓은 커다란 원룸 형태였다.
세 번째 집을 봤을 때, 보자마자 그 자리에서 계약하겠다고 했다. 방이 분리되어 있었고, 사구 짜리 인덕션이 있는 넓은 부엌에, 거실과 방까지 베란다가 이어져있었으며, 오후에는 통창으로 햇살이 잘 들어왔다. 암막커튼과 리클라이너 소파도 있었다. 회사와 도보 십오 분 거리에, 가격도 합리적이었다. 앞에는 산책할 수 있는 공원이 있었고, 도심과 공항도 멀지 않았다. 내게는 더없이 완벽한 조건이었다.
나는 유럽에 있는 삼 년 동안 줄곧 그곳에서 지냈다. 지내는 동안 원세가 삼만 원 정도 올랐지만, 물가 상승률에 비하면 그런 건 사소한 수준이었다. 처음 입주하며 냈던 디파짓은 월세의 150%였는데, 따로 받을 것 없이 마지막 달에 월세와 관리비 및 공과금을 처리해 달라고 부탁했다.
한국으로 돌아온 지금도 한 번 생긴 고집은 여전하다. 여전히 넓은 창으로 해가 들어야 하고, 거실 소파에 누워 하늘을 볼 수 있어야 하며, 넓은 부엌과 분리된 방이 있어야 한다. 거기에 조건이 더 늘어, 신축이어야 하고 방도 두 개는 있어야 한다. 출퇴근 거리는 삼십 분을 넘지 않아야 하고, 편의점과 카페가 도보 오 분 거리에 있어야 한다. 열심히 찾다 보면 마음에 드는 집은 꼭 나타난다.
다만 아쉬운 게 있다면, 더 이상 출근길에 벽돌길과 파스텔 톤의 예쁜 집들을 볼 수 없다는 것이다. 고생했던 추억도 아름답게 포장해 주는 그 풍경을 언젠가 다시 찾아 떠날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