런던에 도착했을 때는

만회하리라

by 작은 꿀벌

지친 몸을 이끌고 런던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저녁이 되어가고 있었다. 핸드폰을 확인했다. 배터리가 10% 정도밖에 남지 않았다. 아침부터 공항에서 헤매고 다닌 탓에 배터리가 바닥난 것이다. '도착했습니다. 숙소로 갈게요.' 메시지를 보내고 공항 지하철에 올랐다.


영국의 지하철은 호주의 그것과 퍽 비슷한 느낌이다. 생긴 것도 비슷하고, 내부 모습도 비슷하다. 사실 지하철 좌석이 한국처럼 스테인리스로 되어 있는 곳은 드물다. 적어도 나는 본 적이 없다. 듣기로는 과거에 방화 사건이 있었고, 섬유에 화재가 옮겨 붙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스테인리스로 전부 바뀌었다고. 얼마 전에도 지하철 방화 사건이 있었으니, 그 선택은 옳았다.


그리고 또 하나, 그런 의도와는 상관없이 위생적인 면에 꽤 큰 강점이 있다. 영국과 프랑스 같은 서부 유럽권은 진드기(bed-bug)로도 유명한데, 이 진드기가 가장 좋아하는 환경이 바로 섬유질이다. 나 또한 유럽 여행을 다니며 진드기에 물린 적은 없지만, 영국 지하철 좌석 위 틈에서 기어 다니는 진드기를 직접 목격했다. 많은 사람들이 드나들고, 또 그리 청결한 것 같지 않은 따듯한 천 소재의 지하철 좌석은 그들에게 최적의 서식지인 듯했다.

워낙 영국의 진드기가 화제가 된 탓인지, 지하철과 기차에는 '매일 아침저녁으로 꼼꼼히 소독하고 있습니다'라는 문구가 붙어있었지만, 여전히 진드기는 살아있었다. 덕분에 나는 자리가 있음에도 앉지 않고, 서서 지하철을 탔다. 몰랐으면 모를까, 이미 한 번 봐 버린 진드기를 무시한 채 착석할 수 없었다.


지하철에서 내려 지상으로 나왔다. 과연, 이곳이 영국인가. 아마도 내가 나온 곳은 영국에 꽤 유명한 교차로에 있는 역인 듯했다. 사람들이 가득한 것은 둘째로 치고, 다섯 개 이상의 차선이 한 곳에 교차하는 그곳은 (예상대로) 매우 많은 차량이 밀집해 있었다. 이렇게 많은 차선이 교차하면 당연히 교통체증이 생길 수밖에 없다. 왜 이렇게 만들었을까? 하는 생각을 하면서도 과연 영국이라 느꼈던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도시의 풍경이 예뻤기 때문이다. 상징적인 빨간 전화박스, 옛날 서구 시대에서 나온 것 같은 모양의 차들, 중절모를 쓰고 걷고 있는 신사들과 나 같은 관광객까지. 그 모습은 정말, 정말 생각했던 영국의 모습 그대로였다.


나는 그 와중에 택시를 잡아타고 숙소로 향했다. 이미 지칠 대로 지쳐버린 데다, 에어비앤비를 하고 싶다는 의견에 따라 시내와 가까운 교외에 숙소를 잡은 탓이다. 지하철을 갈아타거나 버스를 타고 가서 거주 지역에서 집 번호를 찾아가야 했는데, 그럴 힘도 자신도 없었다.


나를 태운 택시는 검은 피부에 젊은 남자가 운전하는 까만 택시였는데, 외향적이고 농담을 좋아하는 친구였다. 영국이 처음이라는 내게 그는 많은 이야기를 해 주었다. 런던의 집값이 아주 비싸서 영국인은 평생 일해도 런던에 집을 살 수 없다는 것 (런던 시내가 아닌 교외에 있는 집이 60억 정도라고) 때문에 비싼 월세를 내고 살아가다 은퇴하면 시골에 내려가 산다고 했다.


"그럼 집을 가진 사람들은? 자기 집에 사는 사람은 없는 거야?"

"그들은 자신들이 가지고 있던 성 근처에 살아. 대부분 예전 영주거든. 알지? 소작농 같은 거 말이야"


영주, 소작농, 성채. 아직도(당시에는 왕이 즉위하기 전이었으므로) 여왕을 섬기는 국가다운 말이다. 우리나라에도 과거의 영광(혹은 그저 재산)을 누리는 사람들이 있겠지만, 이 정도로 노골적이지는 않다. 영국은 여전히 연속선상에 있는 걸까. 자본주의가 진정한 의미의 자본주의가 될 수 없을 만큼, 그 역사적 깊이가 깊었다. 자본주의도 그 근본을 바꿀 수는 없었다.


그런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나는 숙소에 도착했다. 집을 찾아 들어가 짐을 풀고 외출한 그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집 또한 퍽 영국 스러운 집이었지만, 너무 지쳐 감탄할 기운이 없었다. 거울을 보니 지칠 대로 지쳐 헝클어진 머리와 퀭한 얼굴을 한 여자가 서 있었다. 나는 얼른 옷을 갈아입고 머리를 단정히 빗어 넘겼다.


우리는 리버풀 스테이션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스테이크 집을 찾았다. 나는 머쉬룸 소스를 곁들인 스테이크를 주문했다. 머쉬룸 소스는 어디를 가나 대체로 머쉬룸 파스타 소스와 비슷한 맛이 난다. 약간 크리미한 느낌의, 색도 대체로 탁한 크림 색인 소스는 버섯 수프를 부어 먹는 느낌이 든다. 와인소스나 머쉬룸 소스 둘 중에 하나를 고르면 (내 기준) 실패는 없다. 나는 런던까지 오는 여정의 다사다난을 이야기했고, 그들은 주최자 없는 에프터눈 티가 더없이 좋았고, 그래서 함께할 수 없음에 아쉬웠다고 이야기했다.


두툼한 스테이크에 크리미한 소스를 찍어 한입 먹으니 따스한 풍만함이 온몸에 퍼져갔다. 와인까지 곁들여 마시며 거하게 한 끼를 먹은 우리는 어느새 밤이 되어 반짝이는 타워 브리지를 바라보며 런던에 왔음을 실감했다. 민트색 왕관 같은 자태는 과연 런던에 온 느낌이 들었다. 이제는 영화에서나 볼 수 있는, 나라의 모든 귀족이 마차를 타고 모여 성에서 파티를 벌이던 곳. 그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숙소로 돌아갈 때는 이 층 버스를 탔다. 이 또한 영국의 상징(사실 멜버른의 공항버스도 오슬로의 공항버스도 이 층 버스지만)이라고 했다.


숙소로 돌아와서는 파자마로 갈아입고 잘 위치를 정했다. 에어비앤비를 빌렸는데, 커다란 퀸 베드 하나와 소파베드 하나라, 누군가는 거실에서 자야 했다. 파자마만 보아도 취향이 전혀 다르다는 것을 바로 알 수 있었다. 한 명은 위아래 세트인 바지로 된 파자마를 입었고, 한 명은 프릴이 달린 원피스를 입었다. 다른 한 명은 후줄근해져 잠옷으로 쓰고 있는 것 같은 나시와 츄리닝 바지를 입었다.

침대로 배정된 나는 머리를 대기 무섭게 잠에 빠져들었다. 하루 사이 너무 많은 일이 있었다. 그 무엇보다도 비행깃값으로 날린 돈이 아쉬웠다. 이를 만회하기 위해서라도 영국을 즐기리라 다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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