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곤 실레의 그림 한 점에 대한 단상
# 에곤 실레의 그림을 실제로 아니 제대로(이전에도 본 적 있을 테지만 기억하지 못할 것이므로) 본 것은 2000년대 중반이다. 당시 뉴욕 맨해튼. 누갤러리(Neue Gallery)에서 실레의 작품을 보았다. 큼지막하게 걸려 있던 클림트의 그림도 또렷하게 기억난다.
# 누갤러리를 검색해보니. 실레와 클림트 외에도 오스카 코코슈카(Oskar Kokoschka), 빈 공방(Wiener Werkstaette), 청기사파(Der Blaue Reiter), 다리파(Die Brücke), 바우하우스(Bauhaus)를 비롯하여, 칸딘스키(Wassily Kandinsky), 파울 클레(Paul Klee), 키르히너(Ernst Ludwig Kirchner), 라이오넬 파이닝거(Lyonel Feininger), 오토 딕스(Otto Dix), 조지 그로스(George Grosz) 등이 언급된다. 매력적인 이름들의 나열. 그러나 현재 기억에 남은 것은 거의 없다. 당장 몇 년 전 일도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는 내가 20년 전 누갤러리의 공간을 떠올리지 못하는 것은 당연하다. 심지어 프릭 컬렉션(Frick Collection)의 독특한 중정 구조를 떠올리며 여기서 실레의 그림을 보았다고 착각한다. 작고 아늑한 실내 중정에 혼자 앉아 있던 시간과 실레의 작고 단순한 스케치 작품(이 또한 착각일 수 있다)을 보았던 시간이 하나의 공간에 병치되어 편집되는 현상. 기억의 오류일까. 만들어진 기억일까. 전자의 경우 오류의 주체는 ‘기억’, 후자의 경우 (만들어진) 기억의 주체는 ‘나’.
# 나는. 내가 만들고 싶은 기억을 만드는 창조의 주체. 또는. 기억하고 싶은 것만 기억하는 편집의 주체.
# 십수 년 만에 다시 방문한 오스트리아 빈. 기억나는 것이라곤 슈테판 성당 지붕의 독특한 패턴, 시대를 초월한 수퍼 셀렙 시시(Sisi) 황후의 아름다운 초상만 각인된 쇤브룬 궁전, 어느 카페에서 먹었는지도 기억나지 않는 비엔나 커피(아인슈페너). 오페라하우스 건물을 보고서야 '아, 이곳에 왔었구나'라는 느낌 정도. 심지어 오페라하우스에서 공연을 보기까지 했다는 빈의 주장은 신뢰할 수 없었다. 그럴 리 없어. 일관된 반응으로 일축하는 나를 답답해하는 그 역시 공연 이름을 기억내해지는 못했다.
뒤늦게 발견된 당시 공연 티켓이 없었다면 빈과 나의 기억은 여전히 평행선을 달리고 있었을 것이다. 그때 보았던 오페라는 벤저민 브리튼의 <Peter Grimes>. 빈이 기억하지 못하는 것도 납득할 만하다.
그가 내게 물었다. 대체 우리는 빈에서 뭘 한 거야? 벨베데레 궁전, 레오폴트 미술관, 빈 미술사 박물관 등을 방문하지 않은 것은 확실하다. 아니, 방문하지 않았다는 사실 자체를 믿기 어렵다. 그렇다면 방문을 한 것인가 하지 않은 것인가. 하고도 기억하지 못하는 것인가, 하지 않고도 하지 않은 것을 믿고 싶어하지 않는 것인가.
# 빈의 박물관 지구(Museums Quartier)에 들어선다. 특별한 공간에 들어섰다는 특별한 감정. 이 특별한 감정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 어느 글에선가 미술관(혹은 박물관)에 간다는 것, 다시 말해 전시를 보러 간다는 것은 '취약해지는 시간'을 의미한다고 쓴 적이 있다. 무엇에 취약해지는가? 일상 바깥의 것에. 일상(현실이라고 해도 좋다)을 벗어난 시간. 일상의 공간에서 떨어져 나와 다른 것을 만나는 시간. 그러나 그 다른 것을 통해(경유해) 결국 일상(현실)을 응시하게 되는 시간. 현실 바깥을 경유해 현실 안쪽을 들여다보는 효과라 해야 할까. 다른 것과의 마주침을 통해 동일한 주체라고 믿어온 '나'의 일부 어디선가 다른 소리를 내는 것을 듣게 되는 것. 평소 발음할 때는 모르지만 녹음된 것을 들을 때 낯설게 느껴지는 나의 목소리처럼. '내 안의 다른 나'를 발견한다든지 '주체의 균열'이라든지 하는 식의 표현은 삼가려 한다. 단지 진부해서만이 아니라, 그것만으로는 해명되지 않는, 모르는 채로 빠져나가는 것들이 있기에.
# 레오폴트 미술관에 들어선다. 좀 더 특별한 공간에 들어섰다는 좀 더 특별한 감정. 왜 '좀 더' 특별하다고 느껴지는가. 오랜 관심의 대상과 연루된 공간이어서. (오랜 관심의 대상이라고 규정하기 이전에) 뭔가 알 수 없는 이유로 나를 잡아끄는 어떤 대상에 대한 감정의 정체를 해명해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기대감에서. 사진으로만 보던 작품을 실제로 볼 수 있는 확인의 시간이어서. 종이에 인쇄된 혹은 디지털 화면에 뜨는 매끄러운 평면적 이미지가 아닌 물리적 실감을 지닌 3차원적 오브제와의 마주침이어서. 기타 등등.
# "세계 최다 규모의 실레 미술관답게 그의 작품 220여 점을 소장하고 있다"는 말에 비추어. 에곤 실레 최대의 컬렉션을 수집한 루돌프 레오폴트(Rudolf Leopold, 1925~2010) 덕분에. 실레의 그림을 실컷 보았다,는 것은 사실. 특별한 그림 하나를 만났다,는 것은 진실.
# 220여 점의 그림들 중에는. 아는 그림도, 모르는 그림도, 알지만 낯설게 다가오는 그림도, 모르지만 익숙하게 다가오는 그림도 있다. 그중에서. 어느 그림 하나에 오래 머무른다. 아니. 그림과 마주치자마자 단번에 사로잡힌다.
아, 이거 너무 좋은데.
# 왜 좋은 거지. 이유를 대봐. 스스로 질문을 던진다. 이미 알고 있는 그림이다. 아는 것과 느끼는 것은 다르다. 말할 수 없다. 말할 수 없는 감탄만이 남게 될 때. 언어의 빈곤을 느끼기도, 혹은 언어화에 대한 강박을 미워하기도 한다. 형태? 구도? 색감? 질감? 아니면 작품이 불러오는 주관적 감정? 그 주관적 감정은 개인의 경험과 기억, 그리고 기질과 성향에 기반하는 것. 아니면 작품의 제목이나 설명이 불러오는 제3의 힘? 지극히 텍스트 중심형 인간인 내가 일말의 텍스트에 의해 촉발되어 이미지의 확장과 스토리의 가능성을 생각해보는 것은 자연스럽다.
# 그림을 보고 제목을 확인한다. <Autumn Tree in Stirred Air (Winter Tree)>. 음악에서 표제음악이 미친 영향을 생각해본다. 전원,이라고 이름 붙인 곡을 들을 때 우리는 전원,이라는 이미지를 연상할 수밖에 없다. 폭풍,이라는 제목의 곡을 들으며 잔잔한 수면을 떠올리는 것은 쉽지 않다. 그림이 첫 번째 훅을 날리고, 제목이 두 번째 잽을 날린다. 때로는 그림이 잽을, 제목이 훅을 날리기도 한다. 때로는 끄덕이기도, 때로는 어리둥절해하기도 한다. 텍스트가 심상에 미치는 지대한 영향. 작품과 제목이 일치하지 않는(심지어 어긋나는, 아무 관련도 없는 것처럼 보이는) 사태에 우리는 이제 익숙하다. 어떤 우리? 현대미술 혹은 현대시를 접하는 동시대의 우리. 시와 철학의 친연성, 시와 음악의 친연성을 거쳐, 시와 미술의 친연성을 생각해보는 요즘. 나는 둘 사이의 유사성 아니 공통감각에 새삼 놀라곤 한다.
# 그러나 이 그림은 그렇지 않다. 의도적인 어긋남이나 비껴감을(혹은 그 의미를) 수용할 준비가 되었다 하더라도, ‘기대의 배반’이라거나 ‘기존 질서의 전복’ 같은 문구는 더 이상 나를 흔들지 못한다. 혁명적인 무엇은(무엇이라도) 시간의 더께와 반복에 의해 진부한 것이 될 수밖에 없는 운명. 너무 잦은 구호와 반복은 피로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때로는 그림이 주는 강렬한 인상을 크게 배반하지 않는 방식으로(혹은 배가하는 방식으로) 붙여진 제목이 그 그림에 대한 감응을 증폭시키기도 한다. 케바케라고? 물론 그럴 수 있다. 누군가에게는 그렇기도 누군가에게는 그렇지 않기도. 예술 작품의 감상처럼 케바케 법칙이 강력하게 작동되는 영역이 또 있을까.
# Autumn Tree in Stirred Air (Winter Tree). 사나운 대기 속의 가을 나무 (겨울 나무). 제목이 주는 영향에 대해 생각해본다. 작가는 그림과 전혀 상관이 없(어 보이)는 추상적 단어를 붙일 수도 있었을 것이다. 가을, 나무, 사나운, 대기, 겨울나무. 그러나 이 구체적인 단어들 때문에, 각 단어가 품은 의미론적 두께 때문에, 각 단어에 반응하는 감상자의 기억과 그로 인해 호출되는 감정 때문에, 단순하고 담담한 제목(단어들의 배열)이 주는 효과는 (때로, 그리고 누군가에게) 걷잡을 수 없는 정체불명의 느낌을 증폭시키기도 한다.
# 매혹을 느끼는 작품을 만나는 것은 행운이다. 이미지이든 글이든 사운드이든. 한 평론가가 “어떻게든 문학과 미술과 음악의 끈을 놓지 않으려는 나의 몸부림”(정여울)이라고 표현한 것을 떠올린다.
# L에게 사진을 보내준다. 벨베데레에서 찍은 실레의 작품들을 포함하여. L은 에곤 실레를 좋아한다. 클림트보다는 실레. 우리의 (많은) 공통점들 중 하나이기도 하다. (역시) 가을 나무에 대한 반응은 남다르다.
"너어무 좋다!"
# 좋다,도 아니고 너무 좋다,도 아니고 너어무 좋다,는 것은 L에게 최상급의 표현. 그녀가 내게 장다첸의 그림을 소개하며 보여주었을 때 내가 보인 반응도 비슷했다.
"이거 굉장한데!"
좋다,도 아니고, 너무 좋다,도 아니고 이거 굉장한데,라는 것은 내게 최상급의 표현.
# 그림에 대한 디테일한 감상을 나누지는 않는다. 전체로서 육박해오는 무엇을 세부적인 부분으로 쪼개어 들여다보는 것은 비평을 쓸 때나 유용한 일이다.
물론 다음과 같이 쓸 수도 있다. (= 다음과 같은 글을 읽을 수는 있다.)
“이것은 기묘한 나무다. 줄기는 처음부터 대지에 수직으로 서는 대신 오른쪽으로, 오른쪽으로 기울고 있다. 그렇게 한껏 오른쪽으로 뻗은 나무는 이윽고 왼쪽으로 크게 반전하며, (…) 거대한 의문 부호의 하부를 땅 속에 묻어둔 듯한 형태를 취한 채 여기저기로 굵거나 가는 가지를 내민다. 그 가지들만 해도 수직으로 서 있는가 하면 옆으로 뻗은 것도 있고, 그중에는 줄기라도 되는 양 도중에서 반전해 한 바퀴를 회전한 것도 있다. 그런가 하면 중간으로 갈수록 줄기에서 갈라져 나올 때보다 굵어지는 가지도 있다. 그 정도로 굽고 비틀리고 몸부림치고 있지만, 전체적인 구성에서는 놀라울 정도로 안정감이 느껴진다. (…) 지나치게 가는 가지는 나무의 일부이기보다는 하늘의 갈라진 틈처럼 보인다. 지독히 신경질적으로 보이면서도 어딘가 안정적이고 느긋해 보이는 나무다. 한편 군데군데 껍질이 벗겨져 나간 줄기의 일부는 사실적으로 보이는 반면, 섬세한 가지들은 그저 하늘을 가르기 위해 그려져 있는 것처럼 보인다. 구체적이면서도 추상적이며, 입체적이면서도 평면적이다.”
- 구로이 센지, 김은주 옮김, <에곤 실레, 벌거벗은 영혼>(다빈치, 2003) 중에서
공감하는 부분이 없는 것은 아니어서. 그러나 그 어떤 쓰인 글도, 말해진 것도, 내게 직접적으로 스며든 그림의 온기 혹은 냉기를 대신할 수는 없다. 뭐라고 불러야 할까. 에너지? 주파수? 기? 벤야민식의 ‘아우라’? 바르트식의 ‘풍크툼’? 정동? 감응 혹은 어펙트?
# 내게만 의미화되는 어떤 ‘가을 나무’ 혹은 ‘겨울 나무’ 그리고 그 대상에 대한 애증 관계가, 지나온(거쳐온/헤쳐온) ‘사나운’ 시간들을 몰고 오는 느낌. 그러나 그 감정의 결이 단지 사납기만 한 것은 아니어서. 사납고도 부드러운, 변화무쌍한 대기의 감촉 같은 것. 그럼에도 불구하고, 땅에 뿌리를 박고 있는 어떤 존재 혹은 생명에 대한 말할 수 없는 애틋함 같은 것.
# 실재와 마주치는 것. 실재와 이미지의 관계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아이러니는 이렇다. 나는 이미지로 만났던 실재를 실제로 만나고 나서 이를 다시 이미지로 남긴다는 것. 사진에서 보았던 작품 이미지는 내가 찍은 사진 이미지에 의해 반복된다. 이미지에서 출발해 이미지로 돌아오는 과정. 그러나 전자의 이미지와 후자의 이미지는 다르다. 차이는? 실재를 직관한 ‘나’라는 주체의 개입에 의해 생겨나는 차이.
# 남은 질문은 이렇다. 나는 이 ‘차이’에서, 이 ‘낙차’에서 무엇을 길어 올릴 것인가.
(2024-7-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