싱가폴에 자주 드나들던 시기가 있었다. 생각해보면 재직 중 마지막 출장지도 싱가폴이었다. 마지막으로 다녀간 것이 10년 전. 문득 오차드 로드가 생각 나 저녁 산책 겸 걷기로 한다. 궁금할 것 없는 쇼핑 거리이지만, 자주 묵곤 했던 호텔 쪽으로 자연스레 발길이 향한다.
여러 번 오갔어도 딱히 추억이랄 만한 것이 기입되지 않은 도시. 그럼에도 싱가폴 하면 떠오르는 어떤 장면이 이 호텔에서 연출되었기에. 특별할 것 없는 호텔에 특별한 기억을 주입해 특별하게 의미화된 호텔. 이쯤 어디에 호텔이 있었던 것 같은데. 구글맵에서도 잡히지 않는 것을 이상하게 여기다가. 만다린 오차드가 힐튼으로 바뀌었다는 것을 근처 매장 직원에게 물어보고서야 알게 된다.
그것은 그것으로 있지 않다. 그때 그것은 그것의 외관과 유사하게 남아 있지만. 내 기억 속의 그것으로는 더 이상 남아 있지 않고. 그렇다면 그것이 변한 것인가. 그것의 이름이 변한 것뿐인가. 그것을 수용하는 나의 인식이 변한 것인가.
전율. 아이온 오차드를 기점으로 오차드 거리를 따라 걷다가 홀린 듯 멈춰선다. 순식간에 10년 전으로 되돌아가는 경험. 휘황한 쇼핑 스트리트의 시각적 효과 때문이 아니다. 날카로운 청각적 자극. 바로 새 소리. 아니 새떼 소리. 10년 전 이 거리 어디쯤에서 들려오는 새떼 소리에 밤새 잠들지 못하고 뒤척이다 결국 새벽까지 무언가를 쓰게 만들었던 그 시간과 그 공간으로 나를 초대하는 소리.
홍차와 마들렌을 매개로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 떠난(떠나기로 결심한) 프루스트처럼, 나는 미각이 아닌 청각을 통해 10년 전의 시간을 재구성해보고 싶다는 충동을 느낀 것일까. 주위를 둘러본다. 무심해 보이는 사람들.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것처럼 지나가는 행인들 속에서 나 혼자 어리둥절한 채 하늘을 올려다본다. 어디에도 새의 형상은 없다. 아무것도 찍을 것이 없는데 무언가를 찍는다. 마치 그 순간의 대기를 붙잡듯.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게 하려는 듯.
기록을 뒤진다. 정확히 10년 전. 호텔 창밖으로 들려오는 새떼 소리에 귀 기울이다가 그 소리를 묘사하고 싶다는 충동에 여러 단어를 동원하지만 실패하고 마는(실패할 수밖에 없는) 과정이 간단한 메모로 남아 있다. 득시글거리다, 높다란 아우성, 끓어오르는 소리, 지글거리다, 수백 개의 윷가락을 동시에 부딪치면 나올 법한 소리, 그 어떤 의성어 혹은 의태어로도 담을 수 없는 소리, 인간의 표음 체계로는 옮길 수 없는 소리 등등. 나는 단지 '새떼 소리'라고 정의할 뿐이다. 저기 있는/들려오는/풍겨오는/만져지는 무엇을 온전히 담을 수 없는 언어의 무용함. 들려오는 저것은 새떼 소리라고 약속된/학습된 무엇일 뿐.
저 소리는 무엇일까. 소리의 정체는? 어떻게 표현할(될) 수 있을까. 모른다. 내가 아는(알 수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단지 '저 소리가 저기에 저렇게 있다’는 것일 뿐. 결국 (10년 전) 나는 새벽 5시 반경까지 새떼(인 것으로 추정되는) 소리에 골몰하다가, 이후에 섞여드는 인간의(인간이 만들어낸) 소리까지 집중해서 듣는다. 엘리베이터 소리, 청소차의 벨소리, 간격이 좁아진 차 소리, 오토바이의 굉음, 그리고 내 귀에서 들려오는 (나의) 심장 박동 소리... 그리고 나는 이렇게 적어놓았다.
"나는 있는 힘껏 듣는다. 전력을 다해."
메모에 달아놓은 제목은 '청음(聽音)'이었다. 10년 전 어느 날의 나는 이국의 어느 호텔에서 적어도 무엇인가를 '전력을 다해' 했다는 것. 싱가폴의 오차드 로드는 내게 쇼핑의 거리가 아닌 '청음'의 거리였다는 것. 지금은 없어진 만다린 오차드는 내게 '청음'을 기록하는 계기를 마련해준 호텔이었다는 것.
있는 힘껏 할 수 있다는 것 자체도 능력이라는 생각이 든다.
(2025년. 싱가포르. 오차드 로드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