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많던 여학생들은 어디로 갔는가

한국 엄마들 수다 참관기


대만에 거주할 때의 일이다. 내가 사는 아파트는 타이페이 국제학교와 가까워 외국인들이 선호하는 곳이었다. 해외 곳곳에서 건너온 주재원 가족들 중엔 한국인 가족도 꽤 있었다. 어느 날, 같은 아파트에 사는 한국 엄마 서너 명과 차를 마셨다. 어쩌다 보니 이야기의 결론은, 딸들아, 공부하지 말고 예쁘게 차려 입고 클럽 가라,였다. 여자 팔자 뒤웅박,이라는 말의 현대판 버전이리라. 나는 경멸과 혐오가 섞인 씁쓸한 미소를 지었던 것 같다. 문정희의 시 ‘그 많던 여학생들은 어디로 갔는가’를 떠올렸다.


엄마들의 세계에선 이름을 잘 모른다. 누구 엄마,로 통한다. 나이가 많으면 자연스레 ‘언니’가 된다. 나는 누가 나를 ‘언니’라 부르는 것도 익숙지 않고, 내가 누군가를 ‘언니’라고 부르는 것도 익숙지 않다. 나보다 한참 어린 사람에게도 쉽게 말을 놓지 못한다. 그것은 엄마들 세계에서 껄끄러운 일이다. ‘언니들’에겐 싹싹하게 굴어야 하고, ‘동생들’에겐 친근하게 말도 놓고 편하게 대하는 것이 좋다. 누구 엄마, 몇 층 엄마 등으로 부르는 것이 일반적인데 최근에 새로운 명명법도 알게 되었다. 프랑스 엄마, 홍콩 엄마, 영국 엄마 등등. 엄마들의 국적에 따라 붙여진 것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그게 아니었다. 남편이 프랑스 사람이면 프랑스 엄마, 남편이 홍콩 사람이면 홍콩 엄마, 남편이 영국 사람이면 영국 엄마가 되는 것이다.


‘엄마들’도 각자 좋아하는 것이 있었을 테고, 꿈이 있었을 것이고, 원하는 공부를 했을 테고, 관심 분야에서 일을 한 적도 있을 것이다. 우연히 툭툭 튀어나오는 말로 짐작할 뿐이다. 누구 엄마는 작곡을 전공했고, 누구 엄마는 M&A 관련 일을 했으며, 누구는 어느 지역에서 내로라하는 학원을 운영했다. 누구 엄마는 뮤직 디렉터로 일한 적이 있었고, 누구 엄마는 반도체 회사에서 마케팅 일을 하고 있다. 누구 엄마는 좋아하는 요리를 살려 동네 엄마들을 모아 요리 교실을 열었고, 누구 엄마는 집에서 빵을 구워 알음알음 커뮤니티 시장을 공략하고 있다. 누구 엄마는 영어를 한 마디도 못하지만 아이 영어 공부 시키는 것만은 귀재로 소문 났다. 화려한 외모를 가진 누구는 유명기업 CEO의 사모님이 되었고, 못생겼지만 부잣집 딸이었던 누구는 얼굴을 완전히 뜯어 고치고 재벌에 시집 가서 떵떵거리고 산다 했다. 그들의 자식들이 유명 호텔에서 한 끼 식사로 몇 백 만원을 쓰고, 몇 백 만원짜리 구두를 사 신고, 모임 때마다 구두와 백과 자동차 색깔을 삼위일체로 맞춰 나온다느니 하는 이야기들은 더 이상 시기심이 들어갈 여지도 없이 머나먼 나라의 덧없는 전설이 되고 말았다.


그들은 ‘누구 엄마’이기 이전에, 그 자체로 ‘그 누구’이다. 우리나라 최고 의과 대학을 나온 딸이 역시 의사 남편을 만나 버젓이 함께 병원을 운영하고 있어도, 재벌 집에 시집 가서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소비 생활에 전념하는 다른 집 딸에 비하면 초라한 삶을 살고 있다 생각하는 것도 역시 ‘그 누군가’의 ‘엄마들’이다. 가만히 듣고 있던 나는 생각한다. 이러한 이야기를 하는 엄마들은 그러한 삶을 정말 부러워하는 걸까. 아니면 현재 만족스럽지 않은(물론 상대적이다) 부분에 대해 뭔가 일회성 하소연으로라도 털어낼 대상을 찾고 있는 것일까.


나는 조심스럽게 말한다. 돈이 많으면 편리할 것 같기는 한데 그렇게까지 많은 돈을 원하지는 않는다고. 그들의 생활이 부럽지는 않다고. 그러면 엄마들은 또 정색을 하고 내 의견에 동의한다. 평범하게, 건강하게 그리고 마음 편하게 사는 게 최고라고. 그런데 돈은 많았으면 좋겠다고. 좀 많이. 결론은 다시 약간 수정된다. '평범하게 그러나 돈은 적절히 많은' 조건으로. '적절히'의 기준은 사람마다 다른 것으로.


그 많던 여학생들은 대부분 누군가의 아내 그리고 누군가의 엄마가 되었을까. 일을 할 수도 일을 하지 않을 수도 있다. 아내 혹은 엄마가 되었을 수도 혹은 되지 않았을 수도 있다. 그들은 다 어느 곳에서 제 목소리를 내고 있을까. 자기만의 고유한 목소리를.



그 많던 여학생들은 어디로 갔는가

문정희

학창 시절 공부도 잘하고
특별 활동에도 뛰어나던 그녀
여학교를 졸업하고 대학 입시에도 무난히
합격했는데 지금은 어디로 갔는가
감자국을 끓이고 있을까
사골을 넣고 세 시간 동안 가스불 앞에서
더운 김을 쏘이며 감자국을 끓여
퇴근한 남편이 그 감자국을 15분 동안 맛있게
먹어치우는 것을 행복하게 바라고 있을까
설거지를 끝내고 아이들 숙제를 봐주고 있을까
아니면 아직도 입사 원서를 들고
추운 거리를 헤매고 있을까
당 후보를 뽑는 체육관에서
한복을 입고 리본을 달아주고 있을까
꽃다발 증정을 하고 있을까
다행히 취직해 큰 사무실 한켠에
의자를 두고 친절하게 전화를 받고
가끔 찻잔을 나르겠지
의사 부인 교수 부인 간호원도 됐을 거야
문화 센터에서 노래를 배우고 있을지도 몰라
그리고는 남편이 귀가하기 전
허겁지겁 집으로 돌아갈지도
그 많던 여학생들은 어디로 갔을까

- 문정희 시집 <오라, 거짓 사랑아>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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