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는 아이를 낳는 순간부터 본능적으로 자신과 닮은 점을 찾아낸다. 아니, 심지어 태어나기 전 뱃속의 아이를 찍은, 알아보기도 힘든 초음파 사진 속의 아이에게서도 기어코 닮은 점을 찾아내려 애쓴다. 아이가 어릴 때는 외모적인 면에서의 유사점을 찾지만, 아이가 조금 더 자라 말을 하기 시작하고, 타인과의 교감을 시작하게 되면서부터는 말버릇이나 고집 등 또 다른 차원의 닮은 점이 드러난다.
특히 나처럼 아이와 성별이 같은 경우에는 그 특징이 도드라진다. 단순히 남자라서,라는 말로는 설명되지 않는 특이한 공통점이 나와 아이 사이에 발견될 때마다 나는 생명의 신비, 유전의 강력함에 대해 소스라치곤 한다. 신생아 시절에는 귀 뒤에 뾰족하게 튀어나온 뼈를 찾고는 신기해하기도 했고, 아이가 조금 자라 의자에 앉을 수 있게 되면서는 발을 제대로 딛지 않고 바깥쪽 날로 디디고 있는 모습에 경악하기도 했다. 신체적 특성은 그러려니 했었지만, 습관까지 유전의 영향을 받는다는 말인가?
올해로 여섯 살이 된 아이는 유치원에서 나름의 사회생활을 이어가고 있다. 선생님들과 친구들이 모인 그 공간에서 아이는 친구에 대해 좋고 싫음이 분명해지고, 때로는 나름대로 심각하게 싸우고 화해하며, 특정 문제에 대해서 과민반응을 하고, 때로는 평소 무관심했던 선생님의 사랑을 갑자기 갈구하기도 한다. 어떤 경우에는 분명히 성격적 결함이 그 원인이라고 판단될 때가 있는데, 최악까지 상상하곤 하는 부모의 입장에선 여간 걱정되는 것이 아니다. 아내가 그런 문제로 골머리를 썩을 때, 나는 옆에서 몰래 내 성격적 결함을 아이의 그것과 결부시킨다. 5년 간 아이를 키우며 유전의 강력함을 경험해 온 나로서는 어쩔 수 없는 대처다. 원래 사주나 미신 같은 것들도 한두 번 맞아 들어가다 보면 믿음이 굳건해지지 않던가?
아이와 나의 성격적 결함을 찾으면 맨 처음 드는 느낌은 ‘실망’이다. 왜 하고 많은 성격 중 저런 것이 아이에게 넘어갔는지, 하늘의 무심함을 원망한다. 하지만 조금 더 깊이 생각해 보면 전혀 반대의 마음이 생겨난다. “잠깐만. 그럼 내가 가진 성격적 결함도 유전적인 발현일 수 있는 것이 아닌가? 그럼 내가 이 성격을 고쳐보겠다고 뛰어본들 소용없는 것 아닌가?” 이런 생각이 들면 마음 한편이 순식간에 편안해진다. 내 지랄 맞은 성격은 내 잘못이 아니었던 거다. 그저 유전자의 잘못이었다. 어찌 내가 감히 유전이라는 큰 물길 속에서 방향을 바꿔보겠다고 호기를 부렸단 말인가?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과감히 유전에 무릎을 꿇고 생긴 대로 사는 것뿐일진대.
인터넷에 마음을 다스리는 방법을 검색하면 다양한 해결책이 등장한다. “나를 벗어나 한 꺼풀 밖에서 스스로를 바라보는 ‘메타인지’”, “어쩔 수 없는 것에 집중하지 않고 내가 컨트롤할 수 있는 부분에만 집중하기”, “과거의 잘못을 반추하지 않기” 등 여러 방법이 등장하지만 그 줄기는 하나다. 내 잘못이 아닌 것들에 대한 부정적 생각을 하지 않는 것.
아이의 결함을 통해 내 결함을 발견하고 그것을 내 탓이 아닌 유전자 탓으로 돌려버리기. 나는 이 방법을 통해 본의 아니게 마음속 평화를 얻는다.
앗! 혹시 내가 지금 하는 이 생각과 행동까지도 유전자의 명령일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