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치라도 성악 전공이 가능하더라고요.
“우리 중학교 같이 가자.”
느닷없다. 뜬금없다. 앞집 사는 민희가 중학교 같이 가잔다. 두어 달 있으면 헤어져야 하는 게 아쉬워하는 말로 언뜻 들렸다. “넌 피아노 열심히 배웠으니 예술 중학교 가는 게 당연하겠지만 나야 뭘 해서 그런 학교 가니?” 뺑뺑이 돌리면 어떤 여학교로 배정될지 훤히 보이는 마당에 민희가 가자는 중학교는 내가 가야 할 곳과는 거리가 멀다. 그런 줄 알면서 민희 제안이 계속 머릿속에 뱅뱅 맴돌았다.
빨간 베레모, 목에 모피 달린 회색 롱코트, 여름용 파란색 치마, 넥타이 달린 흰색 셔츠, 봄 가을용 감청색 교복, 양옆으로 곱게 땋은 머리 스타일, 깔깔거리며 남학생 여학생들이 함께 타는 노란 스쿨버스. 민희가 같이 가자는 학교는 특별한 아이라야 갈 수 있는 곳이다. 특권 가진 아이들만 가능한 듯 일반 학생은 넘볼 수 없는 선망의 대상이었다.
학교 건물은 어떻고. 어린이 대공원 입구에 떡하니 마치 박물관 건물처럼 보이는 학교. 잠깐이지만 들어간다는 생각만 해도 신바람 났다. 친한 친구와 손잡고 매일 같은 학교 갈 생각만으로도 가슴이 콩닥 뛰었다.
‘도전해 봐?’
마음은 굴뚝같은데 아무리 생각해도 나라는 사람에게는 타고난 예술적 재능이라고는 찾을 수가 없었다. 기껏해야 4학년 때 전국 미술대회에 나가서 탄 ‘가작상’이 전부인데. 참여하면 개나 소나 받을 수 있는 상이라며 스스로도 대단하게 여기지 않던 상이다. 미술은 선택할 여지가 없었다.
그렇다고 고전무용을 하겠나 하루아침에 발레를 하겠나. 두어 달 안에. 체육이라면 몰라도. 달리기는 자신감 넘치고 공 던지기도 전교 3등은 해봤는데. 그러면 뭘 해. 아쉽게도 제안한 학교에 체육전공은 없었다.
이틀 고민 끝에 ‘성악’으로 정했다. 나를 잘 아는 몇 친구들은 격려해 주었지만 대부분 ‘아서라’ 하는 눈빛이었다. 잊을 수 없는 ‘과거’가 있는 나로서도 망설여지기는 마찬가지다. 그날 일은 생각만 해도 벌겋게 얼굴이 달아오르고 식은땀이 났다.
5학년 겨울 방학 전 음악 시간이었다. 노래 실기 시험 보는 중이었다. 노래는 정몽주의 단심가 〈이 몸이 죽고 죽어〉였다. 피아노 전주가 흘렀다. 한 음 한 음 피아노 건반 소리에 이제 노래만 맞춰 찾아 들어가면 딱 맞다.
노래는 언제 시작해야 하지. 박자는 어떻게 맞춰야 하지. 감이 오질 않아 첫음절 시도만 몇 번째인가. “너 음치인가 보다. 어쩌면 그렇게 음정 한번 못 잡니?” 보다 못해 결국 선생님이 터뜨렸다. 답답하고 안됐다는 눈빛을 띠며 다음 절로 넘어갔다.
많은 아이 앞에서 음치라는 판정을 받은 날이다. 차마 잊지 못할 ‘그날’ 이후로 지금까지 평생 〈이 몸이 죽고 죽어〉는 다시 불러 본 적이 없다. 그런 내가 성악을 전공하겠다 결심한 건 다른 뾰족한 대안이 정말이지 없다는 궁여지책이었다.
지정곡과 선택 곡 딱 두 곡만 무조건 연습하면 된다. 안 될 게 뭐 있겠어. 쌓아 놓은 기본기가 없어도 절대 티 안 날 수 있다는 생각이 스쳤다. 악기를 살 필요도 없고 정확하게 노래 음정과 박자에 목소리만 잘 다듬으면 가능할 것 같다는 계산이 압도했다.
늘 선택의 연속으로 뭉쳐진 게 인생이다. 지금이나 당시나 사고방식은 확실했다. 떨어지면 어때. 주어진 시간에 최선을 다하면 되고 결과에 너무 연연하지 말자. 미래 일어날 일을 미리 상상해서 현재 일을 시도해 보지 않는 건 실패보다 더 최악이다.
일단 길은 선택했지만 노래는 어떻게 연습해야 하는지부터 막막했다. 성악가를 찾아 지도받는 일은 상상도 못 한다. 댈 만한 연줄이 있지도 않은 우리 집이다. 알루미늄 새시를 하던 아버지 사업도 늘 자금 문제로 집안이 숭숭했다. 거기에 나의 진학 문제를 의논할 분위기는 도무지 아니었다.
머릿속에 방법 하나가 떠올랐다. 우리 반 꾀꼬리 영민이에게 부탁해 보는 거였다. 아니면 말고가 아니라 아니면 아니기 때문에 필사적으로 매달렸다. 간절한 눈빛을 외면하지 못해서였을까. 영민이는 부탁을 들어주었다. 덕분에 노래 두 곡을 너끈히 마스터했다.
심사평이 엇갈렸다. 목소리가 좋았다는 쪽과 노래하는 중간 높은 부분에서 음정이 틀렸다는 쪽으로 분분했다(시험 볼 때 노래 중간 높은 음정 부분에서 틀렸음을 직감했다). 찝찔한 기억만 남기고 시험은 그렇게 아스라이 지나갔다. 결과에 기대를 건다는 건 무리였다.
누구도 기대하지 않았던 결과일 텐데 나는 보란 듯이 ‘합격’해 버렸다. 친구 민희는 예상 밖에 통과를 못 했다. 얄궂은 교차 결과 때문에 ‘같이’ 학교 다니는 일은 이루지 못했다. 부족함과 결핍을 확실히 알고 선택했기에 그것을 메꾸기 위한 나의 열정과 노력은 교문을 지키는 수위 아저씨마저도 인정했다. 이때 선택은 앞으로 살아갈 인생에 이토록 화려한 막을 올렸다.
예술은 타고난 재능이 뒷받침되어야 탁월해질 수 있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꼈다. 어느 정도까지는 실력이 향상되지만 한계가 있음을 인정했다. 점수만 보고 성악을 계속하라는 주위 권유를 마다하고 당차게 일반 고등학교를 선택했다. 평생 가슴 뛰며 가야 할 길이 성악은 아님을 알고 미련 없이 포기했다.
중학교 3년은 인생에서 정서적 감수성, 예술에 대한 애정, 인간관계, 자존심에 탄탄한 초석을 세웠던 시기였다. 그때 뒤로 합창 반장, 중창단 노래 활동을 했다면 믿을까. 미국에서도 국악 경연 대회 조직 위원장을 맡아 예술의 인연은 이어졌다.
모순덩어리 인생에서 꽃은 꼭 봄철에만 피어나지 않는 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