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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차준택 Spirit Care Jan 05. 2021

"죽음과 삶의 이유"

[영화로 풀어가는 죽음학 이야기 2] / 영화 "남한산성'

- "죽음과 삶의 이유"

- 영화 <남한산성>, 감독-황동혁, 2017


“죽음과 맞 바꿀 정도의 삶의 명분은 무엇인가?”

영화 <남한산성>은 병자호란의 배경으로 한 김훈의 동명소설을 영화화 한 작품이다. 명장면 중 하나는 죽음을 각오하고 청나라와 싸워야 한다는 김상헌과 백성을 살려야 한다며 화친을 주장하는 최명길의 논쟁이다.   

  

죽음학 관점에서 생각해 봤다. 죽음과도 맞바꿀 수 있는 삶의 명분은 무엇일까? 이렇게 질문을 바꾸어 볼 수도 있겠다. 어떤 경우라도 삶은 지켜내야 하는 것인가? 존엄사, 안락사 논쟁에 대입해서 생각해 보자. 이미 우리나라에서도 시행되고 있는 연명의료결정제도는 회생 가능성이 없는 중환자의 연명의료를 중단하는 조건과 절차를 정하고 있으며, 이에 따라 예전보다 좀 더 인간답게 삶을 마무리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좀 더 적극적인 방식의 조력사나 안락사 시행에 대해서는 여전히 논란이 있다.      

더는 삶을 지속하고 싶지 않다. 생을 마칠 기회를 얻게 돼 행복하다. 노인이 삶을 지속해야 하는 것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는 도구로 내가 기억되기를 바란다.

인간은 누구나 안락하고 행복한 삶을 원한다. 한편으로 인간은 누구나 늙고 병들며 죽음을 맞이한다. 그렇다면 늙고 병든 상태는 안락하고 행복한 삶이 아닐까? 지난 2018년 호주의 식물학자인 104세 데이비드 구달 박사는 스스로 생을 마감하기 위해 안락사가 합법인 스위스행을 택했다. 그가 살고 있는 호주의 빅토리아주에서는 6개월의 시한부가 내려진 경우에만 안락사를 허용하고 있는데, 구달 박사는 대상이 되지 않았다. 구달 박사가 불치병 등 치명적인 질병에 걸린 상태는 아니었지만 104라는 연령으로 인해 건강은 좋지 않았고 혼자의 힘으로는 생활하기 어려웠다고 한다. 구달 박사는 ABC방송 인터뷰에서 “질병은 없지만 건강이 나빠지면 지금보다 더 불행해질 것 같다"며 “104세라는 나이에 이르게 된 것을 매우 후회하고 있다"라고 말했다. 안락사 지지단체에서 활동해온 구달은 안락사 하기 몇 개월 전 넘어져 병원에 입원한 적이 있는데 그때도 자살을 시도했다고 한다. 스위스에 도착한 그는 “더는 삶을 지속하고 싶지 않다. 생을 마칠 기회를 얻게 돼 행복하다. 노인이 삶을 지속해야 하는 것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는 도구로 내가 기억되기를 바란다"라고 말했다. 그는 가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베토벤 교향곡을 들으며 영면에 들었다.(출처 중앙일보)      


구달 박사에서 삶은 무엇이고 그는 왜 죽음을 앞당기려 했을까? 그의 인터뷰를 근거로 추정해 보면 불치병이 없다 하더라도 건강이 나빠지면 더 불행해질 것 같다는 판단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는 하루하루의 생활이 불행의 연속이라고 느껴졌기에 삶을 더 이상 지속하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물론 그가 평균을 훨씬 뛰어넘는 104세라는 삶의 시간들을 살았다는 것이 안락사를 선택하는 데에도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과도한 장수가 그에게는 좋은 것만이 아니었던 것이다. 100세 시대를 맞게 될 현세대에 시사하는 바가 있다고 본다.     


하지만 여전히 안락사를 반대하는 사람들은 안락사가 생명 경시 풍조를 만들 수 있다는 점을 우려한다. 삶이 힘들고 불행하다고 느낀다고 해서 쉽게 스스로의 삶을 마감할 수 있도록 허용한다면 그것은 사회적으로 문제가 되는 자살과 다를 바 없다는 것이다. 자신의 생명은 자신의 것이기도 하지만 공동체를 이루고 살아가는 사회 구성원들은 서로가 서로에게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기에 나의 생명은 너의 생명과 너의 생명은 나의 생명과도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다.      


회복 불가능한 사망의 단계에 이른 후에 환자가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 및 행복추구권에 기초하여 자기 결정권을 행사하는 것으로 인정되는 경우에는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연명 치료의 중단이 허용될 수 있다.

우리나라는 연명의료결정법이 시행되기까지 몇 가지 큰 사건이 있었다. 우선 2004년 보라매 병원 사건과 관련한 대법원 판례가 있다. 의사가 환자와 보호자에게 치료를 권했지만 보호자의 요청으로 치료 중단 및 퇴원을 허용했고 환자 사망하자 의사가 기소되었다. 법원은 부작위에 의한 살인죄의 공동정범으로 보호자에게는 살인죄, 의사들에게는 살인방조죄 판결을 내렸다. 이후 의료계 관행에 변화가 생겼는데 가족이 아무리 원해도 퇴원을 허락하지 않게 된 것이다. 이후 사회적 논란은 계속되었고 2009년 김 할머니 사건에 대한 대법원 판결 이후 2016년 이르러 연명의료 관련 법률이 제정되었다. 김 할머니 사건에 대한 대법원 판결은 “회복 불가능한 사망의 단계에 이른 후에 환자가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 및 행복추구권에 기초하여 자기 결정권을 행사하는 것으로 인정되는 경우에는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연명 치료의 중단이 허용될 수 있다.”라고 판시한 내용으로 헌법 제10조 인간의 존엄과 가치, 행복추구권, 자기 결정권에 대해 국가는 개인이 가지는 불가침의 기본적 인권을 확인하고 이를 보장할 의무를 져야 하는 것으로 본 것이다.(참고 <적극적 안락사 및 의사조력자살 허용 입법의 필요성>, 2004, 이문호)     

출처 : 법무법인 바움

미국에서도 유사한 사례가 있었는데 1990년 20대에 식물인간 상태에 빠진 테리 시아보라는 여성의 영양 공급을 위한 튜브 제거를 놓고 15년간 가족 간, 사회단체 간, 행정기관, 법원 등 미국 사회 전체가 논란에 휩싸였으며 결국 법원 판결에 의해 2005년 영양공급 튜브가 제거되었고 13일 만에 시아보는 숨을 거두었다.   

 

죽음학과 죽음에 대한 논의는 삶과 생명, 일상생활에 대한 논의이며, 꿈과 믿음, 희망과 사랑에 대한 논의이다.   

안락사나 조력사는 우리나라뿐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도 논란이 되는 사안이다. 모든 논란의 중심에는 죽음이 있다. 그리고 그 죽음에 대한 논의는 결국 삶에 대한 논의이다. 삶의 가치와 의미가 무엇인지, 하루하루 살아가는 데 있어서 무엇이 소중하고 중요한지, 삶이 힘들고 어렵더라도 끝까지 지켜내야 하는 것은 무엇인지, 희망이라는 것은 무엇인지에 대한 논의이다. 즉 죽음학과 죽음에 대한 논의는 삶과 생명, 일상생활에 대한 논의이며, 꿈과 믿음, 희망과 사랑에 대한 논의이다. 이 모든 것에 대한 생각은 각자 다를 수 있겠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이 글을 쓰고 있는 나는, 읽고 있는 여러분은 분명 살아 있다는 것이다.     

다시 <남한산성>으로 돌아가서, 영화가 아닌 원작인 책 <남한산성>의 서문에 김훈 작가가 쓴 구절을 살펴보자. “밖으로 싸우기보다 안에서 싸우기가 더욱 모질어서 글 읽는 자들은 갇힌 성 안에서 싸우고 또 싸웠고 말들이 창궐해서 주린 성에 넘쳤다. 나는 아무 편도 아니다. 나는 다만 고통받는 자들의 편이다.” 끝.


관련글 : "죽고 싶을 정도로 힘들다는 것" https://brunch.co.kr/@ujuboygpqn/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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