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로 풀어가는 죽음학 이야기] / "미 비포 유"
"죽고 싶을 정도로 힘들다는 것" (안락사의 여러 측면들)
- 영화 <미 비포 유, Me Before You>, 감독-테아 샤록, 2016
안락사, 존엄사, 조력자살에 대한 개념과 분류에 대한 기준은 다양하다. 우선 존엄사를 살펴보자. 우리나라에서 시행하고 있는 ‘연명의료결정법’에서는 법의 목적에 대해 “이 법은 호스피스ㆍ완화의료와 임종과정에 있는 환자의 연명의료와 연명의료중단등결정 및 그 이행에 필요한 사항을 규정함으로써 환자의 최선의 이익을 보장하고 자기결정을 존중하여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보호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라고 밝히고 있다. "임종과정"의 정의에 대해서는 “회생의 가능성이 없고, 치료에도 불구하고 회복되지 아니하며, 급속도로 증상이 악화되어 사망에 임박한 상태를 말한다.”라고 정의하고 있다. 또한 "말기환자(末期患者)"란 “적극적인 치료에도 불구하고 근원적인 회복의 가능성이 없고 점차 증상이 악화되어 보건복지부령으로 정하는 절차와 기준에 따라 담당의사와 해당 분야의 전문의 1명으로부터 수개월 이내에 사망할 것으로 예상되는 진단을 받은 환자를 말한다.”라고 정의하고 있다.
따라서 존엄사를 “연명의료 결정법”에 근거해서 의료 행위와 관련지어 정의해 보면 의학적으로 임종시점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확인된 환자에 대해 더 이상의 연명의료 행위를 하지 않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즉 힘들게 연명치료를 받다가 죽음에 이르는 것이 아니라 죽음을 앞두고 삶을 좀 더 인간답게 마무리할 수 있게 한다는 취지하고 할 수 있다. 물론 당사자의 의사에 따른 것이어야 하며, 환자가 의사표현 능력이 없을 때는 가족(배우자 및 직계 존비속) 모두의 동의가 있어야 한다.
안락사(euthanasia)는 그리스어로 ‘아름다운 죽음’을 의미한다. 고통 없이 죽음에 이르게 한다는 의미에서는 위에서 설명한 존엄사의 취지와 유사한 면이 있으나 아래에서 설명할 적극적인 안락사는 존엄사와는 구분되어야 한다고 본다. 안락사는 적극적 안락사와 소극적 안락사로 나눌 수 있고 적극적인 안락사는 의사가 환자에게 약물 등을 투여하여 죽음에 이르게 하는 것인 반면 소극적 안락사는 ‘존엄사’의 연명치료 중단과 비슷한 개념으로 볼 수 있다. 한편 조력 자살(또는 조력 죽음)은 의사가 처방한 약물 등을 환자 스스로가 먹거나 투여함으로써 죽음에 이르는 것을 말한다. 존엄사, 안락사, 조력자살, 어떤 형태이건 나라마다 법과 제도가 다르고 논란도 끊이지 않고 있다. 그럼 여기서 그런 논란을 찬성과 반대라는 측면에서 살펴보자.
안락사를 찬성하는 사람들은 자기 결정권을 강조한다. 즉, 나의 생명에 대해서는 내가 결정한다는 입장이다. 맞는 말일 수 있겠으나 스스로 죽음을 선택하다는 측면에서 가족과 사회 공동체에 미치는 영향을 생각하면 쉽사리 인정되지 않는 부분도 있다. 찬성하는 입장의 두 번째 측면은 고통의 해소이다. 육체적 정신적으로 고통을 받는 환자가 고통 없이 죽음을 맞이할 수 있다는 것이다. ‘연명의료결정법’에서의 경우와 같이 임종이 얼마 남지 않은 환자에게 치료가 거의 무의미한 경우에는 삶을 마무리하는 시간 동안 고통 없이 보낼 수 있는 것은 환자와 가족 모두에게 긍정적인 의미가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생명을 하루라도 더 연장할 수 있다면 그렇게 하는 것이 옳다는 입장에서의 반론도 만만치 않다.
더는 삶을 지속하고 싶지 않다. 생을 마칠 기회를 얻게 돼 행복하다. 노인이 삶을 지속해야 하는 것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는 도구로 내가 기억되기를 바란다.
논란이 가장 큰 영역은 적극적인 안락사와 조력자살이다. ‘말기환자’는 아니지만 스스로가 의미 있는 활동을 거의 할 수 없다고 느끼는 고령자나 육체적, 정신적으로 고통받는 전신마비 환자, 증상이 심한 치매환자의 경우, 이러한 논란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2018년 호주의 104세 생태학자 데이비드 구달은 “더는 삶을 지속하고 싶지 않다. 생을 마칠 기회를 얻게 돼 행복하다. 노인이 삶을 지속해야 하는 것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는 도구로 내가 기억되기를 바란다.”는 말을 남기고 안락사의 길을 선택했다. 자신의 살던 호주에서는 안락사를 허용하지 않아 스위스까지 날아가서 삶을 마감했다.
법적, 제도적으로 자유롭게 안락사를 선택할 수 있다고 한다면, 그 상황에서의 ‘결정’은 정말 스스로 한 결정이 될까?
‘자기 결정권’에 대해서도 깊이 생각할 필요가 있다. ‘자기 결정권’에서 그 ‘결정’은 정말 자신의 의지대로 결정하는 경우만 있을까? 예를 들어 ‘말기환자’는 아니지만 치료법이 나오지 않아 극심한 고통만 계속 받고 있는 경우, 또한 생명에는 지장이 없지만 정신적인 고통을 받는 경우, 환자로 인해 주변이나 가족 모두가 정신적 고통을 받는 경우, 치료비 부담으로 한 가정을 경제적, 심리적으로 파탄에 이르게 할 수밖에 없는 경우, 고령에 생명만 유지만 하고 있는 경우.., 이와 같은 다양한 경우에 만약 법적, 제도적으로 자유롭게 안락사를 선택할 수 있다고 한다면, 그 상황에서의 ‘결정’은 정말 스스로 한 결정이 될까? 혹시 환자 자신이 주변에 피해를 준다는 생각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안락사를 선택하게 되지는 않을까? 혹은 주변에서 그런 압력이 행해지지는 않을까? 만약 그렇게 된다면 이 사회는 병들고 힘없고 어려운 장애를 가진 사람들에 대해서 어떤 시각을 갖게 될까? 만약 조금이라도 그런 분위기가 이 사회에 형성된다면 그것은 존엄사라는 제도가 추구하려는 인간의 존엄성, 품위 있는 삶의 마무리라는 가치와는 거리가 먼, 인간 생명에 대한 경시와 물질만능, 타자에 대한 배려가 없는 이기적이고 비인간적인 사회가 되고 말 것이다.
영화 미비포유(Me Before You)는 무엇 하나 부러울 게 없었던 청년이 하반신 마비가 된 후 겪게 되는 좌절과 사랑이야기, 그리고 결국은 사랑하는 사람과 가족을 두고 안락사를 선택하게 되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나는 진심으로 나의 삶을 사랑했다’는 주인공의 말처럼, 사고 이전에 주인공은 온갖 극한 스포츠를 즐기는 활기 넘치는 청년이었다. 하지만 사고 이후에는 매일 아침 눈을 뜰 때마다 더 이상 살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이렇듯 의미 없는 자신의 삶을 스스로 마감하고 싶어 한다. 주인공은 위에서 예를 든 데이비드 구달 박사처럼, 안락사를 허용하는 스위스로 향한다.
나의 삶을 마감하는 것은 타인의 삶이나 고통과도 연결되어 있으며 타인의 고통이 곧 나의 고통과도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안락사의 찬반을 논하기 전에, 우리는 인간과 생명에 대한 존중과 소중함을 기억해야 한다. 그리고 타인의 고통에 관심을 갖고 민감하게 반응해야 한다. 나의 삶을 마감하는 것은 타인의 삶이나 고통과도 연결되어 있으며 타인의 고통이 곧 나의 고통과도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그렇게 행동할 때 세상은 조금 더 인간답고 아름다운 세상이 될 것이다. 인간은 그 자체로 목적이지만 돈이나 성공은 그 자체가 목적이 될 수 없고 되어서도 안되기 때문이다. 끝.